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누가복음24장13절-35절)

남수연 2023. 4. 12. 04:01

https://www.youtube.com/watch?v=U4fn5ZXWv_4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제자들이 전파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주님이 그동안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지 못하시면 주님은 우리처럼 죄인이란 뜻이고 우리의 대속도 물거품이 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죄가 없는 분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죄가 없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장차 성도들이 부활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잘 이해하고 믿을 때 내가 부활한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그러면 인생의 끝을 향해 걸어가던 수평적인 걸음이 부활의 영광을 향해서 가는 수직적인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걸어서 하늘까지라는 노래가 있었죠.

저는 그 노래제목이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매일의 걸음이 바로 하늘을 향해 가는 걸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에 대해 잘 이해하고 더 확고한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본문의 순차에 따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을 붙잡는 제자들,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제자들의 순서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낙망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1) 이것은 사람에게 부활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신자들이 너무 쉽게 부활을 믿고 있다면 부활절을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또 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시시한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도 당합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우리 믿음과 종류가 다른 게 아니잖아요?

우리 믿음의 기준을 너무 성경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있었던 혼란과 의심들이 세밀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날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가 있죠.

13절을 보면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십 킬로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성인 남자의 걸음이면 한 세 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거리죠.

두 제자가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 이날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사흘째라고 하죠.

그날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여자들에게 나타나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죠.

그 여자들이 전한 그 모든 말을 이 두 사람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최소 하루라도 과연 주님이 부활하셨을지 사태 파악을 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도 안되서 서둘러 귀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로 안 믿겠다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실 것을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빈 무덤과 여자들의 말에서 희망의 실마리라도 붙잡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들은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모든 제자들 반응도 그랬습니다.

앞에 11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처음 반응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부활이 진짜라는 걸 입증할까요, 거짓이라는 걸 입증할까요?

부활이 사기극이라면 처음부터 제자들이 의심했다는 내용은 뺐을 것입니다.

부활을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 그런데 사실이었어.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워서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죽은 사람이 예수님처럼 부활한 예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이후로도 없지만요.

로또 복권에 맞을 확률이 팔백만분의 일이라고 하죠.

평생 벼락을 두 번 맞을 확률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왜 복권을 삽니까?

누군가 당첨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제자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믿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은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사람은 확신에 의해 움직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에 나오게 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2)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다녀도 믿음도 안 생기고 이렇게 시원찮게 믿을 바엔 차라리 교회를 끊자라고 신앙을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그렇게 안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차지하는 공간이 얼마나 큰지는 그걸 포기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의 사실을 잘 몰라서 확신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고 마음에 호의를 갖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믿음이 약한 것 같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호의가 있는 성도와 믿음이 쎈 것 같은 데 예수님에 대해 호감이 적은 성도가 있다면 전자가 더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늘 따지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하나님 주위를 맴도는 분들이 있습니다.

관심을 못 끊는 것이죠.

그래도 하나님이 계신 것 같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 믿음의 내용을 잘 몰라서 확신이 부족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잘 보면 이들이 낯선 예수님께 자기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계속 소개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끊지 못한 것이죠.

제자들의 말을 잘 보면 예수님을 부인하기 보다 예수님을 두둔하고 전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믿음은 끊으려 한다고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는 것이죠.

 

2. 예수님이 이 제자들을 찾아 오십니다.

1) 이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동행하십니다.

15,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 구절에서 동행하신다는 동사는 처음부터 계속되고 있는 동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이 슬픈 마음으로 짐을 챙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부터 계속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동행하시던 주님이 어느 순간 모습을 보여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내 믿음의 삶도 실망스러울 때 성도들의 걸음은 다시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걸음이 영원히 엠마오로 가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며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전에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진 몸과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도 이렇다고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눈이 가려져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되신 것도 있지만 그들의 눈도 가려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끔 눈이 가려질 때가 있죠.

그것은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서 사물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을 때입니다.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 확실했습니다.

부활의 가능성은 자연세계에서 백프로 불가능한게 확실했습니다.

그 확신을 벗어난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지시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성경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지금 시간까지 세 번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시몬 베드로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보면 제자들이 다 함께 모인 곳에 그 다음 나타나십니다.

사복음서에서 부활하신 부분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그야말로 우왕좌왕합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빈 무덤을 찾아가고, 여자들도 주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번 빈 무덤을 오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셨다면 이전 모습 그대로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당장 나타나시면 되죠.

대제사장 무리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시면 되죠.

그렇다면 각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절 기사가 이렇게 의문에 가득 차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미스테리하게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빤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왜 내 이해와 경험의 반경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시냐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내 아이디어나 하나님 아이디어나 똑같으면 그냥 내 뜻대로 살지 뭐하러 하나님의 뜻을 구해가며 살겠습니까?

 

, 부활하신 날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모두 없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먼저 들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두번째 주님을 보았던 베드로는 마리아에게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제자들 모두도 마리아에게와 베드로에게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는 원칙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은 먼저 본 누군가 증인의 입을 통해서 듣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엠마오의 두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식이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주님의 말씀과 성경으로 부활을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서 주님에 대한 예언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은 사람의 자연적인 이성으로 이해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성경 역사 이천여년 간 무수히 주님의 대속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고 근거와 논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걸 너무 모르면 대속과 부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다 모여있는 방에 나타나셨을 때도 똑같이 그렇게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들의 증언과 성경말씀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과 내가 부활하게 될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점에서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더 관심을 갖고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강권합니다.

 

4)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계속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차렸을 때 어땠습니까?

처음엔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실 때 즉시 주님을 알아봅니다.

마리아는 무엇을 통해서인지 몰라도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것이죠.

두 제자는 금방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뒤에 이렇게 서로에게 말합니다.

32,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처럼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은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이 제자들을 애정 어리게 대하십니다.

얼굴을 고쳐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인격입니다.

주님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주님 같을 수는 없습니다.

두 제자도 낯선 사람에게 점점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3. 이번에는 제자들이 더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더 가시려는이라는 단어는 더 가려는 체 하시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마음이 없지만 가시려는 체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붙잡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이죠.

주님은 감화하시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남의 강요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결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도 조금씩 주님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것으로 끝나면 그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다시 식어버릴 것입니다.

제자들은 길에서보다 자세히 말씀을 듣고, 식사를 나누고, 함께 숙박을 하기 위해 주님을 간절히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늘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살고 싶어지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주님과 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주님은 함께 음식을 드시며 떡을 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주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손님으로 초청했지만 주님은 식탁의 주인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내 마음과 내 가정에 초청하면 주님은 기꺼이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의 모습이 옛날처럼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눈이 밝아져서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것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 목격자의 증언과 성경의 계시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보지 못한 부활의 주님을 마치 본 것처럼 믿어지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상으로 보면 큰 믿음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에 기초를 잘 놓고 말씀에 의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믿음이 주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는 큰 믿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4.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제자들은 다시 세 시간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엠마오로 올 때의 걸음보다 더 급하고 힘찬 걸음이었을 것입니다.

밤이 이미 깊어가고 있었지만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잘 알고, 확신하는 믿음이 생기면 주님을 따르는 일에 지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주님처럼 부활해서 영생한다는 것도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다시 제자들의 공동체로 돌아갔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신앙에 실족하고 삶에 낙담하여 교회를 이탈하는 성도들을 주님이 찾아가셔서 다시 교회로 데려다 놓으시는 그림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조직적으로 장악한 이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서 혼자는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함께 악을 대적하고 함께 세상을 위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오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하고 한 사람은 익명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따랐던 여인들 중에 글로바의 아내가 있습니다.

둘이 부부이었을 것이고 부부가 주님께 충실했다는 걸 알 수 있죠.

성경에 글로바에 대한 행적은 더 이상은 없습니다.

글로바의 아들 시몬이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는 전승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글로바의 이름을 밝힌 것을 보면 성경이 기록 될 즈음에 글로바는 기독교 공동체들에서 다 알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 글로바가 주님의 명령에 충실히 증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주님을 위한 일군을 세우는 임직식을 시행합니다.

일군은 무엇보다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을 통해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로 알고 사는 것과 내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차원이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소모되는 게 아니라 영원한 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임직하는 분들과 모든 성도님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잘 배우고 믿어서 진정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