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 본문은 한 청년이 바울의 설교시간에 졸다 창문으로 떨어져 죽었던 황당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와 소아시아 일대를 돌며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에 이전에 전도했던 교회들을 차례로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격려하고 말씀을 가르쳐 굳게 세우기 위해서죠.
이 사건은 드로아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드로아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마주보고 있는 터키 해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머물다 마지막 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창가에 앉아 졸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그만 창밖으로 떨어져 죽고 만 것입니다.
이 다소 황당한 사건은 무슨 목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일까요?
설교시간에 졸면 죽는다?
이렇게 설교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니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졸면 영이 살아날 수가 없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이건 전적으로 바울의 지루한 설교에 책임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설교의 지루함, 유두고도 그래서 졸았다’ 이런 책도 있습니다.
저도 성도님들이 주무시는 데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본문은 물론 그런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닙니다.
암이 나은 것도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기적입니다.
오늘 유두고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은혜를 되새기고, 위로와 힘을 얻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날 드로아교회는 대사도인 바울의 일주일 방문일정의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이 날은 그 주간의 첫날이었고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합니다.
이미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여기서 떡을 떼려고 모였다는 것은 성찬식을 의미합니다.
교회 초기에는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함께 했습니다.
바울은 이날 마지막 예배와 성찬식을 하고 다음날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이미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의 선교를 마쳤고 그 지역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이 얼마나 험난했고 그 열정이 대단했는지를 짐작케하죠.
그 넓은 지역을 다 다니며 전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선교지로 로마와 스페인선교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선교보고를 하고, 유럽과 소아시아 교회들이 가난과 박해 속에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정성껏 헌금한 돈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으로 가면 바울이 체포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바울은 그래도 꼭 가야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인들에게 붙잡혀 로마로 이송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네로황제 때 결국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죠.
바울이 마지막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모두가 바울을 떠나고 추운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는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가져다 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드로아교회가 가보의 집일지도 모르죠.
그 때는 대부분의 교회가 가정집 다락 같은 곳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셨던 마가의 다락방도 백이십명이 모여 기도할 만큼 컸죠.
바울의 말년의 고독과 감옥생활의 비참함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 사도가 노년까지 부와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죽었다면 얼마나 고무적이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도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한 것은 세상의 어떤 부귀와 영화보다, 고난을 받을지언정 주님을 따르는 거기에 더 만족과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이 안일하고 풍요롭지만 보람 없는 삶만큼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것은 없잖습니까?
바울의 서신서들과 사도행전을 같이 보면 이렇게 그때 상황들을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교회가 세워졌던 것이죠.
이렇게 성경을 이해해 가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점점 확고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의 사명을 다 했고 순교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이제 다시 이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드로아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공고히 할 말씀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들과 뜨겁게 토론하는 데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이날 밤 드로아교회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날 밤 유두고 형제는 창문턱에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밤이 깊어지자 점점 잠으로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8절에 예배의 모습 중에 유독 한 가지 사실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밤에 등불 켜는 게 당연한 일인데, 굳이 누가가 이것을 왜 기록했을까요?
무언가 말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등불을 많이 켰다는 것은 장소가 넓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등불을 많이 켜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면 방안의 공기가 어떨지 의사 누가가 걱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혼탁한 공기로 인해 의식이 흐려지고 졸음이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죠.
의원 누가는 유두고가 졸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을 분석해,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는 신앙이 단지 나태해서 그런게 아님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또 이 유두고라는 이름을 보면 로마시대에 주로 종이나 노예에게 흔하던 이름입니다.
당시엔 이름만 들어도 신분이 드러나던 때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조선시대만 해도 돌쇠, 마당쇠, 삼룡이 이런 이름은 머슴들이 사용하던 이름이지, 양반자제들에게 붙이는 이름이 아니었죠.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복되다’ 이런 뜻이니 우리말로 하면 복동이 정도 됩니다.
복동이는 그날 낮에 주인집 일을 봐주고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교회에 나왔을 것입니다.
와 보니 이미 자리는 꽉 차있고, 창문에 겨우 걸터 앉았던 것이죠.
유두고가 설교들을 때 자세가 불량해서 떨어져 죽었다, 이런 해석은 좀 곤란합니다.
청년 유두고는 한 주간 내내 동동거리며 일을 하고, 주일 아침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온 우리 같은 보통 성도들이지 불량한 성도가 아닙니다.
몸이 고단하고 잠이 부족하면 더 졸음을 이겨내기가 힘들잖아요?
결국 유두고는 깊이 졸다 그만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목이 부러졌거나 뇌진탕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죠.
사람들이 뛰어 나가 일으켰을 때 유두고는 역시 죽어 있었습니다.
누가는 분명히 유두고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사망 진단을 누가 내렸겠습니까?
바로 이 성경을 기록한 의원 누가가 했겠죠.
그 때까지 은혜롭고 뜨겁던 예배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에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바울이 급히 내려가서 이미 죽은 청년 위에 바짝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순히 안았다고 번역했지만 본 뜻은 ‘간절하게 접촉했다’는 뜻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 아들을 꽉 껴안았을 때 쓴 단어입니다.
또 병자들이 많은 군중들 틈에서 병이 낫기 위해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라도 한번이라도 만져보려던 모습을 표현할 때 쓴 단어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청년을 안고 하나님께 속으로 부르짖었는지를 알 수 있죠.
그리고 나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기절했다 깨어났다는 게 아닙니다.
죽었던 유두고가 생명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12절에도 ‘살아난’ 청년이라고 말함으로 유두고는 완전히 죽었었다는 것을 누가는 거듭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유두고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삶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엄청난 일이다보니 우리에게 오히려 잘 적용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먼저, 모든 일을 우리가 다 대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험난한 여정을 돌아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바울입니다.
단 한 곳의 교회라도 더 들려 굳게 하려고 강행군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 설교 중 사람이 떨어져 죽으리란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바울이 대비했던 위험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좇고 있는 유대인 자객 정도였습니다.
드로아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을 전해주었던 바울을 초청해 은혜로운 예배를 기대했지 누가 교회에서 사람이 죽을 줄 알았겠어요?
유두고는 어떻습니까?
힘겹게 일과를 마치고 좀 더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애써서 예배에 참여했지 잠시 후 자기가 떨어져 죽을 거라는 생각을 꿈엔들 해보았겠습니까?
우리가 어느 정도는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미리 대비하지만 모든 것을 다 대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황당한 일들을 여러 번 겪으며 여기까지 우리가 왔습니다.
황당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그가 살펴본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로다
솔로몬이 살펴보니 악인만 화를 당하고 의인이라고 화를 면하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사는 모든 사람들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똑같은 일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두고 사건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해답을 주십니까?
신자들에게는 이런 끔찍한 일에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 되게 따르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모든 흉한 일에 대한 대비라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진 곳이 드로아교회가 아니었고, 거기에 바울이 없었다면, 유두고는 그렇게 인생을 끝내야 했습니다.
유두고가 떨어졌다는 헬라어 단어는 단지 물체가 떨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 파멸, 끝장이라는 뜻입니다.
유두고가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덮치는 예상 못했던 고난들은 마치 우리를 파멸시키고 끝장낼 것처럼 위협합니다.
이러다 큰 일 나는 것 아닌가 겁이 덜컥나고, 이대로 가면 파멸될 것 같은 두려운 상황이 혹 우리 삶을 덮친다 해도 거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면 거기엔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힘들수록,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수록, 믿음으로 승부수를 띄워야 합니다.
어쩌면 청년 유두고는 아무런 미래가 없는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던짐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노동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예수님께로부터 유일한 소망을 얻기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이런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가만 보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뻗치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신자들은 다 그런 간증들을 훈장처럼 가슴에 더덕더덕 붙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 유두고에게 그런 훈장이 붙었습니다.
은돈 삼십 개에 팔려 다니는 인생, 인간으로 불리우기보다 주인의 재산목록 중 하나로 계산되던 인생.
세상에서 아무도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그런 자기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유두고는 이제 그 지루하고 기대할 것 없는 인생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입니다.
유두고의 인생은 분명히 달려졌을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면 우리는 반드시 삽니다.
신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황당한 사건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위기가 내 앞을 휙 스쳐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그 때 깨닫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집 앞 작은 사거리에서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 앞서 가던 차는 좌회전을 거의 했고 저는 직진을 하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그 사이에 나타나 총알 같이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거의 0.1초 정도만 제가 빨리 갔으면 대형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정말 아찔한 그 순간, 순식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많은 것을 희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니다. 너의 희생에 비할 수 없이 내가 너를 더 보호하고 더 많은 것으로 너를 축복하고 있지 않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뭔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응분의 대우를 못받고 있다는 강박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인즉 하나님은 늘 우리의 삶을 축복해주시고 죽음과 같은 큰 위기에서 우리를 번번히 건져주십니다.
그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였던 드로아교회의 성도들은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눈으로 목격한 큰 믿음의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으로 그들의 사역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얼마나 안도감을 갖고 담대함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더욱 더 용기를 내서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절대 무의미하게 소모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뼈아픈 인생의 수업료를 지불할 때라도 예수님 안에 붙어만 있으면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결말로 보상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 사건은 우리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누가는 이 사건 안에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의 의미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기적이 여러 군데에 등장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행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나인성의 과부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십니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린 내용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오늘 바울사도가 살린 유두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잊을만하면 한번 씩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가마득하게만 보이는 부활이란 진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세계가 아닌 것은 아무래도 우리에겐 가마득합니다.
신자들이 가나안 복지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의 관심은 이 땅의 복지입니다.
일반인들은 더더욱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뒤의 삶이 심각하게 믿어진다면 다들 그렇게 막 살겠습니까?
바울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죽음 뒤의 부활에 대해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증거로 남겨 놓았습니다.
가장 완전한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 역시 그런 영화롭고 완전한 몸으로 다시 부활 할 것을 보장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두고나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 살아나는 사람들을 통해 영혼불멸을 증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면 그 영혼도 죽고 사라진다 믿고 싶어 합니다.
죽음 뒤의 그 모르는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그걸로 끝이고 싶은 것이죠.
만일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영혼자체도 함께 죽어서 없어졌다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회생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잖습니까?
죽은 사람의 심장이 다시 뛴다 해도 이미 죽어 없어진 영혼은 무슨 수로 다시 살립니까?
몸이 죽은 순간에도 영혼은 살아 있었기에 심장이 다시 뛰며 몸이 소생할 때 영혼이 본래대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죠.
이 땅에서 호흡이 끊어질 때, 영혼은 같이 멸절 되는게 아닙니다.
그걸 우리에게 보고 믿으라고 자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우리의 부활과 반드시 짝을 이루는 사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말, ‘떡을 떼다’입니다.
7절에서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라고 합니다.
유두고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이 떡을 떼는 내용 가운데 들어와 있는 셈이죠.
떡을 떼다는 단어는 우리 성찬식처럼 카스테라를 칼로 똑똑 잘라낸 것이 아니라 잡아 당겨 찢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몸이 찢기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속죄해 주셨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성찬식의 용어입니다.
유두고 같은 인생, 평생 남의 일을 해주며 세상에 빌붙어 살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죽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잃은 모든 죄인의 말로입니다.
그러나 죽었던 유두고 안에 오직 자신의 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속죄로 인해 영원한 부활의 생명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엉겹결에 일어난 이 황당한 사건 속에 아름답게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유두고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짧은 에피소드 안에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의 복음에 대해 완벽히 정리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12절을 보니 사람들이 이 청년의 문제로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누가는 왜 위로를 받았다는 말로 이 상황을 종결하는 것일까요?
그냥, 놀랐다, 감사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기치 못한 황당한 일을 만나는 우리 삶에는 매일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위로를 받고, 누가 우리를 진심으로 위로해 줍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만이 세상과 그 누가 주는 위로와 비교할 수 없는 적잖은 위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몸을 찢으신 예수님에 대해 깨닫고 체험할 때 가장 적잖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대비하지 못한 힘든 일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이든 그곳이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아는 떡을 떼는 자리, 말씀을 사모하는 자리, 예배드리는 자리라면 그 결과는 우리 또한 적잖은 위로를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과 함께 하시고, 우리 가족과 함께 하시고, 내 영혼을 지켜보호하신다는 이 깊은 은혜를 매일 체험하며 항상 하나님의 위로가운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28장1절-10절 (멜리데섬에서 로마로) (0) | 2017.01.06 |
---|---|
사도행전20장26절-38절(밀레도 항구에서) (0) | 2016.12.28 |
베드로의 투옥과 로데의 믿음 (사도행전12장1절-17절) (0) | 2016.06.24 |
큰 풍랑이 일 때 (사도행전27장18절-26절) (0) | 2016.04.28 |
창립감사예배 설교 (빌립보교회의 탄생:사도행전16장9절-15절) (0) | 2016.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