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성도들이 축복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아름다운 조직입니다.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구원받고 이만큼 성숙한 성도들이 되기는 어려웠을게 분명합니다.
2010년 2월20일, 하나님의 뜻대로 이곳에 주는나의산성교회가 세워져 첫 예배를 드리고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를 한사람씩 교회로 인도하셔서 복된 성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건물이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지난6년 동안 우리교회가 처음보다 더 든든하게 세워졌다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 위에 든든하게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 교회의 탄생을 통해 우리교회와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더 잘 세워져가야 할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감화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본문은 몇 절 되지 않는 말씀 속에 순조롭게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가 세워지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겠습니까?
바울선교팀이 빌립보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앞 15장36절부터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서기 50년경, 길도 없고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유럽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총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그 거리가 직선거리로 어림잡아 14,000킬로미터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서울서 뉴욕까지 거리가 11,000키로미터쯤 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시죠?
거리만의 문제겠습니까?
바울서신을 보면 전도여행에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갖 수모를 받으며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간 바울의 생애가 잘 드러납니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유대교 지도자의 길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랐기에 그를 통해 하나님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많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희생 없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만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생명의 산실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번 2차전도여행은 시작부터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15장에 보면 선교팀을 꾸리는 문제로 바울과 절친한 동반자였던 바나바가 아주 심하게 다툰 내용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데려가자고 하지만, 마가는 일차전도여행 때 험난한 전도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전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이 마가는 당시 유복했기에 좀 유약했던 청년이었죠.
이런 마가를 또 데려가자니 바울이 역정이 난 것입니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함께 한 절친한 동역자들이 이 문제로 대판 싸움이 나고 말았습니다.
누가는 이 다툼의 결과를 앞 장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로 떠나니라
이런 게 인간의 모습이죠.
그렇게 해서 팀을 꾸려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 내용은 본문 바로 위 6절에 나옵니다.
바울사도가 1차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교회들을 둘러본 뒤 아시아 쪽으로 가려 했는데 성령께서 그것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북동쪽으로 가려다 막히니까 북서쪽으로 내려왔지만 그곳에서도 복음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막으신 방법은 정확히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환경적으로 막혔으리라 생각됩니다.
정확한 계시로 알려주셨다면 바울이 계속 이런 저런 방법을 시도했을 리가 없죠.
그렇게 길이 막혀 있던 중 오늘 본문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빌립보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이차전도여행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와 우리에게 적용시킬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난관을 만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이 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일이 막힌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인도를 받을 땐 좀 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잘 고려하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번 전도여행의 경우 무엇이 문제인지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차전도여행이 시작된 내용이 앞 13장에 나오는데요.
2절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성령님이 바나바와 바울에게 선교하러 가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팀도 아예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둘을 짜 주셨죠?
또 4절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선지까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정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5장36절에서 보여줍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성령이 말씀하신 게 아니라 바울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랑 갈 것인지도 각자가 좋은 사람을 골랐던 것이죠.
물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언제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완벽한 계획과 작전은 하나님이 짜시고 성령께서 주도하십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열정에 이끌려 성급하게 2차전도여행을 계획하느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길이 막혔으면 빨리 알아차려야 하는 데 6절에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번엔 다른 길로 돌아서 목적지에 가려고 아주 애를 썼다는 겁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해서 해나가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장래의 문제들을 결정하고, 동반자를 정하고, 인생을 꾸려가는 것은 이젠 나 혼자의 생각으로 해나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선택할 때 단지 월급이 많은 곳, 집에서 거리가 가까운 곳, 일이 쉬운 곳. 이런 것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디를 원하시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그 모든 후손들에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세상과 환경에 굴복하고 지배를 받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죠.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지하고 용감한 선택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시는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서둘러 하는 일은 뒤에 낭패를 당합니다.
제가 5년 전에 그래서 거의 1억을 날렸잖습니까?
제이스도시락을 시작할 때, 동기가 좋았고 환경도 그렇게 잘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1층에 자리도 났고, 학교를 그만두며 명퇴금도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충분하지 않은 데, 마음의 조급함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라고 확신하며 급하게 시작을 했던 것이죠.
우리는 매사에 끈기있고 신중하게 기도하며 마음의 확신과 환경의 변화를 주의해서 일을 결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이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보면 일용할 양식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매일이 하나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항상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과 인도받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작은 일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소하고 순탄한 일상이 모여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리의 복된 일생의 전체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도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듯이 우리 개인의 인생과 주는나의산성교회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인도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이 말씀을 통해 깨닫고 지키길 소망합니다.
다음은 빌립보교회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선교팀이 가는 길마다 막혀 우왕좌왕 하던 중 드디어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인도해 주십니다.
9절에 보면 밤에 바울에게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는 환상이 보였습니다.
때로 사람의 요청은 하나님의 요청이시기도 합니다.
남의 간절한 필요나 조언에 무심하지 않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바울은 비로서 하나님께서 아시아보다 유럽에 복음을 먼저 전할 계획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11절부터 경로를 급수정합니다.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렇게 해서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지방에 바울선교팀이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됐다는 기대로 가득 차 발을 들여놓은 빌립보 성에서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2절에 바울사도가 별다른 선교활동 없이 수일을 그냥 유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로 인도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감격적인 현장을 기대했는데 수일간 복음 전할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는 것이죠.
대개 바울의 선교전략은 먼저 유대인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겐 동족에게 구원의 기회가 우선인 게 당연했고, 이미 하나님을 알고 메시야가 올 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복음전파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빌립보에 와보니 유대인 회당이 한 개도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회당이 세워지려면 유대인 남자 열명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곳엔 유대인이 거의 살지 않았다는 것이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로 왔는데 전도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여러 날을 허송세월 한 것입니다.
때로 크게 잘못한 일이 없고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막히고 정체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 팽팽하게 우리의 믿음을 당겨보시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될 땐 드러나지 않던 믿음이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서 그 본색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일이 기도한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내게 무관심하거나 무력하신게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인내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인정받은 다음, 다시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기다린 뒤 다음 순서는 열매가 아니라 작은 싹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순식간에 수확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싹을 주시고 결실을 위해 수고하는 기간을 건너뛰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풍성한 결실을 관리할 수 있는 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내를 샅샅이 돌아다녀도 복음전할 기회를 찾지 못한 바울일행은 기도하기 위해 성 밖 조용한 강가를 찾아갑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빌립보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영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가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이는 기도처가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침 거기에 몇 명의 여자들이 기도를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기껏 빌립보에 와서 만나 복음을 전한 사람이 몇 명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복음의 비밀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하리라 생각했지만 복음을 들은 사람은 단지 몇 명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고대했던 결과들이 이렇게 미미할 때 의욕이 꺾이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고 그 중에 한 여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다못해 복음을 들은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다 열어주셔서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하셨으면 그래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중에서도 단지 루디아 한사람의 마음만을 열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다는 게 하나님과 우리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한 여자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로 이 여인이 빌립보교회의 주축이 된 루디아입니다.
모든 큰 일은 처음에는 다 작은 일이었습니다.
작은 일, 작은 교회에 충성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더 크고 아름다운 계획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의 주축이 된 루디아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좀 떨어진 두아디아라는 지역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자색옷감은 염색이 어려워 값이 비쌌고,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급 직물이었습니다.
비싼 품목을 취급하려면 자본이 많아야 합니다.
루디아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소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두아디라시에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빌립보로 왔던 여류 사업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선뜻 바울선교팀을 집에 들였고, 온 가족을 다 세례 받도록 한 것을 보면 집안에서도 가장의 위치에 있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렇게 당찬 여류사업가 루디아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능한 여류사업가, 너무 든든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만큼 위태하고 연약한 게 없습니다.
하다못해 동물처럼 자신을 보호할 발톱도, 이빨도, 재빠른 다리도 없잖아요?
당시 큰 상업도시였던 두아디라에는 장사가 잘 되길 비는 우상축제가 많았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루디아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양심적이고 분별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깊은 영역에 심어 놓으신 양심은 세상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신호를 계속 보내옵니다.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과 죄로 얼룩진 일상이 세상의 주권자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을 불편스럽게 계속 지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루디아는 양심을 따라 창조주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려한다면 자기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앞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거룩과 사랑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성령이 오셔서 심령을 새롭게 해주셔야 된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사업상 빌립보에 와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걸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 도시에서도 몇명의 여자들을 모아 안식일에 기도모임을 가지며 여전히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인도하셨듯이, 바울사도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합니다.
진지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기를 위해 구원자가 오셨다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듣던 중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이 전해지는 이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역사하십니다.
루디아는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막힌 것이 없이 소통하는 관계가 되면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나를 더욱 단련시켜 복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직관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성령께서 지시하심에 따라 사실 저절로 압니다.
예배에 대한 의무와 기도해야 한다는 욕구와 말씀에 대한 관심, 교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 전도 같은 중요한 성도들의 삶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 20에서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우리 성도님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점점 더 헌신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게 누가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어느새 팔을 걷어 부치게 되는 것이죠.
루디아는 세례를 받은 즉시 그가 할 일이 바울선교단을 위해 거처를 제공하고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절하게 바울일행을 자기의 집에 들이고 그곳이 바울선교의 본부가 되게 합니다.
본문 뒤에 보면 선교사들이 거처하는 루디아집에 어느덧 성도들이 모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빌립보교회의 효시가 되고 루디아는 성경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루디아의 가정에 모였던 교회는 어엿하게 빌립보교회로 성장해 바울의 선교사역 내내 선교헌금을 보내고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도 따뜻한 섬김으로 바울을 위로했습니다.
루디아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은 아니지만 저는 추측해봅니다.
두아디라에 사업 거점이 있던 루디아는 분명히 그곳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따라 헌신적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또 다른 교회를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뒤로부터 약 사십년 후 요한사도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요한계시록이죠.
그곳에 두아디라교회가 등장합니다.
두아디라에 바울이나 다른 사도가 복음을 전했다는 성경 기록은 없습니다.
어쩌면 루디아는 두아디라에 가서 자신이 구원받은 복음을 직원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해 두아디라 교회를 세웠을지 모릅니다.
우리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루디아에게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디아의 이름이 오늘 성경에 기록된 것 같이 우리의 이름은 주님 앞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 위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님의 교회로 세워지면 또 다른 누군가를 교회로 세우게 되리라 믿습니다.
전에 기독교방송에 보니 시골에 있는 백 명이 채 안 되는 교회에서 캄보디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것도 무려 열 일곱개의 교회를 세웠는데, 시골 성도들이 각자가 돈을 저축해서 한 교회씩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 땅에서 목표한 대로 성공적인 삶을 세우는 것도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세상을 얻어서 오는 행복은 조만간 권태가 뒤따르고 온갖 죄가 그 뒤를 잇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좀 부족해도 보람 있는 일에서 더 큰 행복감을 느낍니다.
나와 우리 교회가 올바른 주님의 교회로 세워지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또 교회로 세워지는 기쁨과 행복은 잠시 만족스럽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누군가를 영생으로 인도하면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짧고 귀중한 인생을 여기에 목적을 두고, 또 창립6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빌립보 교회를 세우셨듯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든든하고 아름답게 주의 뜻대로 세워주시리라 확신합니다.
2016년2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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