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깨어 주의 날을 준비하라(데살로니가전서5장1절-11절)

남수연 2014. 1. 14. 19:46

새해는 밝았지만 뉴스를 통해 들리는 소식들은 역시 전혀 새롭지가 않습니다.

좋은 일을 기대하며 새해를 시작했지만 벌써 독감으로 뒤통수를 맞으며 한 주간을 보내신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은 두 배는 더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비장한 각오로 시작했어도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기대했던 일들도 잘 풀리면 좋지만 시작이 순조롭지만은 않으시죠?

힘 안들이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맞는 것이죠.

새해에 그래서 우리가 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살펴본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최선의 노력으로 계속 도전해야 합니다.

환경은 절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일을 해보면 언제든 앞이 가로막힌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아직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돌파하고 이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힘든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행하기 위한 비결을 한 가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 현실의 문제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비결이라는 것 아십니까?

위로도 소용없고, 용기도 안 나고, 자신감이 무너질 때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세워주는 비장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십자가와 부활과 같이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절에 데살로니가성도들이 재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고 말씀하죠?

바울사도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잘 가르쳤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배워야 하는 것이죠.

특히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독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자세히 거론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었습니다.

본서 1장7절의 서두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고 바울사도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 성도들이 심한 탄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욕과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고난을 보상해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주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해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시험을 잘 이기라는 것이죠.

우리 옛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가고 거꾸로 매달아놔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어쨌든 지나가고 재림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이 우겨싸인 환경에서 아무리 찾아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비탄과 절망에 있을 때 무엇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하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우리를 번뇌케 하고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을 생각하면 지나가고 사라질 미미한 것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땅의 인생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고 종착역도 아닙니다.

힘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무엇보다 재림신앙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영광스런 재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재림신앙은 분명히 최악의 환난 중에서라도 우리를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에 대해 먼저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겠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완전한 과정을 다 이루시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 가시겠다는 것이죠.

본문 바로 앞 4장16절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산 채로 공중으로 끌어 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달리 해석 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가 하늘로 들려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것이 우리 삶의 어느 날 실현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 무수히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아서 선명하게 재림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지구의 종말을 집중적으로 계시한 요한계시록조차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순서를 흐려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는 어느 날 한 순간에 반드시 끝이 납니다.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지구역사를 종결지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구역사는 인간에게 맡기셨기에 종말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신 과거의 역사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죠.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한 인류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이 말씀은 자연재해로 인류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종결짓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롭게 각 사람이 운명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자유의지와 각자에게 생명의 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종결할 것조차 인간 스스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의 파멸을 선택할 것 같습니까?

안할 것 같습니까?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멸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을 우리는 다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전쟁역사들이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짐짓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남북한 전쟁도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동아시아 문제, 중국과 일본의 행보도 심각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세계의 화약고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전쟁을 통해 시작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요한계시록9장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전쟁을 상징하는 네 천사가 묶임에서 놓여나자 중동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엔 상징적인 비유들이 많지만 정확한 지명을 계시하시는 것은 그 일이 분명하고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아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놓으시면 나라와 나라가 민족이 민족을 대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종말에 있을 전무후무한 전쟁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이미 1,2차 세계대전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마지막 전쟁은 틀림없이 핵전쟁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그 전쟁이 끔찍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지구상에 임할 가공할만한 전쟁 중에 성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바로 16절의 휴거사건입니다.

가장 파괴적인 전쟁의 시작 전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신다는 것이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역사를 종결지을 어리석은 최악의 전쟁을 선택할 때 주님의 성도들을 그 중에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휴거라는 아리송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3장10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공포스러운 지구상의 핵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우리와 자녀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정말 다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최후의 심판 전에 지구역사 중에 이런 고통스런 전쟁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인간들의 선택이긴 하지요.

그러나 어차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모든 인간은 죄의 결과에 따라 형량을 받고 영원히 댓가를 치러야 할텐 데 굳이 종말의 고통을 또 겪게 하실 필요가 있으시냐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중을 조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순차적으로 강도가 높은 재앙과 전쟁이 일어난 뒤에 항상 뒤따라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않더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파멸을 겪으며 회개하고 창조주께로 돌이키길 여전히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도 회개하지 않고, 더 이상 지구가 보존될 수 없이 인간 스스로에 의해 극심한 파멸에 이른 어느 시점에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드디어 하나님께서 종결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 인생의 어느 때 일어날 명확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내 뜻대로 안되고 불공평해 보이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과 불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것으로도 안됩니다.

내 뜻대로 안되면 인간은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이런 종말의 끔찍한 재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현실에서의 불만을 그치는 것입니다.

잘 믿는데도 불구하고 가족이 암에 걸리고 사업이 부도가 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 중에 어떻게 마음을 추스리겠습니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두려운 이 심판의 날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이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큰 폭풍이 휘몰아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겐 무엇보다 견고한 재림신앙을 갖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제가 판타지소설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성경의 예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믿으셔야 합니다.이미 재림의 약속을 주신지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더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부활을 믿듯이 주님의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토마스아퀴나스의 말은 우리의 믿음을 도전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설명이 소용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과 재림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정확하게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져야 믿음입니다.

만일 믿음이 부족하다면 힘써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수 문희0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희0씨가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대표가 지독한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냥 일만 하면 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에 가서 사인회를 해라, 불교행사에 가서 노래를 불러라, 이런 스케줄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데.

그래서 그때부터 불교관련 행사를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하고 말도 못하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장이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러냐, 문집사님은 분명히 계시다.

누가 하나님이 있다고 그러냐,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

매일 공방전을 벌이던 어느 날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정말 성경에 하나님이 있는지 내가 좀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짐을 싸들고 성경을 들고 기도원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며칠 뒤 돌아온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내가 인생의 해답을 알았다.

인생의 의미를 몰라 그렇게 답답했는데 창세기 1장을 보았더니 답이 너무 쉽게 나와 있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만드셨다는 말씀을 읽는 순간 눈이 확 열리며 모든 것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더 읽어야겠다며 또 기도원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나중에 그 사장이 조용히 문집사님에게 정말 고맙다.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죄만 짓다 지옥갈 뻔 했는 데 정말 고맙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평생 우상숭배에 공들이던 사람도 하나님이 있나 좀 알아보겠다고 작정하니까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믿음을 갖기 위해 진실 되게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면 분명히 우리 마음에 선명하게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고 확실한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먹고살기에 급급하고 가정을 일구고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불가불 할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감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생은 다 내세를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앞 4장1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극심한 곤란 중에 있을 때 위로는 오직 예수님의 재림,

작은 성과에 조급하지 않고 멀리 보며 끈기 있게 문제를 돌파하는 능력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영광스럽게 하늘에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재림신앙을 확고히 가지시고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합니다.

1. 우선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사는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정체성을 상기해야 합니다.

5절에 우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다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현저하게 모욕했던 전과가 있습니다.

어둠의 자식답게 음침하고 방탕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짓과 위선과 교활한 술책과 교만으로 아성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배우고 구주로 영접했을 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끌어내 빛의 자녀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어둡고 비참했던 우리 영혼이 사탄의 억압과 음울한 죄의 구렁텅이에서 말할 수 없는 희망 찬 나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의 일을 끊어 내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 과거의 죄악 된 습관은 빛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홀연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어둠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빛이 그 어둠을 다 몰아내셨습니다.

우리의 내면과 가정과 우리가 활동하는 생활반경들에서 점점 어둠의 세력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다큐공감에 나왔던 김치0교수에 대해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김교수는 31살의 젊은 나이에 버클리음대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3살 때 심장수술을 한 뒤 실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기도 중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루에 한 두시간씩을 기도하며 실명의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실용음악의 천재로 인정받게 해주셨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했고 결혼도 했고 다른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인도해주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누구나 김교수의 천진한 웃음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깜깜한 인생 중에서 저런 평온한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김교수를 인터뷰하며 방송을 제작하던 PD가 오히려 의도하던 것이 나오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역경을 눈물로 이긴 비극의 천재음악가로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는 데 김교수가 너무 낙천적이고 행복한 인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들 이름 자체를 아버지가 참 낙천적으로 지었더군요.

김치처럼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김치국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누나들의 이름은 김치네, 김치다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자기를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한번도 꿈꾸지 못했던 버클리음대의 교수가 된 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그를 미국으로 인도하셨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환경을 열어주시며 얼마나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지 정말 하나님이 곁에서 도와주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명의 어두운 절망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김교수를 빛 가운데 인도하신 것입니다.

정말 김교수의 깜깜한 어두움이 전혀 어두워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빛의 자녀라는 것이 더 극명하게 대조되어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다 이렇게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의 자식들처럼 아무데나 이부자리 피고 잘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광채를 발하는 하나님의 빛의 자녀임을 항상 잊지말고 모든 어둠의 일을 버리고 어둠을 물리치며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은 깨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날은 도둑이 담을 넘어온 것 같이 예기치 못한 재앙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겐 그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재림의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깨어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13장37절에서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비하고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는 믿음은 위태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소망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사모하고 기다리듯이 성도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랑이 올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빨리 오기를 고대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신앙의 행위가 다 무엇입니까?

이것만 열심히 하고 정작 예수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게 뭡니까?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10절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깨어 있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서먹하고,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재림하시는 예수님과 온 교회와의 만남을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도 말씀합니다.

피흘려 교회를 사신 예수님과 모든 성도들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의식이 치러질 것입니다.

왜 그 날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속죄하기 위해 속죄의 어린 양이 되셨던 주님의 사랑이 잔치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손과 발의 상처를 볼 때 우리가 얼마나 귀한 신부인지를 알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모두가 각자의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우리가 힘써 예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깨어서 주님의 오실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3. 다음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전투복을 입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이제부터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합니다.

낮에 속해 있다고 모든 것이 저절로 이겨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의 공격은 집요하고 우리의 죄성은 어둠을 좋아하기에 어둠 속에 숨고 잠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하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투복을 갖춰 입어야 합니다.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과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다 전쟁장비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심장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과 자존감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어떤 비난과 모략과 사탄의 불화살이 온다 해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며 때로 우리의 죄악으로 두려움에 떨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권면을 바울사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줄 믿습니다.

또 우리의 머리를 천국의 소망에 둘 때 현실로 인해 낙심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좀체로 변하지 않고 힘든 문제가 계속되면 우리가 영적으로 지칠 수가 있고 피곤하여 무기력하게 잠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끊임없이 좋은 것들을 소망해야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과 즐거움을 누릴 천국을 소망하고 계십니까?

영원히 사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서야 시름이 있고 근심과 눈물이 있어 영원히 사는 게 고통이죠.

천국에는 걱정도 염려도 마음 상할 일도 없이 모든 좋은 환경을 즐기고 누리며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사랑을 매일 받으며 느끼며 사는 삶이 천국의 삶입니다.

머리로는 항상 좋은 것들을 소망하시며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좋은 천국으로 날 인도하신다.

지금도 날 사랑하시고 어려움 중에 함께 하신다.

시련 중에 기도할 때 반드시 날 도와주신다.

나를 위해 내 앞에 더 좋은 날과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다.

이 땅의 내 인생에도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 온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끊임없이 소망하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매일을 감사하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4. 깨어서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

원어대로 직역하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세우라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주님의 날에 들려올라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잘 세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 깨어 있기는 더 어렵습니다.

히브리서10장24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깨어있기 위해서는 서로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를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와 소망이 천성을 향해 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이곳에서 졸지 않기 위해 서로 좋은 대화를 나눕시다.

자꾸 졸린 성도가 있으면 이리 오게 합시다.

그래서 그 졸린 눈을 계속 뜨고 있게 합시다.

성도의 교제가 잘만 이루어진다면 그들은 계속 깨어 있을 수 있다오.

지옥의 권세도 그들을 잠들게 할 수 없다오.

교회의 성도간의 교제가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게 합니다.

스펄전은 이 때 우리가 나눌 대화는 예수그리스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말합니다.

함께 만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졸린 눈을 뜨고 가도록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전체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고 서로를 확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지식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가 상상 못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대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를 끈질기게 사로잡는 염려와 어둠의 습관을 버리고 빛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깨어 주님의 재림을 확고하게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재림의 날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