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4장13절-18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

남수연 2023. 3. 16. 00:27

https://www.youtube.com/watch?v=nF8GFuzUxek 

오늘 바울사도의 편지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데살로니가로 돌아온 디모데에게 성도들은 아마 재림에 대한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이 편지에 재림에 대한 답변을 쓰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재림과 지구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수많은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런 종말 시나리오로 다양한 이단들이 등장한 것이죠.

이단들은 그런 종말 시나리오를 얼마나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정통 교회 신자들은 종말에 대해서 너무 모르죠.

성도들은 종말론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 중에서 기다리고 가장 기대해야 할 것도 주님의 재림입니다.

모든 죄와 악이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이죠.

어찌 그 날을 소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믿죠.

죽음 다음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이지, 죽으면 끝이라는 게 진실은 아닙니다.

교인들 중에도 천국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일년을 죽음 뒤의 영생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천국과 주님의 재림과 같은 말씀에 관심이 없죠.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을 심령에 심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기에 성도들은 인생의 목적지가 어딘지 분명히 알고 그곳을 소망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우리가 완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현실은 땅의 문제를 향해 늘 우리의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영원한 목적지를 잃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물었던 주님의 재림에 대한 바울사도의 답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맞게 될 종말입니다.

목적지가 다른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재림과 종말에 대한 믿음을 오늘 굳건히 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1. 먼저 예수님이 세상에 강림하심과 종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사도가 예수님의 강림을 소망하는 것은 편지 속에 잘 드러납니다.

1장10절, 2장19절, 3장13절에서 예수님의 강림을 계속 언급하죠.

바울사도가 계속해서 신앙생활의 초점을 예수님의 재림에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이 되었다면 우리도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날이 우리 믿음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하며 신앙생활하고 죄와 싸우며 사는 것이 목적은 아니잖아요?

13절에 보면 바울사도는 이 재림에 대한 지식을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탄생, 십자가 대속, 부활, 승천, 재림으로 이뤄집니다.

구원 사역의 마지막은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모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심판주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 시는 것이 재림입니다.

이 재림과 동시에 지구역사는 종결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고,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재림, 지구 역사의 종결, 최후의 심판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머리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비성경적 종말론에 미혹되지 않고 우리 믿음을 건전하게 지키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 끝날을 말씀하실 때는 두가지 종말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잘 구별해서 읽어야 혼동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종말은, 이스라엘의 종말과 마지막 지구의 종말입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신 경우는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한 국가적인 종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후 장장 이천년 간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것이죠.

지금의 이스라엘국가는 1948년에 건국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나라가 사라졌다 이천년 만에 다시 건국된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세상 종말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의 개국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의 종말을 말씀하실 때는 재림이 지체될 것에 대해 암시하셨습니다.

비유 속의 신랑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잠들 만큼 더디 오죠.

왕권을 받으러 간 상속자도 종들이 진탕 먹고 마시도록 늦게 옵니다.

이런 말씀들은 종말이 생각보다 오래 뒤에 일어날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죠.

이런 역사의 종말과 별개로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인 종말을 맞습니다.

우리에게 관계있는 것은 이런 지구의 종말보다는 개인의 종말일 것입니다.

정말 임박한 것은 우리 개인의 종말인 것이죠.

저도 길어야 한 이십년 정도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 가운데 죽기 전에 세상 끝의 종말을 경험하는 성도들도 있을 수 있겠죠.

우리 장우영성도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의 강림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성도들도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오늘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의문은 재림 전에 먼저 죽은 성도들에 대한 것입니다.

1)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그 세대에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사도들도 처음엔 예수님께서 그 세대에 재림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은 그런 이해에서 온 것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시려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주님께서 속히 영광을 받으시도록 복음전파에 혼신을 다했던 것이죠.

만일 그런 긴박성을 주지 않고 주님이 수천 년 뒤에 오신다고 알리셨다면 지금도 복음은 유럽에 머물고 있을지 모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긴박한 종말을 기다렸습니다.

한국교회도 서기 2천년을 맞기 직전 세기말 분위기에서 종말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줄 알았습니다.

시한부 종말론까지 나오며 정상적인 생활을 접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최근 나는 신이*라는 프로에서 JM*교주 정명*이 다시 언론에 부각되고 있죠.

정씨가 젊은 대학생들을 끌어 모은 수단도 종말, 휴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정명석을 재림하신 주님이라고 지금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이단은 사람의 인격과 영혼과 삶을 처참하게 파멸시킵니다.

정씨의 영상을 조금만 봐도 말이나 행동이나 분노를 일으킬 만큼 악질적이고 말하는 게 듣기 거북할 정도로 저급합니다.

그런데 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도 무신론에, 세속화에, 이단에, 얼마든지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단 교주 앞에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머리가 나빠서 그럴 것 같습니까?

90년대에 정명석을 따르던 청년들이 거의 다 스카이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정명* 가르치던 성경공부에 다니던 똑똑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의사, 검사, 교수, 언론인이 되어 정명석 비호 사단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명징하게 알지 못하면 이 말세는 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에 미혹 당하는 시대입니다.

데살로니교회에도 종말 의식에 치우친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보면 이 편지를 받은 뒤에도 그 문제가 더 심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또 재림문제를 바로 잡아 줍니다.

희한하게 사이비 신앙은 사람을 세뇌시켜 중독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에 깊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교회가 건전한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바른 믿음으로 좀 세뇌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항상 너무 정신이 멀쩡해서 내가 그어 놓은 신앙생활 이상은 절대로 더 안 하려고 하잖아요?

주님이 얼마나 신사적이고 젠틀하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지 알 수 있죠.

주님께 감화되도록 끝까지 설득하시지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맞고 다시 왔다는 성도들이 가끔 계신데, 주님이 때리신 게 아니라 자신이 잘못 산 결과로 그냥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 바울사도도 성도들의 재림 신앙에 이상징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앞 11절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교회의 이런 열광적인 재림신앙 속에서 죽는 성도들이 생기자 의문이 폭증합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 텐데 이렇게 먼저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13절부터 17절까지 이어집니다.

13절, 슬퍼하지 말라

14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도 부활한다

15절, 오히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보다 그들이 먼저 부활한다

17절, 그 후에 우리도 변화해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

18절, 그러므로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

 

2) 바울의 답변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죽은 성도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재림 때 성도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죽은 성도들은 현재 어떤 상태로 있냐는 문제입니다.

저는 그게 궁금하더군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금 천국에 계실까?

몸은 땅에서 흙이 되었는데, 천국에는 영혼만 계신 걸까?

그런 것 궁금하지 않으세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먼저 간 성도들이 천국에 있는 것을 요한이 목격하죠.

예수님이 십자가의 우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도 부자와 나사로가 이미 천국에 있죠.

그런데 오늘 바울사도는 14절에서 그들이 자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종말과 재림에 대해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스케치들만 여러 장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까지 죽은 사람들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성경의 모든 스케치가 들어간 완벽한 그림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맞으면 저 쪽에는 안 맞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종류의 설들이 있습니다.

1번, 오늘 바울사도가 죽은 성도들을 잔다고 표현한 걸 근거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주님 재림 때까지 수면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2번, 성도들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께 가 있다는 것입니다.

3번, 죽은 자들이 심판 때까지 다른 곳에 모여있다 재림시에 부활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 것 같습니까?

어느 것이든 재림과 종말에 대한 모든 성경 구절들에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4번 답이 있는 것이겠죠.

영혼의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은 어느 쪽을 믿는다고 해도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에 확신을 주고 도움이 되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 장로교는 2번을 지지합니다.

다만 이런 내용을 이해할 때 천국은 지구 삶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이미 지구 환경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옮겨지게 됩니다.

시간은 지구에서만 흐르는 것이지 천국은 지구와 똑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구에서나 언제 죽느냐는 시간차이가 있는 것이지 죽는 순간 이런 시간차는 무의미해지는 것이죠.

모든 시간대에 죽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재림 때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진 성도들까지 천국에서는 어쩌면 시간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 자고 있다 표현할 뿐인 것이죠.

사람에게 본 적이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선천적인 맹인에게 오로라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선천적 시각장애 바이얼리니스트 김지0 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릴 때 TV에서 북극의 오로라를 보여주는 영상을 엄마와 함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선씨가 이해한 오로라는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이 아니라 배경음악으로 깔아 준 영롱한 차임벨 소리였습니다.

오로라를 영롱한 차임벨 소리로 알았다는 거예요.

한번도 눈으로 사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죠.

천국은 우리의 상상하는 것, 기대하는 것, 우리의 경험을 완전히 능가하는 곳입니다.

지구와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죠.

천국에서는 무얼 먹지?

천국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지?

천국에서 누구의 집이 더 크지?

이 세상에서 살던 것 이상을 설명해 봤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죽은 성도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주님의 재림의 날에는 모두가 다 부활해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재림과 함께 거론되는 휴거에 대한 내용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먼저,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재림 때 천사들의 큰 호령과 나팔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강림하신다’는 단어는 로마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임금이 행차한다는 단어 정도겠죠.

신이나 다름없던 로마황제는 어마어마한 권세를 동원하며 도시가 깜짝 놀랄만한 위용으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실 때 그런 말할 수 없는 영광과 드높은 위엄으로 임하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하죠.

그리고 17절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 구절에서 휴거라는 사건을 다양하게 상상해 낸 것입니다.

우리 청년 때는 휴거에 대한 책도 많았고 영화도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있던 성도들이 비밀리에 휴거가 된다는 것이죠.

어느 날 성도들이 싹 다 사라져 버린다는 거예요.

성도들은 공중에서 칠 년 동안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하고 땅에는 칠년 동안 대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셔서 천년 동안 다스리신다는 것이죠.

더 복잡하고 디테일한 과정들이 많이 있는데 생략합니다.

이렇게 공중 휴거 뒤에 7년 대환난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휴거되기 위해서 지나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신천0가 휴거되는 144000명에 들어가야 한다고 교인들을 옭아매잖아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충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해도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우편의 강도가 그런 사람이잖아요?

주님을 위한 우리의 봉사와 헌신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음이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뭔가 얻어내려고 힘들게 봉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아주 작은 일이라도 진심을 다해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는 어떤 일이라도 정말 주님께 맞는 최고의 경외심을 갖고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이 휴거 뒤 대환난이라는 해석은 불건전한 교회를 이끄는 자들의 손에서 위협적인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단편적인 스케치들을 글자대로 해석하고 뜯어 맞춘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교회 역사의 정통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19세기 말부터 등장해서 환타지 소설로 나오다가 이단 종파들에 의해 급속히 확산된 것입니다.

죽은 성도나 살아있는 성도나 안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님이 강림하신 마지막 날 뒤에는 아무도 지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을 지구 자체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베드로후서3장10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날 이후는 더 이상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날, 성도들은 주님의 환영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던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이죠.

믿는 사람만 공중에 올라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남겨지는 일은 없습니다.

마태복음24장에도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여러 가지로 가르치십니다.

거기에서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진다, 또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휴거론자들은 믿는 자는 휴거되고 불신자들이 남겨져 7년대환난을 당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종말이 평범한 일상 중에 갑자기 모두에게 임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 날 구원받는 자가 있고 심판을 당하는 자가 분류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종말에 대해서 다시한번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성도들만 들림 받는 휴거는 없습니다.

재림 뒤 칠년 대환난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과 죄와 싸우는 것이 교회가 당하는 환난이고 이것은 주님의 강림이 가까울수록 더 극심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자연재해와 전쟁, 기상이변으로 인한 고통은 가중될 것입니다.

더 이상 지구자체가 존재하지 못할만큼 파괴되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인간 스스로가 자멸해 가는 어느 날, 끝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죽은 자와 산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위에 심판자로 서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만이 아니라 장로교의 정통적인 믿음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잘 반영한 종말론입니다.

예수님이 왜 재림하신 뒤 세상에 칠년 대환란을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심판하실 텐데, 하나님이 왜 사람들을 괴롭게 하시겠어요?

그건 하나님의 성품에 배치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교화의 목적이지 괴롭히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화가 안 되서 문제이지만요.

우리보다 먼저 죽은 영혼들이 어떻게 되었냐는 무의미합니다.

우리의 시간개념과 하나님나라와는 어떻게 다를지 우리는 모릅니다.

종말론으로 공포심을 주고 교주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소망과 기쁨으로 기다립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공포심으로 기다린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죠.

그 날에는 우리의 어깨에 지고 있던 모든 짐이 벗겨지고, 우리의 몸의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눈물도, 애통함도, 아픔도 다 사라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나중에 갈 천국이 무슨 도움이되냐고 화내지 마시기바랍니다.

예수님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죽음조차도 이기게 합니다.

히브리서11장35절,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위로와 격려도 이 천국의 소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