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고난주간 설교 누가복음22장54절-62절 (베드로의 통곡)

남수연 2022. 4. 11. 17:05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실 때 군중들이 종려가지로 메시야의 입성을 환영한 데서 이름 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십니다.

이 주간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의 성만찬이 있고, 겟세마네기도가 있고, 거기서 체포되어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화입니다.

교회 안 나오는 분들도 거의 다 이 이야기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믿었고, 예수님께 헌신적이었던 베드로가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것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지와 주님의 그 사랑을 잘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그날 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린 것은 그들에게도 미스테리입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자기가 예수님을 버릴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거란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마 했던 일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자 제자들은 침통했습니다.

결국 겟세마네동산으로 성전 수비대를 데리고 온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체포되어 끌려가십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던 그 의지할만한 모습은 아니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하셨으니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간데없고 베드로만 끌려가신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라 갔다고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제자들과 베드로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베드로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앞에 있는 31절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있죠.

1)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하냐고 물으실 때 정확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었죠.

베드로는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이 사실에 대해 확신했습니다.

이 위기만 넘기면 곧 하나님나라를 얻게 될 텐데 도망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릴거라 말씀했을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저를 뭘로 보십니까?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다릅니다.’

베드로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베드로를 알고 계셨습니다.

성도님들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전에 1박2일에서 김종0민씨와 나인0우씨가 한 팀이 되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미션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종0민씨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소개하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나를 잘 모르겠어, 너는 너를 잘 알아?’

그랬더니 후배 나인0우씨가 ‘어,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형도 그래요?’

서로 자기를 잘 모르겠다는 닮은 꼴 케미로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잘 안다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들이 뭔가 좀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엔 사람들이 자기를 잘 모릅니다.

사람이 왜 자기를 잘 모르냐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게 나인 줄 알고 사는 데 내면에 그것과 다른 뭔가가 자꾸 예측 못하게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요.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죄의 뿌리를 보고나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베드로는 자기도 잘 모르는 자신을 과신하며 충성을 다짐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실체를 사탄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이 당돌한 요청을 했다고 하죠.

가룟유다 안에 들어가 이미 예수님이 붙잡히실 함정을 제대로 파 놓은 사탄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이미 점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 듯 하려고 예수님께 요구했다’고 하죠.

이것은 예수님이 마지막 때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해 키질을 하시겠다고 하셨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사탄이 제자들을 키질 좀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보나마다 다 나가 떨어질거라는 자신감을 뽐내는 것이죠.

그리고 사탄의 예측대로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것이고,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다 뿔뿔히 도망칠테니 이번에도 하나님의 구원시도는 또 실패할거라 자신했겠죠.

그러나 이번은 구약백성들을 상대했던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사탄은 몰랐습니다.

제자들의 실패에 승리를 자축했지만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통해 죄인들 위에 군림했던 사탄의 견고한 나라를 뿌리채 뽑으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이 그 밤엔 아직 하나님도,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가룟유다라도 자기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거라는 걸 몰랐었습니다.

예수님과 3년여를 함께 먹고 마시며 보고 배우고 훈련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지만 그들의 눈에 영적 실상은 아직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 중에 태어난 죄인들의 본모습이고 한계인 것입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히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 신자들 중에도 ‘나는 하나님을 믿어’라고 자신을 믿는 것일 뿐 정작 하나님은 잘 모르고 하나님 자신은 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내세보다 현세가 더 크고, 영생보다 목숨이 중요하고,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가 틀어쥐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이 되면 불확실한 하나님 대신 스스로 살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큰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현재 그런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날 밤 군인들이 몰려왔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도망간 게 아닌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사람들이 맞서 싸우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군인들이 죽기 위해 싸웁니까?

안 싸우면 죽기 때문에 살려고 싸우는 것이잖아요?

아무리 승리의 확률이 희박해도 전쟁에서 안 싸우면 그나마 다 죽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피하고 도망칠 수 있다면 당연히 목숨을 위해 도망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나 하나면 충분하니 이 사람들은 가게 놓아 두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도망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망쳐 살 길이 있는 데 왜 맞서서 싸우다 죽겠습니까?

그것을 시작으로 베드로의 배신이 점점 더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조금씩 가까워져야지 한걸음씩 뒤로 물러가는 게 위험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가신 대제사장의 집까지 주님과 거리를 두고 멀찍이 따라갑니다.

의리 하나는 자신했던 베드로이기에 그렇게나마 하는 게 베드로다운 것이 맞겠죠.

어떻게 베드로가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요한복음에서 설명합니다.

제자 중 한 명이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 베드로를 데리고 같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제자는 당연히 그걸 기록한 요한사도죠.

요한사도의 집은 갈릴리에서 상당한 규모의 어업을 하고 있었고 전승에 의하면 대제사장 공관에 생선을 납품했었다고 합니다.

앞에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이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면 두 아들에게 좌우에서 예수님을 보필할 요직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청탁은 재력과 인맥으로 뒷받침을 할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반장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은 잘 사는 집 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애가 반장되면 담임선생님도 싫어했습니다.

없는 집 아이들이 멋모르고 반장 달고 집에 오면 어머니들이 그런 건 뭐하러 했냐고 역정을 내셨죠.

아마도 베드로가 종종 요한과 야고보와 다투었던 것이 부자 동료에 대한 견제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명문가와 잘 아는 요한사도 덕분에 베드로가 대제사장 뜰까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요한사도는 안뜰까지 드나들 수 있었기에 예수님이 심문당하고 모욕을 당하시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성경으로 전해 줄 수 있었던 것이죠.

베드로는 대제사장 사람들과 함께 조심스레 모닥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닥불 앞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드러나며 사람들이 알아보게 된 것이죠.

게다가 그 중 겟세마네에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는 것을 직접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살기 위해 다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는 것이죠.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점점 강경하게 마지막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닭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걸 보면 참 신묘하다는 생각이 들죠.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잖아요?

그 부분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네가 세 번 부인하기 전에는 닭이 울지 않을 것이다 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동네에 닭이 한 두 마리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기 전까지 한 마리도 울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통제도 하고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지면 한 세겔 짜리 동전을 입에 문 물고기가 잡힐 것이니 그걸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것도 이런 신묘한 일입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늘 극적인 개입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상황이 뒤집어지고, 우리 기도가 극적으로 응답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응답이란 것이 흐르는 물줄기를 돌려 놓는 것이고 상황을 뒤집어 놓아야 되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닭이 울죠.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닭울음 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순간 베드로가 안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예수님도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응시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눈빛에 베드로가 와르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밤새 후들거리는 무릎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정신을 곶추세우고 있었잖아요?

그러나 어느새 자기 입술은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있었고 주님은 그 순간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베드로와 마주친 예수님의 눈빛이 어떠셨을까요?

평소 베드로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눈빛이 그렇잖아요?

동정하시는 눈빛, 격려하시는 눈빛, 엄격하게 타이르시는 눈빛, 언제나 든든한 눈빛.

예수님의 눈빛이 베드로를 질책하는 눈빛이었다면 베드로는 자존심이 상해 나가서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 년을 보아왔던 주님의 평소의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맥이 풀리며 무너졌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예전과 똑같이 보시는데,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구나.’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은 비열한 짓을 한 자기에 대한 좌절과 회한의 눈물이었지 예수님께로의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도,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 결단해도, 주님을 부인하는 나를 자책하는 눈물을 흘려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베드로는 다시 고기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갔잖아요?

위기 앞에서 뜻밖에 자기의 본모습을 본다 해도 오히려 좌절감만 들고 자포자기에 빠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3. 이 사건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셨던 수많은 그림들 중 가장 마지막 그림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본성으로 예수님을 믿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베드로처럼 자기 본성에 제압 당합니다.

자기애와 독립심, 안전을 추구하는 본성이 그만큼 질기고 강력한 것입니다.

위기라고 생각하면 하나님 그 이상이라도 버리고 자기 살 궁리를 합니다.

이 타고난 몸둥아리를 가지고는 절대로 피조물이 지녀야 마땅한 분수에 맞게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삼년 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자신을 다 보여주고, 제자들을 양육하셨고, 제자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으로 안되잖아요?

그걸 이 마지막 밤에 졸업을 앞둔 제자에게서 보니 허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타고난 죄성은 고칠 수가 없기에 다만 용서받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죄를 대속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원칙은 이미 구약성경의 제사법을 통해 확보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섬길 마음, 새 영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시고, 꼭 십자가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다른 아무 것으로도 사람의 죄성과 하나님에 대해 원수진 것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경계선을 통과한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비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베드로가 됩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오늘 여종의 추궁에도 무서워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공회에 붙들려 갔을 때 대제사장이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하지말라고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4장19절, 20절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목숨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부활의 믿음이 강해진 것입니다.

오픈도어선교회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난 해 기독교신앙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사람이 6천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전부 목사나 전도사가 아니라 그냥 성도들입니다.

지난 해 텔레반 정부가 들어온 아프카니스탄, 군부가 장악한 미얀마, 보코하람의 공격을 받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총칼 앞에서 ‘나 예수님 버리고 마호메트, 부처를 믿겠다’고 말하지 않아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수년 전 미국의 오리건주 대학 강의실에서 열세명이 죽고 이십명이 부상을 당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강의실에 뛰어든 범인은 학생들을 한명씩 붙들고 너 크리스천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면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베드로처럼 부인했다면 살았을 것인데, 부인하지 않아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장 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느 상황 속에서도 부인하지 않게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에게 물어보면 알거예요.

만일 누군가 내게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당신 예수를 믿냐고 물을 때 ‘맞아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요’

그렇게 말하실 거잖아요?

아무렴 ‘아니, 나는 예수님 안 믿어요’ 라고 말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생각나는 이 창피한 과거를 감추고 싶었을까요?

그렇다면 자기만 아는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비밀로 했겠죠.

베드로에게 이 이야기는 간증입니다.

‘삼년 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나를 미리 알고 계셨고 이미 용서하고 계셨다.’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죽어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할 나를 고치셔서 아버지께로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성도들에겐 다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에게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전이든 후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을 믿도록 기도하고 시험에서 실패하지 않길 기도할 때 주님께서 도우십니다.

기도로 인생의 위기를 넘길 수 있지만 평생 기도로 점점 예수님의 사랑과 그 귀하심을 인격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을 믿고 난 뒤부터 정말 많은 은혜와 복을 받았더군요.

이제 더 많은 걸 주신다 해도 그걸 누릴 힘도 점차 없어질거라는 걸 주변의 노인들을 보면서 느낍니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 가득 뿌듯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아무리 가진다 해도 세상 것들은 금방 물리고 권태롭습니다.

맛집도 몇 번 가고나면 더 이상 우리 입맛에는 맛집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누릴 때 삶도 물리지 않고 질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화사하게 핀 벚꽃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예수님을 누리고, 연두빛으로 덮여가는 나무들을 보며 예수님을 누립니다.

죽음을 앞둔 침상 위에서도 창밖 푸른 하늘을 보며 저는 변함없이 예수님을 충만한 기쁨으로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청년의 때 예수님을 알고부터 손에서는 성경을 놓지 않았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님들에게도 이런 복을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이제 성찬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떠올리면 그 참혹함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떤 영웅적인 죽음도 주검 자체는 초라하고 참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도 그러셨습니다.

그렇게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기에 그 누구도 나를 위해 해 주지 못할 일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십자가 사랑과 부활을 베드로처럼 경험으로 믿고 성령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