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보낸 바울사도의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사도에게 있어서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2장을 보면 바울은 ‘너희가 나의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이지만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했던 교회입니다.
그렇게 낳아만 놓고 떠난 연약한 교회가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마게도냐 전체에 소문이 날 만큼 아름답고 든든하게 성장합니다.
자식이 어느새 장성하게 자란 것을 볼 때 부모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고마움이 있죠.
제대로 잘 먹여 키우지도 못한 자식이 멋지게 장성한 모습을 본다면 부모 마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우면서도 애잔하겠습니까?
바울사도와 데살로니가교회의 관계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했지만 갈 수 없는 처지에서 보낸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입니다.
너무나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사랑이 그래서 편지 전체에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바울사도는 목숨까지도 너희를 위해 주기를 기뻐한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각각의 성경이 기록된 이런 속사정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토록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한 따뜻하지만 힘있는 훈계입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는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에 지켜야 할 내용들이고 16절부터 끝까지는 성도들 개인의 신앙을 위한 지침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교회생활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고, 교회생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바울사도는 그래서 교회를 위해 이렇게 당부합니다.
교회 안에서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엄청나게 그들을 생각해라’, ‘도에 지나치도록 알아주라’라는 상당히 과장 된 뜻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은 착한 일은 이미 상급을 받은거라고 하셨죠.
이렇게 봉사에 대해 지나치게 치하하라는 게 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죠?
산상수훈 말씀은 성도들이 좋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께 관점을 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길, 그렇지만 너희는 일군들의 노고와 헌신을 절대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주를 위해 수고하는 모두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그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기쁘시기에 주님께서 보내시는 칭찬과 위로를 이 땅에서는 우선 너희가 대신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이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이 카페에서 쓸 물 한 병을 떠가는 것을 봐도 너무 기특해서 저절로 칭찬이 나오잖습니까?
예수님께는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행하는 크고 작은 수고들을 지켜보시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헌신도 기억하고 계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극도의 이기주의 사회에서 성도들의 교회 봉사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다 예수님께 하듯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일 점심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허리 아프게 설거지를 하는 성도님들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위해 악기로, 찬양으로, 봉사하는 성도들도 단지 노래가 좋아서 하는 것 아니잖아요?
아름다운 예배를 우리 모두 하나님께 드리려고 실력은 좀 부족해도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분들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큰 소리로 찬양하며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먼 거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 집 가까운데 교회가 없어서 이렇게 멀리까지 오시는 게 아니잖아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교회가 세워지질 진심으로 바라고 먼 곳에서 달려오는 그 마음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바른 신앙을 갖도록 권하는 말씀의 일군들의 수고를 알아주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올바르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믿음을 이끌어 주지 않는데 스스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전에 고 하용조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모든 성도들은 남을 가르치던지, 아니면 배우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혼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군들을 귀히 여기는 것은 이들을 통해 전수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각종 봉사로, 물질로,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교회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수고를 당연시하지 말고 최고로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어깨를 두드려 줄 때 힘을 얻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럴 때 교회도 화목합니다.
곧 추석명절이 다가오는데 가족들이 모였지만 화목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번 추석에도 많은 가족들이 미워하고 갈등하며 보낼 것입니다.
명절날 일어난 형제간의 강력사건들이 한 두건 뉴스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아버지 앞에 한 가족이 된 자녀들이 주 앞에서 기뻐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작은 수고를 격려하는 천국가정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화목하고 사랑이 잔잔하게 서로에게 전해지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힘쓰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그런데 한편 교회 내의 또 다른 실상을 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 말씀은 칭찬받을 만큼 성장한 성도들만 교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있고, 무력하고 심약한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힘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들, 즉 일상적인 교회생활에 태만한 사람들은 반드시 타일러 주의를 주며 주님의 교회를 위해 마땅히 행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또 무력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자꾸 격려함으로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육 간에 힘없이 쇠약한 사람들은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붙들어 준다는 말은 원어대로 하면 두 팔로 안아주라는 뜻입니다.
연약한 지체들은 더 가까이 다가가 격려하고 안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으라고 합니다.
한두 번 하다 포기하지 말고 오래 참으며 이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자신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도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 해도 잘 바꾸지 못하잖아요?
그러므로 비판하거나 조급하게 나서서 고쳐주려고 하지 말고 다만 용납하고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약한 성도들이 우리 자신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도 자주 영적으로 게으르고, 힘없이 주저앉고, 낙심에 빠집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위로하고 세워가시듯이 우리 서로 간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대해서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15절 삼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항상 선을 따르라
악을 이기는 방법은 똑같은 악으로 응수하는 게 아니라 선으로 응수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산상수훈에서 주신 성도들만의 고결하고 신비하고 강력한 승리의 비밀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악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고, 악으로 우릴 공격해 옵니다.
누가 내게 악하게 대하면 우리 역시 악하고 부정적인 반응이 나옵니다.
악은 반드시 주변으로 오염되고 확산시키는 권세가 있습니다.
정당방위라고 상대방이 한 그대로 갚아주면 우리 역시 똑같은 죄를 짓게 되고 죄는 곧 우리의 주인행세를 한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가장이 회사에서 보스에게 당한 분풀이를 집에 와서 아내에게 하고, 아내는 공부 안하고 TV보는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잘 놀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아이들은 말대꾸를 하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고.
악을 선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늘 이런 악의 고리가 엮여 갑니다.
누군가 빨리 선으로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남편이 못 끊으면 아내가, 엄마 아빠가 못 끊으면 자녀들이 착하고 선한 믿음으로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와 가정을 악으로부터 지켜내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비결입니다.
다음 16절부터는 우리 개인의 영적 생활을 위한 가장 귀한 교훈으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길 바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다 좋아합니다.
신기하게도 지치고 우울해 질 때, 이 말씀을 기억하기만 해도 좀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자세히 말씀을 보면 여기엔 ‘항상, 쉬지 말고, 모든 일에’ 라는 단서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냥 기분 좋을 때 기뻐하고, 시간 있을 때 기도하고, 좋은 일 있을 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의 본성은 이렇지가 않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씀만 보더라도 가만히 있는 데 마음이 괜히 기뻐지는 일은 좀체로 없습니다.
가만히 있다 보면 오히려 뭔가 우울감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근심으로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상시적이고 근본적인 기쁨은 죄인의 본성 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이 없기에 그것을 대신해서 재미와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사실 재미나 쾌락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선 아무리 원하던 것을 얻고,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난다 해도 그 기쁨은 너무나 짧고 순간적인 신기루와 같습니다.
부자가, 성공한 사람이, 늘 기뻐하지 못하잖아요?
부자도 아니고 성공하지도 못한 우리는 더더군다나 무슨 방법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의 삶이 대개는 힘에 부치도록 피곤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사건들이 항상 있잖아요?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길 만큼 일상이 가볍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은 더 좋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시련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3장4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바울이 예견한 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자기 동족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들의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항상 기뻐하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복잡한 우리 형편을 모르셔서 실없이 웃으며 다니라는 것이겠습니까?
항상 기뻐해라
이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억지로 기뻐하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보면 안하는 것 보다는 잠시라도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 심령을 만족시키며 어두운 마음을 뚫고 터져나오는 힘찬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이 세 가지 계명은 분명하게 ‘예수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그 기쁨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셨던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기쁨의 제공자이신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계속해서 마음을 주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는 한 세상에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어느덧 마음이 심란하고 어느새 얼굴이 굳어진다면 예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정말 핵폭탄 같은 위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안에는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예수님 안에서 이런 기쁨을 받고 어려움 중에도 광채를 띠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씀 앞에 ‘항상’이라고 하셔서 우리의 기쁨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기도하라는 말씀 앞에는 ‘쉬지 말고’가 붙어 있습니다.
이대로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이 말씀이 가르치는 더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쉬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상황을 말씀드릴 때, 하나님은 쉬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편에서만 끊임없이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과 기도로 교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가끔씩 기도하라하지 않고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까?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많이 만나고 같이 밥 먹고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친밀함의 기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할 의사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기도 안에서 점점 깊고,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 성도가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자꾸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시려고 합니다.
‘자, 기도하자, 기도하자’ 그러시며 자꾸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꺼이 성도 한 사람의 기도에 응대를 해주시는 신비하고도 영광스런 특권을 누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아가고 그 선하신 인격을 누리는 지복이기에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총애로 우리 영혼은 나날이 윤택하고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우리에게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답변으로 보내시는 그 사랑과 미소는 어떤 것도 이겨낼 만한 강력한 만족과 행복감으로 우리 안에 밀려 들어옵니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인식하고 믿게 되면 그동안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경영해나가던 그 자리에 하나님을 우선으로 모십니다.
기도는 이 땅의 모든 일상을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고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강력한 의사표현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사소한 일이라도 습관이나 경험에 의해 내가 혼자 해치우는 것을 겁내게 됩니다.
실패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 속한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내가 주도하면 그냥 세상일입니다.
내 스스로 해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실은 내 영광을 구한 것이고, 천국에 남을 열매는 없고, 본성에 따른 열매만 얻은 것입니다.
그냥 괜찮은 결과인 것 같아도 거기에 보면 죄가 딱 붙어있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사람이 하는 일이 다 이래요.
아무리 지혜롭게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영원한 영적 측면으로 볼 때 실패입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조언과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나가겠다는 자립성이 바로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겠다던 그 죄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아담의 죄의 결과가 세상을 이 모양으로, 우리 인격과 삶을 이렇게 일그러지게 한 것이잖아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의논하고 기도하면서 해나가면 더 안전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은 위태한 세상에서 외줄 위에 서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항상 예수님께 두고 끊임없이 의지하고 도움과 지혜를 구하며 살라는 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선하신 명령입니다.
다음은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그냥 감사하라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좋은 일에 그냥 한두번 감사는 누구나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주신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세상이 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참된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표현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먼저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감사할 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 감사할 조건들입니다.
비록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지금 정도의 삶이 그렇게 별거 아닌 게 아닙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거미줄 같이 치밀하게 짠 함정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이 넘어지고 파멸할 때 쾌재를 부릅니다.
사람이 일구는 삶의 터전 자체도 죄에 대한 징계로 땀흘린 대로 열매를 내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세상이 살기 힘든 이유입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황폐한 터전에서 이만큼 일구고 지켜냈다면 단순히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울타리로 두르고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욥기에서 시험하는 사탄이 순식간에 욥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뺏어가 듯 지금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일터, 소박한 음식, 거동할만한 건강, 평범한 가정, 이 모든 것이 다 감사할 것들입니다.
또 우리에게 설령 예기치 못했던 풍랑이 일고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것 같은 파도가 덮친다 해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은 망하라고 주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허락하셨다면 반드시 이기고 더 강해지고, 더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범사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과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악한 환경을 주시고 감사하라고 우리의 목을 조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잖아요?
감사하며 믿음으로 견디면 반드시 더 좋은 일이 이뤄질 것이기에 근심하지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가 끝나고 오진경집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얼마 전 놀이공원에서 하늘 높이 올라가는 놀이기구를 타셨나봐요.
놀이기구가 올라가며 하늘이 아주 가깝게 눈앞에 펼쳐지는 데, 순간 울컥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놀이공원에 와서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그렇게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새 하나님께 이렇게 가까이 다가간 오집사님의 모습을 보며 제가 또 감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 겁도 없으시죠, 높이 올라가서 심장이 쫄깃했을텐데요.
어느 순간 우리 역시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느끼며 가슴이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일, 모든 순간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골프여제로 불리운 박세0 감독이 예전에 겪었던 슬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슬럼프에 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막상 슬럼프가 오고 예선에서 컷오프가 될 정도로 성적이 나빠지는 데 정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더랍니다.
경기에 나가 티샷 자리에 서면 18홀을 어떻게 경기 해나가야 할지 정말 막막하고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마음 충분히 알만하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험난한 때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신앙의 권면을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이런 두려움 이상의 시련이 있었습니다.
오늘 권면하는 말씀 앞과 뒤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특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정보가 많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의 고난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미래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는 직접 천국에 올라가 이 모든 영광을 보았고 비밀스럽게 그것을 지키고 있는 사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재림의 소망을 꼭 들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천국은 우리를 위해서 비밀스럽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 믿음을 지키라고 바울은 강권합니다.
아직 성도들이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해야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도들은 계속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의 수고를 크게 인정해주고, 약한 지체들이 온전한 믿음이 되도록 함께 기도하며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섬긴 교회가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게 보호해 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지탱해 주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또 악의 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히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 훈련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담금질을 하지 않으면 신앙에서도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의 선수들이 되어 점점 더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의 은택을 누리고, 감사로 매일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2016년9월4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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