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8장4절-15절 (씨뿌리는 비유)

남수연 2022. 1. 11. 17:37

https://www.youtube.com/watch?v=dstYnpziH8I 

새해 두 번째 주일입니다.

1월에는 사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올 한 해 믿음의 삶을 잘 계획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는 우리의 일부가 되다시피 한 염려의 문제를 두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누었죠.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기로 했습니다.

구제, 기도, 절제를 우선시해서 성실히 살아갈 때 올해도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백배로 결실하는 밭에 대한 말씀입니다.

장사를 하던 투자를 하던 두 배만 남겨도 대단한 데, 백배의 결실이라니 엄청나죠.

그런데 여기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천국 말씀을 듣고 결실을 맺는 밭은 네 가지 밭 중에 단 한 개의 밭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결실하는 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꼼꼼히 살펴보며 올해 우리의 삶에 결실이 풍성하기를 힘쓰는 모두가 되어 봅시다.

 

1. 씨 뿌리는 비유의 전체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알려주시고 그 곳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누가 하늘나라를 알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대속의 생애를 시작하시며 계속 이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씨앗을 파종하고 수확하는 일상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설명해 주십니다.

농사를 지을 때 파종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땅을 파고 씨앗을 하나씩 구멍에 넣어주는 방식을 점파라고 합니다.

돌산 갓이나 상추, 치커리 같은 작은 씨앗들은 밭을 부드럽게 갈아 놓고 흙 위에다 흩뿌리고 나서 쇠스랑으로 전체에 흙을 덮는 산파의 방식으로 씨를 뿌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흩뿌리는 산파 방식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특히 이스라엘의 지형은 돌이 많고 평야 같이 넓은 농토가 많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박혀있는 암석을 피해서 농지를 개간하다 보니 사이사이에 농사가 안 되는 돌밭 같은 땅들이 붙어 있게 됩니다.

작은 씨앗들을 휘휘 흩뿌리다 보면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농사가 힘든 돌밭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밭 두덩에 무성하게 자란 가시떨기 사이에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밭에서는 씨가 결실을 하지 못했고, 마지막 네 번 째 좋은 밭에서만 씨가 백배의 결실을 얻었다고 비유로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4절을 보면 벌써 소문이 자자해진 주님을 보기 위해 각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당에 모여서 종교지도자들에게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율법을 배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방법은 유대교 랍비들과 많이 다르셨죠.

성경에서 시작하기보다 오늘처럼 실생활에서 비유가 될 만한 것들을 가져와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나라를 알려주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특이한 설교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뒤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8절,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외치셨다는 뜻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비유 안에 뭔가 비범한 진리가 들어 있나보다 라는 경계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들을 귀’는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에 더 집중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7장을 보면 당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심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16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런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 온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이미 신뢰감으로 호응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반드시 말씀 씨앗이 담겨져 결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귀를 열고 받아들이면 반드시 결실을 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이미 앞 장에서 예수님은 똑똑한 바리새인들과 한바탕 논쟁을 하고 난 뒤입니다.

여전히 그들이 예수님을 트집 잡기 위해 뒤 쫒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농사짓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비웃었을 테죠.

‘학벌이 없다더니 설교 수준이 진짜 들을 게 없군’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일갈하시는 대사를 날리시죠.

10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일부러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한다는 것 같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럴 것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말씀을 수용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신 것이죠.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더 설명하십니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 왜 못 알아들을 비유로 말씀하냐면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안 듣겠다고 눈과 귀를 막았으니 하나님도 고쳐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시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엔 네 가지 마음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택하신 한 사람만 구원의 결실을 맺는다 이러려는 말씀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너는 내가 택하지 않았으니 쓸모없는 밭이고 말씀을 들어봤자 소용없어’

이렇게 말씀하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밭의 비유는 천국 복음을 듣는 사람의 책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선택하신 사람이 결국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갈아엎어야 할지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성경은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니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선 항상, 듣고 믿으라고 합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도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엄중하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다시 해석해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씨와 백배의 결실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죠.

비유에는 당연히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평범한 내용으로 비범한 사실을 쉽게 설명하는 면이 있지만 말하는 사람의 해석이 없다면 속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바로 해석을 덧붙여 주십니다.

11절에서 농부가 뿌린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죠?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나서 참 좋다, 내 마음에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이런 것도 귀하지만 그것 이상입니다.

말씀이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질 때 엄청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죠.

베드로전서1장23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5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고 믿은 결과로 백배의 결실을 했다고 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결과로 얻은 구원이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만 했는데 나중에 얻을 천국은 이 믿음을 위해 수고한 것에 비해 백배의 결실만 되겠습니까?

2) 천국이 아닌 이 땅에서 얻는 결실도 이미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는 장차 영생을 얻을 부활을 약속받았고 이미 영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이 죽은 상태로 하나님도 내세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하고는 백배 차이만 나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고 가난하고 대단치 않은 지위나 형편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이 생명이 있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어깨를 늘어뜨릴 필요가 없습니다.

3) 구원받은 우리의 인격은 또 얼마나 큰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까?

무지하게 태어나서 하나님을 아는 이 엄청난 지식과 나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완전한 새사람이 된 것이죠.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지은 죄와 앞으로도 죄 지을 가능성이 이렇게 엄청난 것인지 몰랐습니다.

사람이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본죄의 상태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값진 백배의 결실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이해 못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내 심판과 내 죄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시는 뒷모습에 눈물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죠.

4) 또 예수님이 이뤄 놓으신 구원의 복음은 우리를 통해서 전해지고 하나님나라의 종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한다 해도 그 역시 백배의 결실을 얻게 되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서 얻는 결실이 무한 백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땅이 되어 이 복된 결실을 얻으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렇다면 씨가 뿌려진 네 가지 밭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길가에 떨어진 씨는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혀 기경이 되지 않은 밭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오로지 타고난 본성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엔 이랬습니다.

길이 그렇듯이 이런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하루 종일 들락거리고 점점 더 세속적 사고방식이 굳어집니다.

길 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너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그런 말은 완전 다른 세상이야기지 나와 상관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지도 못합니다.

어쩌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해도 마음에 담기질 않죠.

오늘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섬뜩한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에 들려진 천국의 말씀은 마귀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아둬야 생각이 나는 데 아예 구원받지 못하도록 들은 말씀을 도둑질 해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순간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세상적인 사람들도 좋은 밭이 될 희망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 그런 밭에서 좋은 밭이 되었잖아요?좋은 밭이 되는 방법은 계속해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죠.

4장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길 가 밭이 좋은 밭이 될 유일한 희망은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성령님이 그 말씀을 통해 세속적으로 고착화 된 가치관과 영혼을 조금씩 쪼개어 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나에게도 아무리 전도해도 듣지 않는 사람에게도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로 좋은 밭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바위 위에 떨어진 씨도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마태복음을 보면 흙이 얕게 덮인 돌밭이라고 합니다.

씨가 떨어지면 싹은 틔우지만 밑에 바위에 막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결국 해가 뜨겁게 내리쬐면 말라 죽고 결실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해석은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깊이와 결단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한 때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련이나 시험의 바람이 얕게 덮은 흙을 불어 버리면 자기가 여전히 신뢰하는 돌처럼 단단한 기반이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것이죠.

이런 성도들은 세상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치평가가 완전히 계산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믿고 난 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믿음의 진실성과 엄중함을 요구하시며 한 사람이 망대를 짓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망대를 짓는다며 예산을 계산하지 않고 시작만 했다가 돈도 떨어지고 힘도 빠져서 결국 건축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 돌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다 이해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하나님나라의 가치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인해 갈등이나 실망이나 위기가 오면 결국 믿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3)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도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대다수 성도들의 마음의 상태가 아마도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믿음이 웅장하지 못하고 항상 빈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니겠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현 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기는 염려에 빠져 믿음의 기상이 뻗어가질 못하는 것이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실질적으로 의지하기에 재물에 매여 전전긍긍합니다.

작년에 미국 퓨리서치에서 선진국 17위의 나라들을 상대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이 질문에 모든 나라가 가족을 첫 번째로 들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만 유일하게 경제적 풍요를 일순위로 꼽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구나 경쟁적으로 돈을 더 벌려고 기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세상 향락의 가시덤불도 고상하고 거룩한 믿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가로막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대단하게 세상의 쾌락을 즐기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해 줄 세상의 아이템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세상 아이템들이 많잖아요?

스포츠나 TV나 인터넷 매체들이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주 금방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고 계속 그 즐거움을 다시 찾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은 거기에 비하면 얻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배달음식처럼 자극적이고 인공조미료 맛처럼 금방 입맛을 사로잡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행복은 한 국자 먹으려면 밤새 우려내야 하는 사골 국 같다고나 할까요?

세상이 주는 매력과 한방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것 대신 믿음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나마 주일에 유흥과 휴식과 취미활동을 찾지 않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만도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면 이건 완전 불가능이예요.

일주일 세상살이에 온몸을 송두리째 절였다가 그래도 주일이 되면 다시 하나님 생각을 하게 되고 다시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유형의 밭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기 전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옥토로 태어난 게 아니고 이런 밭으로 태어났잖아요?

당연히 우리 본성과 죄의 성향 속에 이게 남아있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세상적인 판단으로 모든 게 보이고, 짜증나고 마음대로 안 되면 믿음도 다 집어 치우고 싶은 것이고, 염려에 사로잡히고 돈에 집착하고 세상 재미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죄의 가시떨기는 점점 무성해집니다.

세상을 따라잡고 싶은 데 잡혀주지는 않으니, 세 가지 밭의 마음으로 사는 게 괴롭고 힘든 거예요.

우리 마음이 이런 상태에 놓이지 않도록 관리해 백배의 결실을 맺으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관리해 나가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네 번째 밭의 상태가 변화된 성도의 마음입니다.

네 가지 상태가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 마음을 이 네 번째 상태에 둘 수 있어야 백배의 결실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결실을 냅니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좋은 밭이 되게 해주셔서 백배의 결실을 주셨다는 데 메시지의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받은 말씀이 결실하기 위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 가지 마음 밭은 언제나 세상을 더 받아들입니다.

우리 마음이 강하게 원하는 것은 육체와 세속의 것들입니다.

그것에 치중하고 만족하게 채우려는 마음을 조절해야 말씀을 품고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마음 상태가 유지됩니다.

육체의 욕심의 가시떨기를 무한정 키우면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는 신앙을 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게 결코 행복하지도 않고, 그걸 다 채울 수도 없고, 세상적으로만 이룬 것을 성경은 결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밭을 잘 가꿔가려면 세상에 대한 내 욕구에 대해 좀 모자란 상태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월급이 사백만원이면 만족하겠지만 삼백만원에서 만족하자는 것입니다.

사람관계도 너무 입맛에 맞게 하려고 말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해야 탈이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다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나쁜 밭을 갈아엎는 좋은 방법입니다.

현재 주시는 정도에 자족하고 대신 기도와 말씀 같이 신앙생활을 통해 만족감을 채워가는 것이 좋은 마음 밭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먼저 살펴보았던 그 백배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깨닫고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올해도 좋은 것을 결실하려면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세속적인 가치관, 얕은 제자도,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세상에 더 큰 애착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주류를 이루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천국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 천국의 가치를 알고 끝까지 따르는 것,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모든 것들을 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 이런 마음 밭을 항상 갈아엎어야 합니다.

자극적이고 유쾌하고 짜릿한 한방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받는 한 스푼의 은혜는 더 평안과 든든함과 자존감과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마음에 품고 그것이 내 인격과 삶에서 결실로 나타날 때까지 지키고 인내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쭉정이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되겠죠.

오늘 네 마음 밭에서 가시덤불을 걷어 내라는 말씀을 받았다면 염려의 가시덤불, 세상에서 끊지 못하는 향락과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정없이 갈아엎고 받은 말씀대로 지킬 때 백배의 결실을 할 수 있습니다.

힘들겠지만 계속 이 싸움을 해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서 함께 해 주십니다.

잘했다 주시는 칭찬과 상급도 삶에 넘칠 것입니다.

올해 이 결심을 굳게 해 좋은 밭을 가꾸고 말씀대로 지키며 행복한 열매를 많이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