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2장8절-14절)

남수연 2023. 12. 27. 02:27

https://www.youtube.com/watch?v=zzCgBCMu7aY

세계사는 예수님 탄생하신 해로부터 서기1년이 시작됩니다.

올해가 2023번째 예수님의 생일이십니다.

1225일이 정확한 예수님 탄생일은 아닙니다.

성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유추하면 거의 이때쯤이 됩니다.

탄생일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교회가 한 날을 정해서 주님의 탄생일로 기념해 지키고 있는 것이죠.

오늘, 행사가 아니라 성탄의 의미를 잘 알고 드리는 예배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한 여관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죠.

당시 로마황제가 모든 지배국들에 대대적인 호적 개편령을 내립니다.

다윗의 족보에 속한 요셉도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죠.

작은 마을 여관엔 방이 없었고,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베들레헴 서쪽에 있는 가자지구에서는 죽음과 삶에 경계가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세종시보다 좁은 가자지구에 현재 사망자가 이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들은 올해 모든 성탄 행사를 취소했습니다.

한 교회는 구유에 계신 전통적인 아기 예수님 장식 대신 무너진 건물 잔해에 둘러싸인 아기예수님을 만들었더군요.

오늘 설교 제목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신 것인가요?

오늘 성경이 전해주는 첫 성탄의 광경을 통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양치는 목자들의 성탄절 이야기는 교회를 계속 다니신 분들은 수십 번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경배를 드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찾아와 세 가지 보물을 드리고 경배했다고 기록하죠.

유대의 동방은 페르시아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구원이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우상숭배에 푹 쩔어있던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전해졌잖아요?

그랬던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잖아요?

그리고 본문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한 무리의 예배자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인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왜 목자에게 성탄의 소식을 전하셨는지,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천사의 찬양의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

 

1. 목자들에게 중요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 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8절이 그 이유를 말해 주는 듯합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이것은 들판에서 별을 세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종일 힘들게 일해도 저녁이 되면 따뜻한 음식이 있고 잠자리가 있는 집에서 쉬잖아요?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이스라엘 목자들의 삶을 8절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땅엔 뉴질랜드 같은 너른 목초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저도 가봤지만, 돌이 정말 많고 풀이 정말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많은 돌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푸르른 농경지는 거의 갈릴리 인근에만 좀 있는 것 같더군요.

좋은 땅을 못 가진 사람들은 고기잡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죠.

유목민들은 양떼를 데리고 풀 먹일 곳을 찾아 몇 날, 몇 달을 밖에서 지냅니다.

인생이 다 고단하지만 정말 힘든 인생이 바로 양치는 목자들입니다.

다른 직업을 어떻게 구하겠어요?

평생 그 고단한 일을 하며 양젖을 먹고 양털을 팔아서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식이 그 일을 이어받는 것이죠.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밤에 하나님이 이 목자들에게 첫 예배자가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사람들이 다 잘 사는 것 같지만 아무도 고단하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 먹여 살려야 하는 건 참 힘들잖아요?

이런 목자들이나 다름없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뉴스가 아닙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수백년 전 예언 중에는 이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 똑똑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돈이 100억만 있으면 아마 사는 데 하나님이 필요 없을걸요?

돈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 줄을 설 권력이 있으면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 천한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보면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모든 사람을 초청했지만 다 핑계를 대고 거절했기에 가난한 자, 눈먼 자, 저는 자들을 데려다 채우라고 하죠.

실제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실 때도 당시 잘 나가던 사람들은 거의 예수님을 배척했잖아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결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거절한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복음이 결핍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무언가 결핍이 있는 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참 거지 같다. 이 황량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이 없구나. 어떻게 살아야 가지

이런 마음이 한번도 든 적이 없다면 예수님을 찾아오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았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맞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놀라운 비밀은 결핍 때문에 주님을 찾아와 주님으로 인해 점점 모든 것이 충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신이 있으시니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지 약을 팔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2.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한 메시지가 무엇이냐입니다.

1) 9절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쌉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세계에 현현하신 방식입니다.

성막의 법궤 위와 솔로몬 성전의 낙성식 때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목자들 몇 명에게 법궤 위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그 귀한 영광을 비추신 것입니다.

또 우리로서는 상상도 안되고 궁금하기만 한 천사들의 아름다운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목자 몇 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보잘것없은 사람에겐 너무 과한 은혜의 낭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이 사람에게 사랑을 다 주는 것은 과하다그런 것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계산해서 덜어내지 않으십니다.

오늘 목자에게만 그 영광스러운 복을 주신 게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결국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목자들의 이야기를 믿고 그들과 똑같이 주님의 탄생에 경배하는 과분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2) 천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의 메시지는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평범한 목소리로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라, 라는 단어는 천사가 놀라고 격앙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가 되신 사실에 발칵 뒤집힌 것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온 백성,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놀랍고 희망찬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죄인들을 구원해 주실 구주가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하든 말든,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것을 알 수 있는 표적이 있다고 합니다.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지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 증거는 다름 아닌 강보에 쌓인 아기라는 것이죠.

왜 이 아기가 하나님의 구원의 증표이냐 하면, 구약성경에서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한 아기를 보내신다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독문에서 읽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사실이죠.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바로 그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아기를 알아볼 증거는 그 아기가 구유에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성안으로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를 찾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찾아 낸 그 아기가 허름한 축사 안 여물통 안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실망했을까요?

아니죠.

천사들이 분명히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여야 한다고 했잖아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의 첫 이부자리를 여물통에 펴겠습니까?

그런 잠자리를 가진 신생아는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하면 지금도 온 세상이 아기 예수님을 떠올리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구유에 태어나시고 점점 더 낮아져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가장 나쁜 것을 주님께서 대신 가져가신 것입니다.

부모인 성도님들은 자식을 위한 그런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3. 천사가 이 놀라운 사실을 전달하자 곧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찬양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일입니다.

가장 숭고하고 가장 큰 희생은 마땅히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어디선가 기사를 하나 읽고 제가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시골에서 홀로 사는 고령의 할머니 댁에 동네 사람들이 살금살금 와서는 수북한 눈을 치워 놓고 갑니다.

몰래 모닝빵도 사다 놓고, 연탄불도 갈아주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몰래 하는 이유는 할머니가 알면 역정을 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이북에서 피난을 왔는데 전쟁통에 세 아기가 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열심히 일하며 모은 돈으로 그 마을에 초등학교를 지어줍니다.

돈이 남아돌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두 분은 강냉이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살다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완전히 등이 꼬부라진 할머니가 혼자 남으신 것이죠.

그것을 다 아는 동네 분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자식도 없는 할머니를 어머니같이 모시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도 이렇게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을 귀하게 보고 존경합니다.

할아버지가 학교를 짓고, 젊은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던 데는 이유가 있더군요.

공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은 자식들 대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은 자식들을 위해 그 큰 희생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죠.

우리 하나님은 왜 우리의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까?

자기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리 모두를 속죄하고 다시 자녀를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장엄하고 위대하심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을 다시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우리나라가 OECD 38개국 중에서 여전히 노인 빈곤율이 1위입니다.

이번에 조사한 결과로는 75세 이상 노인의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OECD 회원국이 선진국임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빈곤 상태를 빈곤 국가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우는 웬만큼 못사는 사람도 세계적으로는 상위 10%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계에는 가난하고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먹지도 못하는 데 평화가 어디있겠습니까?

우리사회는 먹고는 살지만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에서 오는 갈등, 상대적으로 가난한 생활로 마음이 항상 불편합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겐 본래 평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평화라는 단어는 세계 평화, 그런 의미의 평화는 아닙니다.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평화를 말합니다.

사람 관계에 평안이 없고, 심지어 나 자신과의 관계에도 평안이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막연하지만 신의 존재를 의식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절대자와의 관계가 뭔가 좋지 않고 불안함이 있다는 걸 감지한다는 것이죠.

제가 두 사람의 신앙스토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수엄정0 씨가 방송에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가수활동도 잘하고 앨범도 잘되고 있는데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고 합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고 비어있는 그 공허한 느낌이랄까요?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며 달래보려 해도 안되는 거예요.

뭔가 해결되지 않은 불안함이 끈질기게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카이스트에서 디자인을 가리키고 있는 배상0 교수입니다.

이분은 디자인 천재입니다.

세계 최고의 디자인공모전에서 55회나 상을 탄 사람입니다.

뉴욕에서 활동할 때는 유명한 메이시백화점 1층에 배교수 작품이 쫙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잘 나가고 돈을 많이 버니 파티를 하면 오백명씩을 불렀다고 하더군요.

가수 박진0 씨도 전에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왜 그런 파티를 하냐하면 뭔가 허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배교수가 각광받는 디자이너였지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그의 마음 속에 계속 드는 것은 늘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 전선에서 먹고 사는 데 지쳐 평화가 없죠.

그게 해결 되고 나도 그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엄정0 씨의 경우는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불안함 속에 어느 날부터 그렇게 싫어했던 하나님이란 단어가 계속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데, 하나님이란 말이 자꾸 생각나면 나보고 어쩌라구요!’

그렇게 하나님께 불평을 하다 조금씩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니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딱 맞춰지듯이 인생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죠.

지금은 얼굴이 너무 편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다닌다고 합니다.

배디자이너는 어느날 지하철에서 자기가 디자인한 최신상 코닥카메라를 들고 좋아하는 커플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니 너무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름 끼치는 생각이 엄습합니다.

내가 육개월이 되면 또 버려질 고급 쓰레기를 만들었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사람들이 멀쩡하게 쓸 수 있는 걸 내다 버리고 안 사도 될 새 물건을 사게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죠.

결국 소비사회이 하수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일에 인생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세상을 따라, 자기만을 위해 살던 배교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미국에서의 모든 커리어를 접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지금은 월급을 1/10로 받는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배교수가 하는 일 중에는 기아 난민들과 물 부족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위해 발명품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물부족 국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염 된 물로 죽어가잖아요?

발명품은 한국에서 가져다 주는 게 아닙니다.

언제까지 물건을 공급해 줄 수는 없잖아요?

모든 것을 다 현지에서 구해서 필요한 것들을 발명해서 보급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땅에서 흙을 파 반죽해 큰 깔대기 모양의 토기를 만듭니다.

아프리카 소똥에 불을 붙여서 그것을 굽습니다.

빈 그릇에 이 깔대기 모양의 토기를 앉히고 오염된 물을 부으면 아래로 맑은 물이 내려옵니다.

이걸 3회 정도하면 먹을 수 있는 수질의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여러 마을에서 똑똑한 청년들을 모아서 그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서 봐도 그걸 만들어 물을 걸러서 먹고 있다고 합니다.

해마다 카이스트 학생들과 아프리카를 방문해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주고 온다고 합니다.

전공자의 세계에선 돈 받으면 프로지만, 우리 믿음의 세계에선 내 돈 들여 해 주는 사람이 프로입니다.

이분이 지금 침대에 누워 공허와 싸우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내 안에 참된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과 화평해집니다.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경쟁과 싸움의 대상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최근 배교수는 롯데그룹 신동빈회장의 제안으로 롯데디자인연구소 대표직을 맡고 있습니다.

배교수가 신회장 요청을 수락하는 조건은 롯데그룹이 환경과 나눔에 동참하는 것이었고, 신회장이 받아들여서 큰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모두가 엄정화씨처럼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배상민교수처럼 세속의 가치관보다 더 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를 권고드립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의 마음에 오시면 세상에 이런 평화가 오게 됩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옵니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런 평화가 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하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평화를 아는 사람들이 인생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성탄의 일화와 거기에 담긴 의미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밤에도 쉬지 못하고 무거운 인생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처럼 안식도 없고, 평안도 없고, 정처도 없던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찾아오신 성탄절입니다.

천사들이 전한 말씀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감사하고 환영하며 믿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불안한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평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버겁게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복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과 시간과 내 형편에 맞게 봉사할 여지를 두고 살면 좋겠습니다.

이상이 성탄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평강이 함께 예배드린 모든 분들과 가정에 충만히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