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39jeIu_2iI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3주 정도 복음을 전하고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전도가 어려운 것은 사람들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도 안되는 말을 믿으라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잘 알기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죠.
그런데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 가서 그 복음을 전했는데 그걸 그리스사람들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적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그렇게 기적으로 태어난 교회를 지도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쫒겨 나오게 되었죠.
오늘 본문 말씀이 ‘참다 못하여’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바울사도가 염려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막 옮겨다 심은 묘목처럼 아직 견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주님을 믿었다지만 신자들의 믿음도 대개는 여리고 약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처럼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과도 싸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사도의 신앙의 처방전인 이 편지를 읽고 더 믿음을 굳건히 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우리에게도 믿음을 더해 주시고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본문말씀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처한 문제를 위해서 바울사도가 디모데를 보냈던 일이 배경입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이 기록된 사도행전 18장을 참고해서 보면 좋습니다.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쫒겨 나와 몇 도시를 거쳐 아테네에 들어옵니다.
1절에 바울 일행이 아테네에 있었고 거기서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냈다고 하죠.
로마만큼 화려하고 유명했던 도시가 그리스의 아테네였습니다.
지난 주 그리스에서 두 열차가 정면충돌해 안타깝게도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죠.
뉴스를 보니 그 열차가 아테네에서 출발해서 데살로니가로 가던 열차였더군요.
이 설교를 준비하던 중이었기에 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덴에서 데살로니가까지는 무려 400킬로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디모데가 그 먼 길을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기차도 없이 그 길을 걸어갔을 것이잖아요?
디모데는 바울의 1차전도여행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그리스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입니다.
용모가 그리스인 같았기에 유대인 바울처럼은 눈에 띄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돌려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아테네를 떠나 혼자 고린도로 들어갑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그때 바울사도가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가운데서 혼자 사역을 감당해야 할 바울을 위해서 또 다른 동역자를 준비시켜 두신 것이죠.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런 귀한 만남들을 예비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성도들을 방문한 디모데가 고린도로 와서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듣고 바울이 즉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바울의 전도여행과 전도한 교회들에 보낸 서신서들을 비교해서 묵상해 보면 당시의 상황들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유럽까지 그 먼 길을 몇 차례씩이나 왕래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숙연해 집니다.
바울이 왜 디모데를 보냈었는지를 2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죠.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바울사도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소문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택함을 받았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죠.
그렇지만 지도하는 목회자가 없이 그들의 힘만으로 바른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다녀 온 이후에도 계속 데살로니가행을 기도하죠.
성도들에겐 함께 성장할 교회도 필요하고 신앙을 잘 이끌어 줄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그 뜻을 성도들에게 전하고, 성도들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목회자와 성도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바울처럼 항상, 오직,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돌아와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이 굳건하다 했을 때 바울이 얼마나 기뻤는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얼마나 바울이 마음을 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3서4절에서 요한사도 역시 성도들에 대한 같은 마음을 증언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말씀으로 누군가를 양육해 본 성도들은 다 이런 기분을 알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고, 내가 가르친 새신자들의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모습을 보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목사들의 무거운 짐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게 내 문제보다 더 무겁게 느껴져 늘 기도하며 스스로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도 성도들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일군들에게 가장 큰 보상인 것이죠.
디모데가 가져 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이었죠.
또 바울에 대해서도 변함없이 신뢰하고 보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신뢰는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인입니다.
바울사도가 2장에서 걱정하며 자신을 해명했던 것 기억나시죠?
데살로니가에 바울을 모함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바울에게 실망하면 바울이 전해 준 복음에 대한 믿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여전히 바울사도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빌립보에서 매맞은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은 상태로 데살로니가에 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9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자신들을 위한 바울의 노고를 성도들이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바울을 신뢰했기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견고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다 바울사도 같아야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목회자라도 필요합니다.
제가 목사를 해 보니 누가 이 직임을 감당하려고 하겠냐는 생각이 참 많이 듭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시고 부르셨기에 스스로가 부족하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의 연약함, 교회 리더들의 부족함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한 마음이 되어 따르면 그 복은 성도 자신이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3장17절에 말씀하죠.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성도님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저는 항상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된 믿음과 삶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이 아직까지 그래왔듯이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지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또 제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고 부디 말씀에 잘 순종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디모데를 파송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이미 이 환난에 대해서 예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 예고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시련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는 것이죠.
만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으시오. 그렇지만 그러면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할 것이오’라고 한다면 누가 믿을까요?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렇게 말했고, 성도들은 그래도 믿었다는 것이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환난을 당했습니다.
로마황제 외에 예수라는 다른 왕과 신을 섬기는 범법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하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해 회유하고 겁박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핵심은 메시야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의 목수출신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하는 것에 수치와 분노심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예언된 메시야를 세속적인 왕으로 오해했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됩니다.
로마제국에서 해방 시킬 메시야라면 적어도 다윗왕과 같은 영광과 권위를 가진 인물이어야 할 것이잖아요?
힘없이 로마총독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부끄럽지 않은 위대한 메시야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하고 믿는 자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건 자기들의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장 격분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사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지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하며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환난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데모데를 보내는 이유를 3절에서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는 이런 고난이 당연하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느라고 여러 가지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하고 계십니까?
예배와 봉사와 헌금과 전도와 같은 믿음의 실천들은 마땅히 할 일이지만 우리 육체에는 수고가 따르고 순종하다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누구 한 사람을 전도하려고 섬기다 보면 낙심할 일도 많습니다.
그런 환난은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피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난은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완성되기까지 복음의 동반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나중에 멀리 있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디모데후서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감옥에 갇혀 순교하기 전 마지막에 쓴 편지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너도 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환난들은 벗어나려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삶의 환난도 무익하지는 않지만 계속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나라를 위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 가난의 십자가, 질병의 십자가, 가정불화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 고난들은 전시와 같이 신앙으로 무장하고 비상한 기도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점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한, 하나님이 반드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2. 바울사도는 믿음에 굳건히 서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가 기도하는 대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도합니다.
12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교회가 사랑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교회는 항상 사랑을 말하지만 홍수 때 마실 물이 없듯이 사랑의 홍수 속에 정작 사랑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는지는 이 편지 전체에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더 분노가 많고 미움과 증오심이 많던 사람입니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하던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는 사랑이 풍성하고 누구에게는 잔혹하고 매정하다면 그 사람은 그냥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선별적인 사랑을 하고,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기분마다 사랑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진짜 사랑의 교제하기를 회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런 사랑이 내게도 없고 저 사람에게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불편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내 제자라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기가 버겁다 해도 교회는 사랑을 포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분노가 많았던 바울사도가 내 목숨까지도 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할 수 있는 것도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성령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도록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기도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풍성하고 넘치는 사람이 되길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곱지 않은 것을 곱게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 가족, 이웃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못 되서 그런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 대한 요구치를 높게 잡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내 자녀가 이만큼 해 주길 바라는 기대치가 다 있잖아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직장의 파트너가, 목사가, 성도가, 이 정도이길 정해 놓은 선이 있잖아요?
그 사람하고 그렇게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닌 데 내 맘대로 정해 놓은 기준인 것이죠.
그래 놓고 사람들이 항상 거기에 못 미치기에 화가 나고 속이 상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대치를 높인다고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좀 아래로 기준선을 내려서 그 정도에 만족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이 두 개 중에서 한 개만 해도 그걸 기준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잘 해내고 있는 게 사실 더 많잖아요?
약간만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낮은데서 만족한다면 의외로 마음이 편하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래야 사람도 오래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심사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과 어떻게 먼 길을 동행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내가 하는 일, 나에 대해서도 최고로 잡은 기준선을 좀 내려도 괜찮습니다.
전에 유퀴즈에서 유재0씨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방송도 늘 최고로 할 수는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방송계의 국룰이 강약약 중강약약 정도로 본다고 하더군요.
항상 히트치는 걸 기준으로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보다 약이 더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내가 맡은 일, 목표로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죠.
그러나 그 기준에 조금 못 미치더라도 마치 그 정도가 원래 목표였듯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부족하고 까다로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이 세상 일은 좀 더 잘해도, 조금 못해도 영원한 것은 아니잖아요?
실력이 좀 부족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자족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한다면 좀 더 풍성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 성도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13절,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성도라면 거룩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신앙 안에서 지키는 윤리적인 면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백성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주일성수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성품과 언행이 말씀을 순종하고 죄로 책잡을 것이 없이 온전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해주신 말씀대로 백프로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한 가지 말씀에 우리의 한가지 구체적인 죄 문제를 적용하셔서 훈육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지도할 때 모든 잘못과 단점을 한꺼번에 고치라고 하지 않듯이 그러십니다.
그런 마음을 주실 때 저버리지 말고 하나씩, 그때그때 힘써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다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신부들은 이런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19장7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절,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튀르키예 강진 때 구조활동을 했던 우리나라 구조팀이 가장 힘들었다던 구조 경험담 기사를 읽었습니다.
64시간만에 60대의 여성을 구조한 경우인데요.
이 여성은 남편과 서로 끌어 안은 채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죽어서 사후강직이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두면 시신과 유착이 된 아내도 죽게 될 위험상황이었습니다.
간신히 팔 한쪽을 빼내서 수액을 공급하며 구조활동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죽은 남편에게서 살아있는 아내를 빼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조 시간이 서너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부부의 사랑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제게는 다른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애정하고 붙들고 있는 죄와 세속적인 애착관계들이 이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세속적인 신자들에게 너희가 세상과 벗이 되었다고 하죠.
세상을 꽉 끌어 안은 사람들은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함께 사망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붙들고 있는 그것과 함께 망하는 것이죠.
세상을 끌어 안은 손을 풀고 주님을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잠자는 자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렸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이죠.
거룩한 삶을 통해 반대로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주님의 의의 옷을 입겠지만 우리의 거룩한 행실로도 옷 입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은 성도들을 거룩한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이십니다.
우리교회 모두가 주님이 주신 역할에 충성하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스스로 짊어지고 삶의 환난은 힘써 벗어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대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마시고 내 마음대로 세워 놓은 기준을 좀 낮추면 사랑하기가 조금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도 사랑도 거룩도 계속 성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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