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큰 풍랑이 일 때 (사도행전27장18절-26절)

남수연 2016. 4. 28. 11:30

 

모든 인생에는 풍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사실 거친 바다만큼 위험하고 무섭습니다.

삶을 집어 삼킬 만큼 큰 태풍을 만나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잔물결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한주간 비바람을 잔뜩 맞고 예배에 나온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길 원합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항해를 끝까지 해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안전한 항해지도를 발견하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도중 유라굴로라는 큰 태풍을 만나 배가 보름간을 표류하다 구조된 사건입니다.

태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 배는 완전히 난파되었지만 이백칠십육명 전원이 생존했다고 배에 동승했던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기록합니다.

세월호에서 아까운 아이들을 다 잃어버린 우리는 이들의 생존이 놀라울 뿐입니다.

오늘 사건의 배경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친 사도바울은 파송교회인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갖고 생의 마지막 복음전파를 위한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엔 사도바울의 기독교 선교에 악감을 품고 죽이기로 작정한 유대교인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벌어져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죽을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소문을 듣고 급파된 로마부대에 의해 구조되어 바울은 총독과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정식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선교를 꿈꾸던 바울은 그 유대법정에서 자신이 가진 로마시민의 자격으로 로마에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 되어 처음으로 로마로 가는 중입니다.

바울의 오랜 계획이었던 로마선교의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선교의 문이 열리는 건 좋은 데 바울이 죄수가 되어 호송되어 간다는 게 참 복음전파의 역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편하고 보기좋게만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일개 시민으로 황제 앞에서 복음을 변론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겠다고 결성된 40명의 자객들을 어떻게 따돌리고 로마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구속되어 있던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는 긴 항해길입니다.

누가는 이 난파일지를 아주 세밀하게 기록해 이 항해에서 생존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기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는 걸 분명히 증언합니다.

이 항해 도중에 만난 죽음의 태풍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 지도를 받길 원합니다.

 

바울 일행이 태풍을 만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누가는 이 항해가 바람으로 인해 이미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어느덧 겨울이 다가왔다고 진술합니다.

문제는 로마로 가는 항로에는 겨울이 시작될 때 위험한 태풍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항해를 계속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를 하면 배와 물품 뿐 아니라 목숨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 경고하며 잠시 정박해 있던 그레데섬의 미항이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미항은 작은 항구라 겨울나기가 불편하다 생각한 선장과 선주는 거기서 한 60킬로 떨어진 뵈닉스항구로 이동해서 겨울을 나자고 합니다.

결국 배가 다시 출발하고 처음엔 남풍을 만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 싶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무섭게 밀어닥치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광풍은 선장과 선주의 잘못 된 판단으로 겪게 된 사건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이고 오늘 집중적으로 나누려는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풍랑 중에는 동승한 사람들로 인해 당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으로, 직장 동료로, 이웃으로, 같은 민족으로 서로 맺어져서 살아갑니다.

나 혼자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가족 때문에 원치 않는 환경 속에 처해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가운데 우리가 영적으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동료들입니다.

이 분들은 자신의 판단과 경험과 세상적인 지혜를 기반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선장과 선주들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비슷한 항로를 통해 여러 차례 선교여행을 다닌바 있었거든요.

직업이 천막기술자인 바울도 이 시기의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전문 뱃사람들이야 더 훤히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위험한 항해를 강행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과 현재 처지를 보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선장과 선주 역시 그랬고 호송 장교는 경험 많은 그들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항해를 시도한 것은 배의 규모와 안전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배는 로마의 속국에서 거둬들인 곡물을 싣고 로마로 가는 배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에 농사지은 곡식들을 다 일본으로 실어 갔죠.

군산에 가보니 아예 군산항 까지 곡식을 실어나를 선로까지 놓고 농산물을 일본으로 가져 갔더군요.

당시 바울이 탄 배도 엄청난 양의 곡물을 실었을 것이고 승선한 사람의 수만해도 무려 이백칠십육명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당시에 이 정도 배라면 왠만한 풍랑을 견딜만한 대형선박이었습니다.

육십킬로 정도야 어지간한 바람이 불어도 충분히 갈만하다고 판단한 것이죠.

세상이 살아가기 힘든 것은 현실에 맞게 계획을 세우고 당연히 되리라고 생각한 것들이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내가 계획했던 대로 풀린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오늘 선장과 선주가 그랬습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사람의 경험만을 믿은 게 아닙니다.

이번 항해에서 배를 잃을 것과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할 거라는 경고는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게 하신 예견인 것이죠.

그래서 같은 배를 타려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과 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이고 가족들이 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이고 내 주변에 믿음의 동반자들을 많이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의 구원을 미룬채 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오늘 바울이 당한 형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많은 시험이 불신자들을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때가 되면 그 분들이 저절로 구원받으러 나오리라 생각하신다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 뱃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생명의 위기를 절감한 뒤에야 비로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에 대해 귀를 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깨닫고 믿는 과정은 기분 내켜서 한순간에 당장 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광풍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권면해서 서서히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과 함께 배에 승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배에 탔던 이백칠십오명은 그들의 실수로 생명을 잃을 위기를 만났지만 누구 덕에 살았습니까?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산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배를 탄 가족, 동료, 친구들 역시 우리로 인해 구원을 받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전하시길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을 다 바울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구원을 암시하는 것이고, 그들의 구원이 바울에게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그 분들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선장의 잘못으로 광풍의 고통을 같이 당한 것처럼 우리 삶의 평지풍파는 일정부분 믿지 않는 가족들에 의해서 옵니다.

풍랑이 없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식구가 있는 데 어떻게 그 배에 잔뜩 싣고 순풍 속에서 항해하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분들이 영원히 돌이키지 않을텐데요.

그나마 우리를 생각하셔서 살살 다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선장과 선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과정은 단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대형선박이 있고 무겁게 가득 실은 화물들이 있고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자신 있을 때, 그들은 바울사도의 권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 그것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과정에서는 인간이 의지하는 이것들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대형 선박에 몸을 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항해 경험과 기술이 대풍을 이길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날 때 허둥대며 살 길을 다른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암입니다.’ 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그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건강이 아무 것도 아니고 돈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철썩 같이 믿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이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선원들이 먼저 짐들을 바다에 버렸다고 합니다.

한 때 무겁게 실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물건들은 이제 배의 침몰을 가속화시킬 뿐인 것입니다.

사흘 째 되는 날에는 생존과 직결 된 배의 기구까지 버렸다고 합니다.

노련하게 다루던 배의 기구들도 태풍에 밀려다니는 상황에선 여기저기 걸려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난이나 불행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던가요?

이번에 일본과 에콰도르 지진의 모습을 TV에서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안전을 보호해주고 단란하게 살던 집이 되려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건물 안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면 집 밖으로 나와 공원에 앉아 있고, 자동차에 들어가 있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죠.

선원들은 배의 모든 것을 던져 버렸지만 살 소망은 없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까지 되고 나서야 선장과 선원들은 비로서 바울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느니라.

본문으로 읽지 않았지만 다음에 보면 바울이 그들을 안심을 시키고 난 뒤 그들에게 식사를 권유합니다.

혹독한 풍랑에 모든 것을 잃고 구원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나눠주는 음식을 고분고분하게 받아 먹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이 생명을 건진 것이죠.

그리고 표류 보름 만에 드디어 멜리데라는 한 섬을 발견하고 정박을 시도하지만 급물살에 배는 완전히 파손되고 사람들만 헤엄쳐 생명을 건집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 큰 배와 화물들을 다 잃고 사람들의 목숨만 건진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은 언제고 댓가를 치러야 얻어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을 때 까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은 갑판에서 구르고, 물벼락을 맞고, 사투를 벌일 때 단 한사람도 물살에 휩쓸려 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족들의 구원을 계획하셨다면 반드시 모두를 잃지 않고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바라기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큰 풍랑의 고통을 겪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과정에서 점점 항해의 주도권이 바울에게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선원들은 행색이 남루한 초로의 바울을 대수롭지 않은 죄인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은 바울의 지시에 따르고, 바울에게 위로를 받고, 바울의 말을 믿고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보장되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신앙으로 인격이 잘 연단되고 예수님과 굳게 결합된 사람들은 언제고 사람들이 의지할만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격과 견고한 믿음은 역시 큰 풍랑을 견디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큰 풍랑을 겪은 사람들은 생명과 삶의 주인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내가 삶의 주인인 사람이야말로 큰 파도에 나룻배와 같은 인생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절대로 약하지 않습니다.

항해사보다 경험이 부족하지만 이들이 결국 바울을 더 믿게 된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의 조언을 사람들은 결국 의지합니다.

우리가 이런 견고하고 안정된 신앙인격을 보일 때 가족과 이웃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평안한 중에도 교회로 인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꾸준히 주님을 믿고 마음의 훈련을 받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성도로 성장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것이 먼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은 우리가 가족과 이웃을 위해 주어진 의무이자 특권임을 항상 기억하고 힘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입장에서 이 태풍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앞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것을 알려주실 정도로 이번 길은 주님의 뜻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생명의 위기를 느낄만한 광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울사도를 태우고 가는 배라면 몰려오던 태풍도 물러가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다 집어 삼킬 듯한 파도가 무려 십사일을 난폭하게 바다를 휘저으며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있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 광풍 안에는 이백칠십오명의 구원이 걸려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이해 못할 풍랑이 덮친다면 거기엔 분명히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선장이 무리해서 배를 출발시키고 큰 타격을 입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역시 쉴 새 없이 몰아치고 배를 흔들어대는 태풍이 계속되자 큰 공포를 느꼈습니다.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게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현실을 덮치는 파도를 볼 때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죠.

3분 후면 내려올 게 확실한 롤러코스터 위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휙 지나가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한다지만 쉬지 않고 거듭되는 풍랑을 바라보면 어느새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근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환경에만 집중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생각은 오직 예수님께 고정되고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이 돌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괴로운 풍랑의 원인이 이백육십여명 선원들의 구원하기 위한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풍랑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이후 말씀을 보면 바울사도가 놀라운 지혜와 역량을 발휘해 태풍 속에서 담대하게 이들의 구원을 주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신뢰하면 그 안에 베풀어 주실 놀라운 축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풍랑이 널을 뛰고,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것 같은 어두운 때도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어려운 현실에 꽂혀 있으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인도가 가려져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받고, 매일의 생활에서 승리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얻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 잔잔한 수면 위를 항해 할 때 같으면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누리길 원합니다.

너무 사사로운 기분에 마음 상하고 신경쓰는 습관은 그런대로 행복한 시절조차도 불행감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삶의 큰 풍랑을 만나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며 애를 쓰지만 구원의 여명이 선뜻 보이지 않을 때라면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다리다 지쳐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것 같다면 그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연단시키시는 중인 줄 믿습니다.

될 듯 말 듯 실망스러운 상황이 계속된다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달아보시는 중일 것입니다.

가장 힘들고 험한 현실을 만났을 때, 영원한 생에 대한 가장 가치있는 일이 이뤄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고비에서 구원을 받았고 영혼이 깊고 견고하게 성장했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이 다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하고 또 자기를 과신하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유일한 구원의 소망인 예수님을 바라고 기대하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항상 주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의 인생 항해가 성공적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6년4월24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