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pkjnnpkqV1w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도님들께 그런 사람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내게 정말 선물 같은 사람이다’, 배우자이건, 자녀이건, 부모님이건, 친구이건.
그 느낌과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시죠?
우리가 ‘예수님은 내게 선물이시다’ 그런 마음은 단지 믿음으로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내게 예수님이 너무 귀하시다, 주님을 떠나서는 내가 살지 못하겠다’.
그렇게 나의 이성 뿐 아니라 나의 감정도 함께 깊어 가는 그런 믿음이 되길, 주님이 우리의 선물로 오신 성탄절에 다시 한번 소망합니다.
오늘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기다리고 만날 것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보통 성탄절 설교는 주로 어제 설교였던 목자의 성탄까지에서 끝납니다.
오늘 본문인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까지는 잘 넘어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나 목자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시므온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성탄의 메시지를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이 사건은 예수님이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날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해주신 율법대로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오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의 첫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출애굽 때 장자재앙으로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잖아요?
그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죠.
죽지 않은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을 떠나면 사람은 다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불신자들의 죽음도 결국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심판의 상태로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구원의 상태로 영원히 사느냐의 차이인 것이죠.
이스라엘 장자들은 애굽의 장자들과 다르게 죽지 않고 살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께 바쳐져 살아야하는 것은 동일한 원리입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하나님께 나를 드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죠.
그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굽인처럼 죄에 속박되는 것보다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속박되어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자신을 드리는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죠.
이런 율법은 누가 명령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시내산에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율법대로 지금 행하고 계신 것이죠.
예수님은 원죄도 없으시고 속죄 같은 것도 필요 없으신데 왜 이런 율법대로 지키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사람의 자격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율법을 지켜야 했기에, 예수님도 사람과 똑같이 되시기 위해서 율법을 다 지키셨던 것이죠.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셔서 완전한 대속의 자격을 갖췄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흠이 있는 모든 인간들과 동일시되신다는 뜻으로 율법을 지키신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안고 성전에 들어왔을 때 시므온을 만나게 됩니다.
2. 시므온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합니다.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니라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 설명에서 시므온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죠.
1)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주신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셨건만 메시야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메시야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의롭고 경건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부모들이 그랬고, 마리아와 요셉도 그랬습니다.
아리마데 요셉도 그랬고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기다림이 진짜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곧 만날텐 데 어떻게 계속 악을 행하며 살겠습니까?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예전엔 하나님 만나기를 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1세대 성도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대를 살았지만 현세의 복을 비는 기복주의 신앙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청년 때도 생각해 보면 다들 가난했습니다.
생활고도 절박했지만 환상 중에라도 예수님 한번 보기를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한 사진작가가 눈길에서 찍었다는 흑백으로 얼룩진 사진이 유행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의 얼굴 같지 않은 얼룩점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 얼굴로 보인다는 말에 열심히 그림을 들여다 보곤 했죠.
바로 이 사진입니다.
어쨌든 과거의 성도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성실히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알고 깊이 교제하기를 구하는 마음은 사그러들고, 점점 예배와 경건 생활의 의무만을 행하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말세에 사랑이 식어가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종교의 의무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생활과 경건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지극히 복스러운 관계를 추구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죠.
예전엔 간혹 기도원에도 가고, 철야 기도회에도 참석하며 장시간을 주님 앞에서 보냈잖아요?
이제는 생활이 분주하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보니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점점 짧아지는 게 사실입니다.
뭉근하게 주님을 고대하지를 못하는 것이죠.
신실한 성도들조차도 기도하고 나서 주님과의 만남의 여운이 전혀 없이 서둘러 생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급하게 현실 문제들만 간구하면서 기도는 먹고사는 문제로 끝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고, 깊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신앙의 낭만주의가 다시 그리운 시대입니다.
시므온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결국 주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이미 가진 성도들도 매일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어야 믿음의 속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옛본성과 습관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계속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잖아요?
사실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각성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메시야를 두 눈으로 보기를 진짜 기다렸습니다.
진짜 기다리는 것하고 말로만 기다리는 것하고 다릅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타지에 간 것을 기다리던 종들의 행태를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인이 더디오리라 생각하고 술친구와 방탕하며 악하게 살던 종은 주인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초림의 언약을 받고 진실되게 기다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초림으로 오신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재림의 언약을 받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주님 만나길 기다리는 성도처럼 살아갈 것을 이 성탄절에 마음에 다짐해야겠습니다.
2) 시므온은 어떻게 평생을 메시야에 집중하고 바라며 살 수 있었을까요?
우선은 내게 더 값어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보다 못한 것을 포기할 수가 있게 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값어치있다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찮은 것을 위해서 더 고귀한 것을 포기하지는 않잖아요?
유퀴즈에 나왔던 이상0선수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상0은 우리나라 대표 e스포츠 선수입니다.
e스포츠는 비디오 게임을 통해서 이뤄지는 스포츠를 말합니다.
전자오락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지만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정신스포츠입니다.
이상0선수는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e스포츠에서 금메달을 딴 팀을 이끄는 선수죠.
우리나라에서 열린 롤드컵이라는 세계대회에서도 최우수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선수가 중국의 연봉 245억의 스카웃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거액의 연봉을 거절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처음엔 돈이, 그 다음엔 명예가 목표였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로 여겨집니다’
지금의 팀원들과 함께 좀 더 성장하는 것을 위해 245억 연봉을 포기했다는 것이죠.
이것처럼, 주님을 따르며 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성장하는 가치와 기쁨을 알수록 인생의 목적이 주님께로 점점 좁혀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잘되고 행복한 게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몸과 몸 안에 담긴 영혼은 이 물질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단 믿음이 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런 바램은 있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게 문제잖아요?
시므온은 평생을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 수 있었는지 2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서 계신다는 뜻은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것이죠.
사람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계속 은혜를 부어주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강한 은혜를 주시길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3.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린 시므온은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계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성령의 감동으로’와 ‘마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뤄집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행동할 때 외부의 조건들이 ‘마침’이라는 우연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 중에서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 있죠.
어떻게 그때 마침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그때 마침 그런 생각이 났을까.
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박0라는 형제가 있었죠.
건물 밖으로 떨어져 전신마비가 되었던 형제입니다.
그 형제가 욕창으로 인해 오래 큰 고생을 했습니다.
활동을 못하고 계속 집에만 있다보니 점점 우울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만 있던 박0 형제에게 평소 친하던 개그맨 김기0 씨가 자기교회의 새벽기도에 함께 가자고 권합니다.
사실 몸이 어디 한 군데라도 아프면 기도도 잘 안됩니다.
건강하면 빠릿빠릿 움직이고 싶어서 기도하기가 싫고, 몸이 아프면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또 기도하기가 싫고.
우리의 기도생활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박0 형제는 새벽기도 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날 새벽기도에서 박0 형제가 누구를 만났는지 아십니까?
새롭게하소서에서 MC를 하고 있고 송지0 씨를 만나게 됩니다.
시크릿이란 걸그룹의 멤버였다고 합니다.
그날 새벽에 처음 본 이 청년들이 서로 한 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리고 지난 주 위라클 영상을 보니 둘이 그동안 교제해 왔다는 것을 공개했더군요.
사람들의 댓글 응원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필 욕창이 났을지 속상했겠지만, 그걸로 인해 기도하려고 갔던 그 교회에 마침 장차 배우자가 될 자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하루를 사는 동안 보통 150회 정도의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쉽게는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을까, 순두부를 먹을까 선택이죠.
오늘도 성탄절 예배를 위해 교회로 올지, 온라인예배를 드릴지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150회의 선택 중에 1/3은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어느 것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박위형제가 그날 불편한 몸으로 새벽기도 가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예쁜 예비 배우자를 어떻게 만났겠습니까?
성령께서는 하루 종일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우리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특이한 사인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평소 우리가 바른 신앙으로 알고 지켜오던 그 기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매일 일상에서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작은 선택이 곤욕스러운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잘못 생각해 저지르고 난 뒤 후회할 때가 많잖아요?
그러므로 미련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매일 하루의 시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면 가능하면 좀 더 일찍부터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상황을 조성하시며 어떤 것들을 선택하며 살지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시므온은 하나님께 경건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전으로 달려갔고, 마침 부모와 함께 성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꾸준히 기도생활을 붙들고 있다면 성령께서 매일의 선택에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4. 28절부터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감격해 부르는 찬송시가 나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부른 찬송시에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1)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메시야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나와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던 시므온입니다.
성전에 올 때마다 누가 과연 메시야일지 얼마나 지나는 사람들을 살폈을까요?
말라기선지자가 그 메시야는 성전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잖아요?
말라기3장1절,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이 예언이 오늘 성취됨을 본 시므온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자가 오셨으니 이제 이스라엘의 영광은 회복될 것이고 나는 평안히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사람은 그 마음이 이렇게 바뀝니다.
이 땅의 삶도 귀하지만 죽음 뒤에 삶이 더 완전하다는 걸 알게 되죠.
그렇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나 공포가 사라집니다.
바울사도는 죽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살아서 할 일이 성도들에게 유익이기에 사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우리 구원의 소망은 견고한 확신입니다.
이 땅의 삶에 풍랑이 덮치면 당연히 불안하고 괴롭지만 그것들은 높다란 등대 밑에 와서 부딪치는 파도와 같을 뿐입니다.
천국의 소망은 우뚝 선 등대처럼 우리의 중심에 굳게 서 있는 것이죠.
이 성탄절 아침에 주님을 천국에서 만난다는 소망의 믿음을 다시 갖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2) 구주 예수님은 이방의 빛이고 이스라엘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 제자들도 이방인들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방인의 구원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벌써 시므온은 이렇게 노래하죠.
31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내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그러나 이 아기 메시야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완수하는 것은 험난할 것도 예언합니다.
34절,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은 누군가는 흥하게 되는 것이고 누군가는 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흥하게 되는 범주에 들어오게 된 것을 두려운 마음과 겸손으로 감사하며 성탄의 주님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가슴 아픈 예언이 선고됩니다.
35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칼로 찌르는 듯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자식이 그런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마리아가 당할 고난이자 예수님의 고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아기의 몸에, 못이 박히고 창으로 찔릴 고난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품은 마리아에게도 같은 고통이었듯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들이 때때로 당하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 때 사람들이 우리를 찔러 아프게도 합니다.
어제 누군가를 초청하는 과정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찔리는 것이 어떻게 주님이 못과 창에 찔리신 것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 주시기를 선택하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간절함을 다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사의 가장 큰 행복이 사랑입니다.
그렇듯 신앙에서의 가장 큰 행복도 내가 주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또 시므온이 평생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인내의 믿음과 매일의 바른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므온의 예언에서 깊이 새겨야 할 것을 하나 고른다면 예수님을 마음에 품음으로 인해 찌르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고 손발이 못에 찔리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감수하는 아픔도 기쁨으로 감당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23장44절-56절 (십자가에서 죽으심) (1) | 2024.04.01 |
---|---|
누가복음23장26절-31절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구레네 시몬, 고난주간 (1) | 2024.03.25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2장8절-14절) (1) | 2023.12.27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누가복음24장13절-35절) (1) | 2023.04.12 |
마지막 유월절, 첫 성찬 (누가복음22장7절-20절) (1) | 2023.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