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5장1절-11절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남수연 2023. 3. 21. 22:45

 

https://www.youtube.com/watch?v=ASEgQikVd6Q 

데살로니가서에는 어느 서신서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풍부합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진 재림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재림을 간절히 바랬던 이유는 성도들이 환난 중에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박해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 믿는 것을 포기하면 되죠.

그럴 수는 없기에 이 환난은 피할 수가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한 위로는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재림 소망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지금을 성경은 이미 종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속죄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기까지의 때를 말합니다.

사실 성도들의 신앙이 이 종말 신앙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 종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요즘 성도들에게 재림, 종말을 말하면 케케묵은 구식 신앙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구역사에 정해진 끝이 있다는 걸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 현실의 수레바퀴에 빨려들어 갑니다.

그러면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의 주님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은 점점 더 퇴색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신랑에 대한 사랑을 잃고 기다리지 않는 신부라면 서로에게 너무 슬픈 것이죠.

우리는 주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 만날 것을 준비하며 살지를 오늘 잘 살펴서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신부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주님의 날은 밤에 도둑같이 오되 반드시 옵니다.

1,2절,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1) 도둑이 예고하고 오지 않듯이 주의 날도 예고 없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날,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만나게 될지 정말 떨리고 두려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하신 말씀들이 마태복음24장에 나옵니다.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절,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바울사도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이죠.

주님의 날이 언제일지 우리가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걸 알려 주시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다만 예수님을 만날 것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진심이 담긴 신앙인 것입니다.

십 년 뒤, 이십 년 뒤 주의 날이 오는 걸 알았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바라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상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신다는 날까지 태만하게 살다가 직전에 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성도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가는 우리의 인생이 먼저 망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힘으로 이만큼 복되게 사는 것이잖아요?

(2) 그리고 주님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임신한 여자는 해산할 수밖에 없듯이 반드시 주님의 날이 올 것입니다.

도둑이 올 것을 모르고 잠 자는 사람들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평안하다, 안전하다 생각할까요?

그만큼 사는데는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고 안전 장치를 충분히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인 것이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도 충분치 않은 데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말은 생각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살 궁리를 더 잘 합니다.

요즘은 전쟁 나면 돈이 생사를 가른다고들 말하죠.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의 부호들은 개인 방공호 설치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도 1억을 들여서 6평 정도의 지하 핵벙커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현재 백종원씨가 살고 있고, 전에 이건희 회장이 살던 서초동 빌라엔 200명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 벙커가 있다고 합니다.

규모7 강진에도 견디고, 핵전쟁에 대비한 방폭문과 공기정화 시설, 비상 발전시설까지 갖추었다고 하죠.

예측 가능한 모든 재난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 대비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나도 나는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오히려 신화 같은 재림을 믿고 현실이 아닌 내세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없어지겠어? 만물이 이렇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다 지어낸 말이지.’

베드로후서에 보면 당시에 사람들이 꼭 그렇게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만물은 끝까지 이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실 때 만물은 마치 원소 상태처럼 풀어져 사라진다고 베드로사도가 말씀했죠.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 같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자만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왜 개인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도둑이 올 것을 아예 믿지 않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재앙입니다.

평안히 자고 있는 그 때에 주님의 날이 도둑같이 임할 것입니다.

개인 목숨의 종말이 도둑같이 임할 것입니다.

종말이 주는 의미는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빛에 속해 있기에 종말과 심판이 도둑같이 오지 않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세상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어둠에 속했고 평생 어둠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빛에 속한 사람은 빛의 아들이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에 속한 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8장12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12장36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빛을 알면서 믿지 않는지도 예수님은 핑계치 못하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아무리 여러 가지 핑계를 댄다 해도 사람들의 의중은 이것입니다.

악을 행하며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자고 한참을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하고 싶은 것 실컷 해 보고 죽기 바로 전에 교회에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말하시는 분이 젊은이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정말 가실 날이 코 앞인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없습니다.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한 청년이 족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SNS에서 나흘간 폭로전을 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을 폭로한 것이죠.

어두운데서 은밀히 행한 어둠의 일들이 손자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더군요.

이 청년이 자기도 붙잡혀 벌을 받아야 한다며 마약을 하며 환각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생중계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뉴욕 경찰에 의해 청년이 병원으로 이송되고 소동은 끝이 났습니다.

청년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어둠 가운데 산다는 것, 그 어둠의 열매들이 어떤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둠이 어둠을 폭로하더군요.

매일 뉴스를 통해서 염증나게 보는 것도 그거잖아요?

누가 어둠 속에서 이런 악행을 저질렀다고 날마다 어둠의 폭로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의롭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12절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사람의 실체는 친한 사람들과 다정하게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무심히 뱉은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실체입니다.

혼자 운전하며 불쑥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어두움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 뿐입니다.

 

3. 그렇다면 빛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밤에 속하지 않고 낮에 속했다면 자지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고 있다는 것은 태만하게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일에 열심히 살고 바쁘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분주히 살아도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잠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날이 임할 것에 무뎌지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자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을 몰라서 그것만이 내 세상인 줄 알고 삽니다.

도둑이 올지 몰라서 잡니다.

하지만 주님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모든 사람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도둑이 오늘 밤에 온다는 정보를 알면서도 깊이 잔다면 이상한 일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각이 하나님을 향하여 늘 깨어 있으라시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빛의 아들이라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어둠의 열매를 맺듯이 빛은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에베소서 5장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깨어 있을 때 이런 빛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빛의 자녀인 증거들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 어둠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착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사람들도, 나도 옳다고 인정하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은 속마음과 겉의 행위가 일치되는 것이겠죠.

속마음은 감춰지고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항상 있도록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영적인 무장을 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전투장비를 입고 대비하라는 것은 우리를 공격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는 거듭난 영을 가졌지만 본성과 습관 속에는 어둠의 잔재들이 남아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가면역 질환처럼 내 영의 생명을 오히려 공격합니다.

적극적으로 빛에 속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몸은 저절로 기억에 새겨진 어둠의 일을 행합니다.

의도적으로 입을 절제하지 않으면 나한테 유리한 거짓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깨어서 영적인 무장을 하고 곧 종말을 맞이할 사람처럼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 가지 전투 장비로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입고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합니다.

이 장비들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의지로도 적극적으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1) 믿음의 호심경입니다.

호심경은 갑옷 위에 한번 더 덧대는 가슴막이입니다.

방탄조끼 같은 것이죠.

중요한 심장, 생명을 지키는 장비입니다.

우리가 깨어 승리하려면 믿음을 방패막이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굉장히 실제적입니다.

믿음이 안 생기면 우리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은연 중에 상대의 속마음까지 계산해서 그 사람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실제적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아주 잘 정의해 주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믿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면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아예 있지도 않은 것을 사람이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믿는 것은 천국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확신하며 견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의 호심경입니다.

의외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장비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유약하게 봅니다.

오히려 분노와 복수와 원한과 악이 더 강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약자가 되죠.

우리가 내 본성의 사랑을 박박 긁어서 사랑하려면 곧 고갈됩니다.

자존심도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오히려 심령이 강해집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 성도들은 영의 파워를 가장 많이 잃어버립니다.

만일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망치는 게 아니라 나를 더 망칩니다.

사랑이 내게 손해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죠.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저절로 우러날 만큼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 심장에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우리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그걸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방탄조끼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원수라도 너그럽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피차 사랑하고 용납해야 그 방탄조끼가 먼저 나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 사회에서 살아갈 때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보호장비임을 꼭 새겨두시길 바랍니다.

 

3)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소망의 투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대하듯이 우리의 완전한 구원의 날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막연한 천국이 아니라 마치 아파트를 분양받고 입주일을 기다리는 듯한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가서 누리게 될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소망이 가장 우리의 생각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생각을 항상 주님이 오실 날과 천국에 두면 행동도 그것을 따라 경건하고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빛의 자녀로 부르시고 마지막날에 다시 오시는 것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이유가 명확하죠.

죽은 뒤에든 현재 살아 있을 때에든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싫은 사람하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헤어지기 싫으면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항상 함께 하고 싶으시다고 심중을 이렇게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꼭 함께 살고 싶다.’

우리는 어떤가요?

깨어 있든지 자든지 주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까?

만일 예수님에 대한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글쎄요, 나중에 천국을 천국으로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넘실대는 바다가 좀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 같습니다.

파도가 계속 일렁일 때는 멀미가 날 듯이 울컥대고 집채만한 파도가 위협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못 이깁니다.

억지로 버티고 견디다 다 병이 나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러러면 매일 말씀과 기도와 의지적인 경건의 노력을 다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직 종교생활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ㄴ다ㅣ.

삶에서 행복할 때든, 괴로울 때든, 그것과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하늘의 기쁨과 평강의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할 때 얻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걸 모르면 말세의 고통받는 날들과 내 죽음으로 종말을 맞는 힘든 시기를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이제는 내 구주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말세의 날들은 모든 사람들을 점점 더 곤고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올곧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안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교회는 믿음과 삶을 공유하고 기도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의 때를 교회가 없었다면 어떻게 혼자 그 믿음을 지켰겠습니까

내 믿음 생활이 다른 성도를 세워줄 수 있는 그런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어느 한 날, 주님의 날에 시효가 종료되어 끝납니다.

그 날 모든 사람은 심판대에 서서 선악간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이 진노의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고 9절에 써 있습니다.

주님의 날이 올 것을 안다면 신부인 우리는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오시는 지 관심도 없이 살다가 그 날을 맞이하는 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까지 매일 간절함과 설레임으로 기다리며 사는 것이, 주님의 피로 사신 신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자꾸 일깨우십니다.

누가복음 21장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우리 혼자 믿음을 지킬 수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