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큰 울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멀리 사마리아성에서 일어난 큰 기쁨으로 끝납니다.
초대교회 때 일어났던 이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힘든 일과 슬픈 일들을 겪어야 하는 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이런 문제의 삶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난 내용을 보겠습니다.
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사울이 주도한 박해 조직들이 교회를 없애려는 광기를 3절에 잘 나타납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울은 후에 회개한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교회가 초토화되고 있는 이 박해의 주동자가 사울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사울에게서 장차 이방나라에 수많은 교회를 세울 바울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구원이 온 민족으로 전파되고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성경입니다.
또한 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총공세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물론 이 광경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복음의 능력이 사탄의 권세에 굴복한 세상을 비출 때 악의 세력은 권좌를 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이고,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의 큰 울음은 사마리아성의 큰 기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흔적없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구원역사의 패턴입니다.
박해와 시련이 덮친다 해도 결과는 교회의 승리입니다.
성도 개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이 닥쳐오지만 결과는 구원을 이루고 승리한다는 것이죠.
이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수시로 의문과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고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들어왔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집사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이천년 교회사를 통틀어 이런 피의 박해가 없었던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역사가 백년을 조금 넘었죠.
그런데 순교자의 수는 최대 5만명까지로 예상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인 로마제국 삼백년간 순교자 수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지금도 북한을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신자들이 박해를 당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문화권이라고 하는 영국 같은 곳에서도 신자들 열 명 중 아홉 명이 신앙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고 답한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고난과 박해는 오히려 교회와 성도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무런 불이익과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복음의 색채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친한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몇 번만 말해보세요,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도 미워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복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의 박해를 몸소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기가 전도해 세운 성도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14장에 보면 소아시아교회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니
그러니까 우리도 알 건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고난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도 삶이 곤고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것이 불필요한 낭비라면 하나님은 절대 성도들의 인생사에 고난을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은 모든 면에서 성도들에게 유익이라는 게 분명한 성경의 관점입니다.
세상엔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 심판을 받을 사탄과 악의 세력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 안에 뿌리박힌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생각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어금니아빠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불치병을 가진 가족, 그런 가족 간의 성범죄, 사기행각, 그리고 자살과 살인.
이런 것들이 다름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는 죄악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필사적인 훼방과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과 인간의 죄의 본성으로 인해 고난은 계속 생겨납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큰 근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세상사는 게 늘 행복하기만 합니까?
내게 문제가 없다면 나와 관련 된 다른 사람의 문제로라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춰 줄 테니 20대로 다시 돌아가 살라고 한다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이 똑같다면 힘들게 살아온 내 인생과 뭐가 달라지겠어요.
이 세상은 빨리 학점 따고 졸업하는 게 상책입니다.
정해주신 내 현재 삶에서 최고의 학점을 따고 졸업하면 이생은 미련 둘 것 없이 충분합니다.
사실인즉, 이 땅에서 누리는 천 가지 행복은 천국에서 누리는 한 가지 행복만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난이 과연 어떻게 성도와 교회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는지를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전파자인 성도들의 연약성으로 인해서도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1절에서 박해로 인해 사도들만 예루살렘교회를 지키고 모든 성도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누가가 굳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이라고 표현한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1장8절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이르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
지금 박해로 인해 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세운 것은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모든 행하신 일들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증인들이 증언을 하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면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을 수도 있는 게 그 때의 현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그들은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고나서야 거침없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본문의 시기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2, 3년 뒤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성도수가 이만 명에 육박하는 파격적인 부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이 터질 듯 부흥되었는데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 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죠.
요즘 같은 박해가 없는 시대에도 복음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을이면 교회마다 전도축제들을 하는 데 정말 이 때를 피하고 싶은 성도들이 있을 많을 것입니다.
계속 교회가자고 하면 관계가 나빠질 것 같아서, 또 나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도 벅찬 데 무슨 내 형편에 다른 사람까지 책임지겠나.
여러 가지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뒤로 미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전도의 방법으로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사탄의 박해와 고난을 통해 유대 땅과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고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흩어졌다’는 말의 원어를 보면 ‘흩어짐을 당했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가택수색까지 하고 다니니 숨어있지도 못하게 된 것이죠.
성도 개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적용됩니까?
편히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불편함, 현실을 뒤엎는 시련, 삶의 어려움.
이런 모든 일들은 결국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과 신앙의 연단이든, 가족이나 다른 누군가의 구원이든, 결국 이런 고난의 환경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죠.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면 모태신앙이 아닌 이상,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결국 풀어내기 힘든 현실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 이해하기 힘든 말씀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에 완벽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셨잖아요?
그런데 고난을 통한 순종이 또 다르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 위대한 말씀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모든 일이 좋을 때 하나님께 하는 순종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뭔가 다르다는 뜻이겠죠.
성숙한 성도들도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의 고난과 눈물과 한숨이 하나님아버지께 달가우시겠습니까?
그렇기에 고난을 통해 가장 귀한 선물인 구원과 영적 성숙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고난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이 보배로운 것들에 손을 뻗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한 사람이 다 인격자가 되고 유익을 얻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험난한 삶을 사람 중에서 인격이 더 왜곡되고 강퍅해진 사람들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닥친 환난의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고향에서 쫒겨나 도망간 성도들이 여기저기서 복음을 전합니다.
드디어 구원이 예루살렘 성 밖을 넘어간 것입니다.
그 중 빌립집사는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갑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이 전파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유대인이라 하나님을 알아왔고 모세오경을 믿었습니다.
빌립이 전한 것은 삼년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립이 행한 표적도 보고 성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빌립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7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용하면서 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마리아성의 많은 사람들에게 귀신이 붙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9절에 보면 모든 주민들이 다 마술사 시몬이라는 자에게 현혹되어 영적, 정신적으로 조정을 당하고 억눌린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많은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많은 병과 고통에서 치유 받게 된 것입니다.
믿고 따랐더니, 실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단지 미래의 소망만이 아니라 현실의 권능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진짜 복음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귀신의 권세에 억눌렸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고와 수많은 문제들을 다 어떻게 해결해 왔습니까?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기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능력을 맛본 사람들에겐 남다른 것이 있습니다.
8절에서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더라.
구원의 증표는 큰 기쁨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식은 그들에게 다 큰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이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을 못 느껴 본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세상의 조건과 환경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을 행하신 것, 구원 받은 자체만으로 뛸 듯이 기쁜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그게 사도행전에서 진짜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한번 일어나는 감정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성도들 안에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항상 기뻐할 일이 있다고 히죽거리고 다니겠습니까?
기뻐할 수 있는 근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근심의 그늘이 짙어질 때도, 모든 게 시들해질 때도,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인 기쁨은 떠올릴 때 다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의 믿음은 발휘해야 하는 것이듯 기쁨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많은 것들, 또 장차 누리게 될 영생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해보십시오.
우리 안에 즉시 기쁨의 샘이 솟아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기뻐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기쁨이 없는 인생만큼 서글픈 게 어디 있겠습니까?
서늘한 바람이 불고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을 보니 왠지 감상적이 되십니까?
울적한 기분이 낭만으로 여겨지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제가 올림픽공원을 도는 데 스피커에서 조용필씨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제목이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랜데, 가사가 너무 절절해 슬픔이 가슴을 막 파고드는 것 같은 노래입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들으며 마주 오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좀 보았습니다.
혼자 산책을 나온 몇 몇 분들은 그 노래에 빠져들며 외로워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기쁨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외롭고 고독하면 그게 얼마나 지독한 고통인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잖아요?
바라기는 이 가을에 고독하지 말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을 떠올리며 늘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의 극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하게 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상식적으로 지금 그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어디 기거할 곳을 구하고, 일자리라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동태를 살피고 숨어서 다시 돌아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야죠.
예수님을 믿다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는데 뭐가 좋다고 그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지 이상한 것입니다.
왜 이들이 그런 비상사태에도 만사를 재쳐두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목격하는데서 얻는 기쁨이 모든 역경을 뛰어 넘는다는 증거입니다.
의무와 책임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가장 힘든 시기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기쁨으로 견딘 걸 깨닫습니다.
그때가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에 대해 할 얘기가 뭐가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방과 후 시청각실에 아이들을 가득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돌아갈 때, 내일 당장 해결할 문제들은 간데 없고 발걸음은 날아갈 듯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힘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환경과 문제를 능가하는 더 큰 기쁨을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도지 한 장을 건네 보세요.
매일 일상의 대화를 나누던 동료에게 신앙얘기를 한번 꺼내 보세요.
어색하게 돌아선 우리 안에 기쁨과 보람이 뿌듯이 차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은 사람에게 큰 기쁨이 있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을 모셔선 천사들 앞에서 큰 기쁨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특별히 대우하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만큼 힘들고 순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박해를 받고 모든 것을 잃고도 복음을 전하는 데 순종한 성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11장에 보면 오늘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에까지 복음을 전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안디옥교회는 바울선교의 기지가 됩니다.
또 나중에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내는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이런 교회들을 세우고 신앙의 지도자들이 되어 정착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에서 전도했던 빌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21장을 보면 빌립이 부유한 대도시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20여년 뒤 삼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이 빌립집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사울의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났던 빌립이 바로 그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그를 영접한 일도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바울은 상당수의 일행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예 여장을 풀고 여러 날을 빌립집사의 집에 머물며 선교지에서 지친 심신을 쉬었다고 합니다.
빌립이 방 한 칸 얻어 근근이 살고 있었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죠.
또 빌립의 네 딸은 모두 예언자로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전했던 빌립집사를 하나님이 충분히 축복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난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집사는 박해를 받고 순교했지만 그러나 그 결과로 사마리아성은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때로 마음으로 울고, 견디기 힘든 고난을 지날 때도 이지만 그 울음은 곧 주 안에서 큰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의 물꼬를 열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감당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관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계속 재미나게 지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것입니까?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큰 기쁨으로 이끌고, 우리 자신은 전도자에게 주시는 큰 기쁨과 축복을 누리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7년10월15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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