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창립주일설교 -데살로니가전서1장1절-10절 (본이 되는 교회)

남수연 2023. 2. 25. 00:47

https://www.youtube.com/watch?v=8Xc3Kzy1G8A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지난 13년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긴 우리는 다 믿음의 동지들입니다.

벌써 오래전 조사지만 교회 백 개가 개척되면 삼 년 뒤에 한 개만 남는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지금 더 나빠졌다면 나빠졌지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교회가 13주년을 맞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크고 작은 지상의 교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어떻게 믿고 행해야 하는지를 교회에서 계속 배워야 합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내용은 교회의 참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교회와 내게 있는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길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 창립 주일에 꼭 되겨야 할 오늘 말씀을 잘 청종할 때 주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사도의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졌습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신약성경 중에서 최초로 씌어진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기 50년경에 기록되었으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약 이십년 후입니다.

바울사도는 평생 세 번의 전도 여행을 다닙니다.

1차 전도여행지는 지금 지진으로 어려움에 빠진 튀르키예입니다.

신약성경에선 소아시아라고 하고 최근까지 터키라고 불리웠죠.

1차 전도여행 기간이 일 년 정도로 짧았기에 바울사도는 그때 세워진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재방문 할 계획으로 2차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방문길은 계속 막히고 꿈에 마게도냐사람이 나타나서 건너와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되죠.

그렇게 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계기로 인생이 달라지게 된 그런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제국 전체에 복음을 전할 계획이셨던 것이죠.

유럽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 빌립보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관청에 체포되는 데 매질까지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이런 폭력을 당한다면 당장 사역을 포기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랐으면 평탄한 대로가 열려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 일은 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일이든 계획서가 한번에 나오고 계획서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일에는 늘 난관이 있고 반대자가 있고 마귀도 방해합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 그대로의 눈높이와 상황에 맞추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야 우리 기도에 한방의 기적으로 응답하시는 게 더 간단하죠.

우리가 기도하면서 일을 해 나가면 복잡한 미로에서 길이 보이듯이,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아 내듯이 그런 절차를 따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바울의 고난 중에도 루디아라는 여성 사업가와 간수를 중심으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후에 바울과 실라 전도팀은 데살로니가로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사도가 삼 주 정도 거기에 있던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행17장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헬라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해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바울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순탄하게 교회가 세워지는 것 같았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자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유대교 신자를 뺏긴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불량배들을 매수 해 큰 폭동을 일으킵니다.

결국 믿은 지 한달이 안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두고 바울이 몸을 피해 고린도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얼마나 애틋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교회를 낳아 놓고 젖을 먹이지 못한 것이죠.

유대인들 때문에 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게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굳건하다는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기뻐하며 써서 보낸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이 편지를 쓴 곳은 고린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거기서 1년 반 정도 목회하는 동안에 써 보낸 두 개의 편지 중에 첫 번째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이 정도로 배경을 알아두면 앞으로 데살로니가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바울사도가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그 교회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죠.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안부를 묻고 축복합니다.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무덤덤하게 읽지만 이 말을 쓰는 바울사도의 마음은 얼마나 떨리고 간절한 마음이었을까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안심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걸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은혜와 평강의 복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디모데로부터 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어서 4절을 보면 바울이 이런 데살로니가교회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바로 택하심을 받은 증거라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역시 이 증거로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듭니다.

겨우 삼 주간 복음을 가르치고 떠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도들의 믿음이 확고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수십 년을 믿어도 참 부끄러울 뿐이죠.

당시는 이스라엘 외에 해외 선교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에 초대교회가 세워질 때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듯이 바울의 해외선교 중에도 그랬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서 또 중요한 요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미 유대교에 편입해서 성경을 배웠다는 것이고, 특히 그들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라고 한 것에 답이 있는 것이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이탈리아 장교인 고넬료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런 말을 하죠.

사도행전10장34, 35절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신자가 현재 구원받은 상태인지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데살로니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기에 교회가 빠른 시일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이런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대 이상의 성장에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라고 하죠.

이렇게 강한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에게 세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이죠.

우리 교회 모두에게 이 세 가지 증거가 더욱 충만해지길 축복드립니다.

이것이 각각 무얼 의미하는지 대강은 아실 것입니다.

1) 믿음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믿음을 받게 되면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무언가를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같은 경우는 우상도 버리고, 환난도 당하며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죠.

자기의 의지로만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꼭 믿음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 결과로서의 열심 있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충성하고 순종하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도 계속되길 바랍니다.

2) 사랑의 수고입니다.

구원받기 전에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성령을 받고 나면 이기적인 본성에 남을 생각하는 진정한 이타적 새마음이 더해집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형제를 위해서 수고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난 13년간 하나님을 섬기느라, 성도들을 섬기느라 많은 수고들을 해 왔습니다.

힘든 상황에 있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어떻게든 필요를 채워주려고 사랑의 수고를 계속 해왔습니다.

우리교회는 창립 초창기부터 이런 사랑의 수고가 밑거름이 되었고 지금까지 모든 성도들이 그런 사랑의 수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듯이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칭찬하시리라 믿습니다.

3)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먼저 성도들의 삶에는 참고 견뎌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내는 반대와 고난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강한 참을성을 말합니다.

성도에게는 견디고 참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인해 받는 박해와 환난을 견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소망으로 참아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과 절망한 사람과는 견디는 힘이 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의 어려움도 이 소망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냥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세상 일들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상황들을 만나는 것이기에 반드시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 분명한 소망이 힘든 현실을 이기고 돌파하게 하는 것이죠.

또 마지막절에 바울사도가 언급하듯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세상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우리를 주님께로 영접해 천국의 모든 좋은 것을 선사해 주실 것이 우리의 가슴 벅찬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을 강하게 견딜수가 있는 것이죠.

 

이런 믿음, 사랑, 소망은 우리 혼자 주체가 되어 만들어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진심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죽었던 영을 다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영원한 조력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도 성령께서 우리를 강하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의 성숙은 얼마나 성령님께 잘 협조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들이 초보신앙 때는 다 자기 주장대로 하려고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생기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그게 제일 내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질과 본성에는 잘 맞지 않아도 하나님 뜻이 분명한 일은 어떻게든 따르고 순종하려고 합니다.

당장은 싫은 데 순종하고 나면 나중에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렇게 사는 성도들은 결과적으로 인생에서 큰 과오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일이 형통하게 풀리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말씀대로 해결하면 가장 빨리 일이 수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서 점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우리도 점점 하나님이 택하신 증거들이 믿음과 인격과 삶에서 풍성히 열매 맺길 축복드립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중에서 믿음을 지킨 것은 교회의 강력한 표징입니다.

교회든 성도 개인이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섬기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관청에 고발한 죄목이 무엇이었을까요?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임금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가 신입니다.

그런데 다른 왕, 다른 신을 섬기라고 로마인들을 부추기는 것은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유일한 신이시고 왕이심을 믿었으니 갓 태어난 데살로니가교회가 그 박해를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런 고난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기쁨으로 바울사도의 복음을 받고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신약성경의 역사들을 보면 구원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평생의 가치관,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과는 다른 데 가치를 두고 세상을 보는 눈이 분명히 달라졌어요.

놀라운 일이죠.

사람이 생각하나 바꿔 먹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속한 나라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게 종교이자 문화이고 몸에 익은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9절에 나오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모든 우상숭배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생각해 볼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몇 대째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도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 대에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친척과 가족 중에 여전히 불교와 무속과 미신과 무신론을 믿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대체 어떻게 내가 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냐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도 안 하신 것 같은 데 우리를 이렇게 자녀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의 믿음의 능력은 또 얼마나 대단합니까?

신약성경의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에서 받는 시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난을 구원받은 사람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믿음이 아직 약할 때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몸을 사리지만 믿음이 장성해 가면 고난을 스스로 택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성도들의 위엄은 세상 전부와 예수님 중에서 택하라 할 때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밸런스게임이라는 게 유행이라고 하죠.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임인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하게 균형이 맞춰져 있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의 허를 찌르는 면이 있습니다.

진짜 가치를 둔 게 무엇인지, 자기 속마음이 어떤지가 드러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백 억 있는 전 여친과 빚 백 억 있는 현재 여친.

누구를 선택할 거냐는 것이죠.

진짜 사랑인지를 달아보는 정밀한 저울인 셈이죠.

이런 살벌한 것도 있습니다.

내 장자의 죽음과 내가 장작에 타 죽음.

그런데 어머니들이 즉시 답을 못하더군요.

이 문제에 한번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기, 세상 풍파 다 겪고 진짜 성도로 태어나기

세상풍파를 다 겪어도 구원을 받아야겠다고 선택하셨는지, 그냥 모태신앙 정도를 택하셨을지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 이 질문에 같은 답을 선택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모든 환난과 박해를 겪는다 해도 참성도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그대로 본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6절하,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참된 교회와 성도의 증거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렇게 소문이 났고 다른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7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절,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소문이 났을까요?

가족과 이웃들이 나를 본받고 싶어 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책잡힐 것 없이 빈틈없이 살아도 사람들이 우리를 본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 당신 참 잘났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할 뿐 아니라 본받을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들도 어떻게 사는 게 자기에게 더 좋을지 다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성도를 볼 때 마음에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낯추시되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남을 음해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상처를 주거나 불의를 도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셨겠습니까?

인기를 얻고 인정받기 위해서 위선적인 언행을 하셨겠어요?

예수님을 생각하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아서 그대로 살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무의 인정도 받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기준이 높습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니까요.

바울사도가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그대로 본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멀리 마게도냐와 아가야까지 본이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바울처럼 철저히 예수님을 본보기로 따르는 지도자나 성도들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서로에게서 예수님을 진실되게 섬기려는 작은 모습들을 찾아서 서로 본보기를 삼는다면 복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소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지 모범답안을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그리고 주님을 본받아 따르는 것.

잘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아름답게 성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 데살로니가 도시의 분위기는 이랬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대한 소문 들었어?’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런 말을 하길 축복드립니다.

‘그 사람 소문 들었어? 교회 다니며 그렇게 사람이 달라졌다며?’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알고, 우리를 통해 교회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널리 소문이 나도록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