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가정의 달 설교 (루디아의 가정 : 사도행전16장6절-15절)

남수연 2021. 5. 13. 22:05

https://www.youtube.com/watch?v=P2PO5fX-iqk 

 

가정의 달에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뉴스가 하나 있었죠.

27년간 결혼 생활에 모범이 되어 온 빌게이츠의 이혼 소식입니다.

서로의 짝으로 더 이상 함께 성장할 수 없기에 이혼을 결정했다는 애매한 사유를 밝혔더군요.

인간에겐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들이, 하나같이 온전치 못해 부서지기 쉽다는 게 참 고충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결혼, 어떤 가정에서 살고 있던, 그래도 지금보다 더 우리 가정을 복되게 할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지난 주엔 구약성경 중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중에서 루디아 가정을 통해 아름답고 복된 가정에 대해 배워보려고 합니다.

 

1. 루디아 가정의 진정한 축복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의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의 배경은 바울의 2차전도 여행입니다.

바울사도와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파송을 받고 아시아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1차 전도여행을 다녀온 바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이 궁금했습니다.

일 년 정도 지나자 그 교회를 다시 찾아가 상황을 살펴보고 미처 전도하지 못한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 복음을 전할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리로 가면 막으시고, 저리로 가도 막으시고, 말로 하시지 않고.

결국 아시아의 서쪽 해변가의 도시인 드로아까지 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트로이의 목마로 알려진 그 트로이입니다.

이 드로아의 건너편 땅이 바로 유럽이 시작되는 마게도냐입니다.

거기서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는 데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에게 건너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사람의 요청은 하나님의 요청이시기도 합니다.

남의 간절한 필요나 조언에 무심하지 않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소아시아지역을 전도하려던 바울사도의 계획이 바뀌어서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에 의해 변경되는 일은 종종 있죠.

사소한 일은 대체로 우리의 계획대로 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일은 뜻하지 않은 사건이 개입해서 바뀌었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이고, 혹시 선택을 잘못한다 해도 바로잡아 주심을 믿는 것이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성령께서 유럽선교로 인도하심을 깨달은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역사적인 유럽 선교의 첫 성이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의 전도 전략을 보면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열 명이 있으면 회당을 짓고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평소엔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아시아선교를 그렇게 막으시고 유럽으로 보내주셨다면 거기에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준비해 주셨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곳은 바울 전도의 전략지인 회당도 없는 황무지였던 것입니다.

어떤 가수가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가수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수면제가 없으면 잘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은혜를 받고 나서 이젠 수면제를 버려야겠다는 믿음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수없는 갈등 끝에 믿음으로 약을 다 버렸다는 거에요.

그 날 수면제 없이도 하나님께서 깊은 잠을 주셨다 그래야 될 것 같은데, 그날 밤을 꼴딱 세운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믿음으로 했는데, 멘붕이 오는 것이죠.

그런데 오기가 생겨 삼일 동안을 수면제를 안 먹고 사투를 벌였던 거예요.

그렇게 삼일이 지나자 기절한 듯이 잠에 골아 떨어지게 될 수 밖에요.

그 후로 수면제 없이 정상적인 잠을 잘 수가 있었고 합니다.

우리가 순종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따른다 해도, 기대하는 결과가 순식간에 오지는 않잖아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대하고 소망하며 믿음의 싸움으로 견디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죠.

기도하며 기다리던 안식일이 되자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의 집회처가 있을만한 강가를 찾아 갑니다.

회당이 없는 도시에서는 대개 사람이 적은 한적한 강가에서 안식일 모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마침 강가엔 여자들 몇이 모여 있었습니다.

성 밖 강가에 모인 여자들은 소풍을 나와 한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었지만 로마사회에서는 일하는 날입니다.

여자들이 강가에 모여 있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죠.

바울은 그 몇몇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중 루디아라는 여자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같은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준 루디아만 믿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 사실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나 겸손히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며 말씀 앞에 서야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여실지 모릅니다.

바울사도의 전도여정만 봐도 루디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철저히 개입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거기에다 루디아를 빌립보까지 사업하러 오게 하신 과정 또한 절묘하게 엮어 놓으신 것이죠.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예배드리기까지, 구원 얻기까지의 과정에도 주님은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루디아는 유럽 선교에서 첫 성도가 되었습니다.

누가가 루디아의 이름을 정확히 밝혔다는 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엔 루디아의 이름이 교회들 사이에 익히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루디아는 당대에 누구나 알만한 복된 성도가 되었던 것이죠.

 

2. 누가는 루디아가 어떤 사람인지 오늘 짧은 소개 속에 함축적인 정보들을 담아서 전해줍니다.

1) 루디아는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시는 아까 바울이 가고자 했던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루디아가 거기 출신으로 사업을 위해 빌립보에 와 있었던 것이죠.

빌립보에도 집이 있고 사업처는 두아디라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루디아는 보따리상이 아니라 여성 사업가로 고급 직물인 자색 옷감을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옷감을 자주색으로 완벽하게 염색해 내는 게 힘들었고 재료비가 많이 들어서 자색 옷감은 아주 값이 비쌌다고 합니다.

로마 귀족들이 주로 고객이었던 것이죠.

두아디라시가 이 자색 옷감을 만드는 염색기술이 매우 발달했었다는 내용이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쓴 호머라는 고대 시인의 글에도 나옵니다.

비싼 옷감을 취급하다 보니 루디아는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루디아가 어떤 여인일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돈이 많고 패션계에 종사하는 화려한 삶을 사는 여인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방인이었을 이런 루디아가 어떻게 유대교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경외하게 되었을까요?

그 깊은 사연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마는 누구나의 인생을 들쳐보면 상처와 수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왕년의 여배우들 나오는 프로를 보면 다들 왜 그리 험난한 인생인지요.

한 유명한 요리전문가가 남편 외도에 대해 토크하는 걸 보니 저런 사람도 저런 상처가 있구나 싶더군요.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남편과 화해는 했지만 용서는 아직 못했다고 말하는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나는 걸 보았습니다

가정에서 부부사이에 부모 자식 사이에 형제들 사이에 주고받은 상처와 아픔이 참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나훈아가수의 홍시라는 노래가 있는데, 들어보셨나 모르겠네요.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그런 노래입니다.

거기 보면 이런 가사가 있거든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에 우연히 누가 이 노래를 부르는 데 이 부분이 제 마음에 갑자기 파고들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새끼그런 엄마의 사랑을 내가 받아 보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우리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셨고,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잘 키워내셨지만 진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이라고 우리를 물고 빨고 안아 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생활전선에서 자식들 재롱 볼 여유도 없으셨겠죠.

그런데 뜬금없이 내가 그런 맹목적인 엄마의 사랑을 못 받아 보았구나란 생각이 들며 갑자기 마음에 구멍을 느꼈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랑을 몰라서 우리 서원이한테도 좀 촌스럽고 질릴 정도로 푸근한 사랑을 주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권사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가 목회하는 데 정말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란 위로가 넘침에도 그 노래를 들으니 사랑의 빈자리가 휑하니 느껴졌던 것이죠.

나훈아씨가 그런 가사를 쓴 걸 보면 정말 순박한 어머니 사랑을 부족함없이 받았구나 그런 생각에 부러움이 스쳐 지나가더라니까요.

우리가 배우자들 마음에, 자식들 마음에, 부모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좀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에겐 공통적으로 고난이라는 빛나는 상처가 있습니다.

루디아에겐 그것이 남편과의 이별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이별이든 부부간의 결별은 인생의 기반이 흔들리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면 과연 돈 많고 귀족들을 상대하던 폐션업자 이방인 루디아가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관심을 기울였을까요?

인생의 시련이 없이 하나님께로 이끌려 온 사람들이 있는지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두아디라엔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신들이 가짜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고 섬기겠습니까?알면서도 진짜 하나님께 복종하기 싫으니까 그냥 자기가 적당히 믿는 수위를 조종할 수 있는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자욱한 안개에 갇혔고, 앞엔 낭떠러지를 직감할 때, 어떤 방향으로 발을 디뎌야 살 수 있을지 몰라 두려울 때, 가짜 신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각자의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당신이 정말 있습니까? 계시다면 저 좀 도와주세요!’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무너질 인생에서 의지할 진짜 신이신 하나님을 분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날개아래 보호 받으려 온 루디아를 품어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성 사업가가 어려운데 1세기에 여성이 해외를 드나들며 무역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루디아는 자신의 집 사람 전부를 이끌어 세례를 받게 합니다.

가족과 자식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만한 신뢰와 희생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더욱 어려운 일이죠.

루디아의 온 집이 함께 세례를 받은 사실은 루디아가 가장의 짐을 지고 최선을 다해 일하며 가족들을 양육하고 부양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부모 한 사람이 바로 섰더니 가족 모두가 안정된 생활과 믿음의 복을 받게 된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가정을 돌보랴, 자녀 양육하랴, 직장에서 일하랴 다들 얼마나 수고하시는지 모릅니다.

이 가정주일에 루디아와 그 가족을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주나산의 가정에도 그런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2) 루디아는 회심 전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본문의 섬긴다는 것은 경외하고 공경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 예수님을 믿게 해주셔서 구원을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선행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와도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인 나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데서 옵니다.

그것은 바른 양심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고 더 정확히는 성령께서 감화하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깊은 영역에 심어 놓으신 양심은 세상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신호를 계속 보내옵니다.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과 죄로 얼룩진 일상이 세상의 주권자 앞에 심판을 받을 것을 불편스럽게 계속 지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당연히 순종하고 경외해야 할 분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내가 악하고 불순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이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를 보상받을 것에 목적이 있다면 아직 제대로 출발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 마음에 들게 해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탈선한 종교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각에서 온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종교성이 있기에 이 문제는 계속 점검하며 믿어야 합니다.

순식간에 우리의 섬김이 공로와 거래가 되기 때문이죠.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섬김 안에 무슨 티끌만한 공로나 야심이나 댓가가 계산되었던가요?

우리의 섬김이 예수님을 닮길 간절히 원합니다.

성경에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 했다면 그것은 진짜 선한 양심을 따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뜻입니다.

루디아는 선한 양심을 따라 창조주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구원을 받은 루디아는 이제 예수님께 헌신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됩니다.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사도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한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시 예수님께 헌신하고,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과 크던 작던 힘을 합친다는 것입니다.

루디아가 즉시 자기 집을 빌립보 전도의 본부로 내 놓은 것입니다.

남성 네 명을 집으로 초청해 숙식을 제공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큼 루디아가 부자였기도 했던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 된 성도들은 주님과 지갑을 같이 쓰게 됩니다.

내 돈과 하나님 돈의 구분이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 이 돈은 내가 먼저 좀 써야겠는데그러신다면 언제든 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지갑이 비는 날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지갑이 빌 만하면 예수님께서 슬그머니 채워주시는 걸 수도 없이 경험하죠.

이 루디아와 그 집 사람들을 주축으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집니다.

지금도 빌립보 유적지에 가면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세례터와 루디아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루디아는 유럽 최초인 빌립보교회의 리더가 되었고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에 사적인 편지인 빌립보서를 쓸 만큼 적극 바울의 선교사역을 지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중에 두아디라교회가 있었던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빌립보와 두아디라를 왕래하며 사업을 하던 루디아가 두아디라에 있는 동안에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셔서 바울은 소아시아 전도사역을 못했지만 빌립보에서 전도한 루디아를 통해 두아디라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하지 못한 소아시아 전역엔 바울이 아닌 이름 모를 성도가 복음을 전해서 여러 교회가 세워집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냈던 일곱교회가 바로 바울이 전도하려고 그렇게 애썼지만 통과해야 했던 지역의 교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네가 아니면 안돼’, 그것은 착각입니다.

네가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우리를 주의 일에 초청하시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내게도 좋기 때문이니까요.

크던 작던 각자에게 주신 사명대로 기쁘게 봉사하며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루디아에겐 그 능력대로 두 도시를 오가며 교회를 섬기고 바울사도의 사역을 돕게 하셨던 것이죠.

오늘 루디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가정과 교회를 세웠듯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제안하시는 일에 작으나마 최선을 다해 섬기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루디아처럼 인생의 아픔 가운데 하나님께 나온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일생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성도님들 모두 그런 복을 받고 계시는 것이 저는 눈에 보입니다.

루디아처럼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도 우리처럼 구원의 길로 나오도록 기도하며 섬기길 바랍니다.

루디아처럼 능력있는 사회인으로, 가정의 영과 육의 필요를 채워주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귀한 일군으로, 굳게 서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름이 루디아처럼 성경에 기록되진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아름다운 행위도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