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5장12절-28절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남수연 2023. 4. 1. 00:08

 

https://www.youtube.com/watch?v=929JHSVXqXQ 

성도들의 신앙의 최고봉은 주님의 날에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날을 의식하고 우리는 깨어서 매일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맞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런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 바울사도는 그런 성도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당부합니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며 사는 법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도들이 신앙을 배우는 것은 외국어 배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모국어는 자라며 자연스럽게 터득이 됩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렇지 않죠.

단어를 일일이 외워야 하고 문장을 어떻게 구사할지를 기초부터 차근차근 오래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국어인 죄인의 삶이 저절로 몸에 배었듯이 새로운 신앙언어를 잘 배워서 우리 몸에 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몸에 익은 신앙의 방식이 거듭난 새마음을 도와서 점점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신앙의 원칙을 간결하고 힘있게 알려줍니다.

이 내용을 우리도 잘 배워서 신앙의 기준이 되게 하고 훈련해서 몸에 익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나누면 좋습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함께 힘써야 할 내용입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는 각자 개인으로 힘쓸 내용입니다.

23절부터 마지막까지는 편지를 마무리하는 인사와 축복입니다.

오늘은 성도 각자가 힘써야 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16절부터 18절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황금률 같은 말씀입니다.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이고 성도들이 아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지키지는 못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말씀을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이 생각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명령을 세상의 의미로 이해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모든 말씀이 그렇듯이 아직 믿음에 확신이 없는 성도들께는 찰떡같이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믿음의 세계가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배워야 바른 신앙의 언어를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1) 16절,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이 기쁨도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억지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단 한번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가 지날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 얼마나 기뻐하며 보내셨나요?

세상의 기쁨은 조건이 되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돈이 좀 들어왔을 때, 그 돈으로 소비할 때, 남들에게 인정받을 때, 사랑하게 되었을 때, 소원을 성취했을 때, 아팠던 몸이 나았을 때, 등등.

이런 일들이 있을 때 기쁘죠.

그러나 간단히 생각해도 이런 것들이 항상 우리에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또 계속 이런 조건들이 공급된다면 항상 기쁠까요?

기쁨의 효용성은 아주 짧습니다.

분명히 전에는 기뻤는데 그게 반복되면 더 이상 기쁘지 않습니다.

점점 더 나를 기쁘게 할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그런 기쁨이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기쁨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보통 열악한 현실과 함께 짝을 이룹니다.

빌립보교회에 쓴 편지에서도 바울사도는 기뻐하라고 하죠.

주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때 바울사도는 로마감옥에 갇혀 있었고 사형선고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편지를 받을 각 도시의 성도들 역시 신앙으로 인해 큰 박해와 불이익을 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세상 조건과는 상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1장에서 이미 이 기쁨의 원천에 대해 바탕을 깔아 놓았습니다.

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성령의 기쁨이라고 하죠.

우리 기쁨의 본질이 성령이시고 예수님 안에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기쁨의 제공자이신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계속해서 마음을 주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는 한 세상에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작은 근심거리에도 우리는 금방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정말 죽을 것 같은 심령을 살려 내십니다.

구약성경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느헤미야8장10절,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정말 기뻐할만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있을 때 삶의 모든 것이 기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주간을 앞 둔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2)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입니다.

기도는 어떤 현실이든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실질적인 도구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동력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성경이 알려주신 믿음의 유익이 다 그림의 떡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종교인도 아닙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얼마나 자기의 신에게 진지하게 기도합니까?

이슬람신자들이 하루 다섯 번 교주인 마호메트의 고향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엄숙하고 진지합니다.

절에 가서 삼천배를 하는 분들이 온 몸이 땀에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얼마나 진심인지 보셨잖아요?

모름지기 종교인만 되어도 신에게 기도하며 섬깁니다.

기도한다는 것 안에는 신에 대한 경외심과 소원을 비는 것이 담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최소한 그런 종교심만으로도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는 세상 종교의 기도와는 당연히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경외심의 표현이고 귀가 있어서 내 소원을 들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대상이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교의 기도는 막연한 염원입니다.

사실 기도하고 나서 이뤄질 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과연 그 목석으로 만든 신이 살아있어서 기원을 이뤄줄지 못할지 그걸 모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고 바울사도가 그렇게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을 놓는 순간 우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 때는 그렇게 매일 넘어지면서도 왜 그런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다 보면 언제 내가 넘어지는지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바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기도하면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방법을 다 써보고 안되면 그때서야 기도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문제점은 어떤 게 더 내게 좋은지를 알면서도 안하고 버틴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다는 뜻인데 진짜 나를 위하지는 못합니다.

뭐가 내게 유익한지를 알면서도 내게 안 좋은 것을 하게 하잖아요?

기도하면 분명히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시고 매일 힘있게 살아갈 능력과 자신감도 주십니다.

경험해 보면 아시겠지만 실력도 좋아집니다.

기도를 안하면 가지고 있는 내 능력치도 다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 나이가 먹어 가면서 얼마나 잘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뭘 설명하려고 할 때도 딱 맞는 단어가 안 떠올라 버벅거리게 됩니다.

이제는 제게 있던 것만으로는 점점 더 살 수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로 펑크 나는 부분을 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점점 느낍니다.

건강이 부족해지니 기도로 채워가며 살아야 하고, 나이 들면 매력도 부족해지니 기도로 채워가야 합니다.

돈이 부족하면 그것도 기도로 채워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강하게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강할 때 굳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을 거잖아요?

어떻게 우리에게서 주님의 강하심이 나타나겠습니까?

생활에 어려움이 있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을 때 주님이 나머지를 채워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던 것 이상의 강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죠.

기도하는 삶에서만 그런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지속되는 한 쉬지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특정한 기도시간 외에도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난 우리 영은 사실 계속 하나님을 인식하는 온라인 상태입니다.

쉬지않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지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일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는 데 그것은 불가능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산다고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예수님 생각을 마음 중심에 두고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잘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내 생각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늘 유지하면서 또 모든 부족한 것들을 열심히 구하고 채우면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18절,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도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인들도 감사하며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울 때 나보다 더 힘든 사람과 비교해서 그래도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이 진짜 불행을 당해보면 절대로 내 불행이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별 거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더 힘든 사람과 비교해서 그래도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할 때 그나마 감사가 가능합니다.

내가 가장 불행하고 비참하다고 생각되면 그것도 안됩니다.

요즘 하루 세끼 먹는 것은 사치라고 합니다.

북한 얘기가 아닙니다.

소비자 물가가 다 오르다 보니 하루 만원 가지고 살아간다는 우리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을 것도 없고 번듯한 직장도 없이 만원으로 사는 젊은이들이 누구와 비교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최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식비가 부담스럽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고충이 마음만 바꿔 먹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내 힘든 환경이 감사하기 힘들 때는 주님께서 이 또한 인도하실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앞뒤가 완전히 막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을 때도 결국은 하나님이 답을 갖고 계시던 걸 경험해 보셨잖아요?

우리가 고약한 환경에 갇히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서로 얽히고 점점 깊은 나락으로 빠진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모든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계시고 도움을 간구하는 우리를 신실하게 도와주십니다.

설령 내 죄와 내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하나님은 의지하는 우리를 반드시 구해 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얼마나 많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죄 때문에 일이 힘들게 될 때가 많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딱한 우리 처지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려운 형편을 감사하지 못한다 해도 결국 이 일도 신실하게 인도하실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또 환난을 이겨낸 성도들이라면 어려움 자체도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우리를 연단해서 더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면 어떤 상황이든 감사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보다 남아있는 것들로 감사하고,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는 결국 우리를 승리로 이끄실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잘 외우고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19절,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처럼 우리의 스승이 되셔서 믿음으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진리를 잘 따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사사건건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단 우리는 그것을 두드러지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아주 끈기 있게 우리를 거룩하고 바른 삶으로 유인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방식은 우리 마음에 성령의 소욕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백프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 것입니다.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종종 갈등을 일으킨다면 거의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성경에서 지정하신 거룩한 삶과 사랑의 실천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그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생각을 등잔 덮개로 덮듯이 꺼버리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래도 평생 우리를 지도하시겠지만, 우리도 평생 성령의 소욕을 소멸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결과는 인생에 육체의 열매들만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성령의 소욕에 순종할수록 좋은 성령의 열매가 우리 신앙 인격에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온갖 나쁜 것들입니다.

계속 성령을 소멸하는 삶에는 머잖아 나쁜 것들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3. 20절,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는 것을 사람들이 보통 예언한다고 하죠.

하지만 성경에서 예언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심중을 밝히 드러내 계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하나님은 이러하다, 내 뜻은 이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살기를 원한다’

이것을 알려주시는 걸 예언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알려주시는 경우도 그것이 전체를 대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일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택하신 선지자와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길흉을 알려주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의 은사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예언의 은사가 있지 않냐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은사가 어떤 성격인지 바울사도의 말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장31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있던 예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죠.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얼마간의 성도들이 모인 가정 교회에서 구약성경을 읽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을 가졌겠죠.

그런 가운데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하게 해 주시는 것이죠.

그것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구원에 대한 깊은 깨달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체계적으로 준비 된 지도자도 없었기에 성령께서 지혜로운 성도들의 입을 통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각일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잘 분별하라고 합니다.

29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또 예언하는 영이 예언하는 사람에 의해 제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예언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죠.

보다 권위를 가진 예언은 사도들이 교회를 순회하며 가르치고 교회에 필요한 권면을 주신 예언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도 이런 여러 가지 권면을 한 뒤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사도들의 권면이 주님의 명령이고 주님의 뜻인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예언되었고 사람에 의해서 변혁되지 않도록 봉인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언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뜻이 제자들을 통해 완벽하게 예언되었고 봉인되었습니다.

이 성경 말씀 외에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사람의 미래와 길흉을 맞추는 것은 엄격히 성경에서 금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인도받을 때는 개인적인 기도와 말씀이면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이 가르치신대로 잘 따라가면 하나님은 성령님의 내밀한 인도와 외적 환경을 만드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은 신약성경이 없었던 1세기 교회 당시의 상황이고 오늘날로 해석하면 성경으로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계속 기도하지 않는 것이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과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잘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복이 임하리라 믿습니다.

전에 최0주선수가 우승을 할 때 있었던 간증을 들었습니다.

큰 대회를 앞두고 불안해 하는 최선수를 위해서 아내가 요한복음15장16절을 외우면서 경기를 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좀 길죠?

이걸 두 시간에 걸쳐서 외웠다고 합니다.

운동만 하시던 분이니까요.

그리고 경기에 나가 첫 홀 티샷을 하며 야심차게 성경구절을 외우려고 했는데, 너희가.. 다음부터 생각이 전혀 안 났습니다.

티샷을 치고 걸어가는 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코스를 공략할 것인지가 아니라 너희가 다음이 뭔지만 궁금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더랍니다.

그러다 15번홀이 되었는데 멀리 전광판을 보니 최선수이름이 톱에 떠 있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그 순간 그 다음 말씀이 줄줄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렇게 최프로는 우승을 했고 그 해에 경기마다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최프로는 그 돈으로 재단을 만들어 꿈이 있지만 집에서 뒷받침을 못하는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외우고 다닌 것도 아니고 그걸 생각하려고 애를 쓰기만 했는데 대체 이런 놀라운 결과가 다 뭡니까?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게 얼마나 우리에게 복인지를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주셨던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순종할 때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 신앙생활이 뭔가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오늘 본문을 읽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길이 선명히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꼭 기억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신앙생활은 외국어를 배우듯이 이해하고 암기해서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외우시고 힘써 지키시면 최경주선수에게처럼 승리의 복이 임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