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마지막 유월절, 첫 성찬 (누가복음22장7절-20절)

남수연 2023. 4. 12. 03:49

https://www.youtube.com/watch?v=sLej7sAe3PQ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십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기대한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한 데서 붙여진 절기입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전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 양을 잡고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예수님으로 인해 로마로부터 독립할 제2의 유월절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최고조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져 목요일 밤 체포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유대의 하루 개념은 해질 때 시작해서 다음날 해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체포와 사망은 유월절 하루에 다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생애 클라이막스인 십자가 대속과 주님의 성만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때 성령께서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구약시대 유월절 속에 암시되었습니다.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풀려난 해방절입니다.

지금도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공휴일이고 올해는 46일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풀어주지 않는 애굽을 열가지 재앙으로 징벌하시죠.

마지막 재앙이 잘 아는 대로 장자가 죽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재앙 전에 이스라엘에 의문의 의식을 명령하십니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틀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날 밤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넘어가고 피의 표시가 없는 애굽인의 장자들을 죽입니다.

유월이 한자어 넘을 유, 넘을 월입니다.

이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바로가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풀어주고 드디어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약 교회시대의 우리는 그 유월절의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죠.

그런데 구약시대 이스라엘사람들은 그 답을 모르고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말하자면 문제지만 받았고 답은 몰랐던 것이죠.

우리는 그 답이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문제와 답만 외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려운 방정식의 풀이 방법을 모르고 문제와 답만 아는 것 같은 것이죠.

그것도 똑같이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잘 공부해서 문제와 답을 같이 알아야 합니다.

신구약성경으로 문제를 잘 풀어서 답이 딱 나왔을 때 얻는 그 기쁨과 믿음에 대한 큰 확신은 세상에서 얻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예표하던 유월절과 대속의 관계를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제자들도 아직 문제만 알고 있지 정답을 모르는 상황인 것이죠.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신 것은 주님이 바로 그 유월절 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천 오백년 동안 무수히 죽어간 어린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유월절의 베일이 벗겨지니 그곳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교육을 잘 받았고 그 후 교회에서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대신 오늘 주님께서 다시 명령하신 성만찬이 지켜진 것이죠.

7절에 무교절이라는 말이 나오죠.

하나님은 유월절에 이어서 일주일간 누룩으로 발효시키지 않고 구운 딱딱한 무교병을 먹는 절기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대속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순서를 보면 무교절이 먼저가 아니라 유월절이 먼저입니다.

유월절 양이 먼저 죽어 죄를 용서하신 뒤, 죄를 상징하는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성화의 삶이 평생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라고 신구약성경은 가르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평생 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2. 성만찬의 장소가 준비되는 과정이 8절부터 13절까지 자세히 나옵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전국에서뿐 아니라 외국에 살던 교포들까지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십만여 명이 예루살렘을 찾았다고 합니다.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 내에서 방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예수님도 낮에는 성전 안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성 밖 감람산에서 주무셨습니다.

감람산을 조금 올라가면 예수님이 주로 찾으시던 겟세마네 동산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감람산 전체에 올리브나무가 덮였다는데 제가 갔을 때는 겟세마네 동산에만 약간의 감람나무가 남아 있더군요.

그중 수령이 이천 년 이상 된 고목이 몇 그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지켜보았던 나무라고 생각하니 남달라 보이더군요.

8절을 보면 예수님이 아마도 감람산에 계신던 중 베드로와 요한에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디서 명절 준비하면 좋겠냐고 주님께 묻죠.

예루살렘 성안에 갑자기 먹을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미스터리한 방법으로 만찬 장소를 마련하게 하십니다.

무작정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옮기는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가 그 집 주인에게 이렇게 말해라.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집주인이 준비된 큰 다락방으로 안내할 테니 거기서 우리가 함께 먹을 준비를 해라.

예수님이 제자들 모르게 식당을 예약하신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약 장소를 그냥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면 되는 것이죠.

이런 물동이 작전 같은 건 필요 없었겠죠.

예수님이 제자들 모르게 혼자 가셔서 방을 예약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그 주간에 계속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지내셨거든요.

그 집 하인을 만난 방법도 미스터리입니다.

시간 약속도 없이 무작정 성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시잖아요?

누가 물동이를 놓고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나가면 반드시 성 안 어디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는 것이죠.

그리고 하인을 따라갔더니 정말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백프로 사전 예약 없이 신비하게 이뤄진 일입니다.

1) 이것은 주님의 유월절 식사를 남몰래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주인에게 선생님이 보내셨다말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집주인은 평소 예수님을 잘 알던 사람입니다.

교회 전승에 알려진 바로는 이 다락방은 마가의 집 다락방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며 성령강림을 기다렸죠.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이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제자들 외에 미상의 청년이 동행한 것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가잖아요?

그 당시에 대해 마가가 이런 특이한 기록을 남깁니다.

마가복음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제자가 아닌 한 청년이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그 어두운 동산에서, 제자들은 다 각자 도망가기 바빴을 텐데 청년이 그런 모양새로 도망간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 청년이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죠.

마가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하고 겉옷 대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를 아시죠?

바나바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목매어 죽은 가룟 유다 대신 사도 보궐선거를 할 때 맛디아와 함께 후보로 올랐던 사람입니다.

마가가 바로 이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일찍이 마가의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죠.

다락방을 내 준 주인은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과 달리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출교하고 주님을 죽이려 했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누구 집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실지 몰라도, 주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에 연회석을 준비해 둔 것입니다.

손님을 모시려면 유대인의 정결례에 따라 발 씻을 물도 준비해야 했겠죠.

물동이를 운반하는 남자가 손님이 씻을 물을 준비하러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잖아요?

이렇게 복음서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주인이 주님을 모시고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객실을 정성껏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확실치 않아도 혹시나 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은 진짜 마음입니다.

엄마는 자식이 늘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밥솥에 밥을 남겨둡니다.

요즘은 햇반이라도 준비해 두죠.

전에 정옥금권사님이 영규 형제 늦게 오는 걸 알면서도 밥을 자꾸 남겨 놔서 찬밥이 된다는 말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주님은 다락방 주인의 헌신을 받으시기 위해 거기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와 첫 성만찬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을 보고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2618,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주님이 내 집을 찾아오셔서 식사를 하시는 게 영광입니까, 아닙니까?

이전에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영광을 도저히 감당하지도 못하겠다고 말했잖아요?

2) 오늘 이 내용이 소상히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 주님은 간절히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유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에게 부탁해도 자리를 마련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준비한 무덤까지 예수님께 내드렸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이 다락방 주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면 이 성찬식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2) 하인을 만나게 하신 신비한 방법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다락방 주인의 준비를 아셨다면 그냥 제자들에게 그 집을 가르쳐 주셔도 되었는데 안 그러셨단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또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갔을 때 정말 마련된 연회장을 주인이 보여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초자연적인 기술을 쓰셔 가며 이 연회석이 준비된 것을 제자들이 보게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앞으로 복음을 전하고 성만찬을 전파하는 모든 일에 주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묘하다 싶을 만큼 여러 상황들이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도 응답을 종종 경험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우리 눈에는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하시고 어떤 일이 이뤄지게 하실지 다 계획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끌어다 맞추시는데 전문가십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께 물으면 됩니다.

주님, 어디서 준비할까요?

주님, 이 일을 위해 지금 제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은 물동이를 인 사람들을 예비하십니다.

우리는 그 물동이들의 사인을 따라 계속가면 주님이 준비하신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3. 14절부터 20절까지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성만찬을 제정하십니다.

이 성만찬의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우리도 어딜 떠날 때 친한 사람과는 밥이라도 한번 더 먹고 헤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은 우선은 인간적인 정으로 이 마지막 식사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우리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이시지만 우리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십니다.

누가 날 이 정도로 사랑해 주겠습니까?

우리 신앙이 자꾸 힘을 잃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데 왠지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알아야 할 것은 기대하고 노력하지 않는 데 저절로 주시는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믿음 이외에는 모든 것이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종일 세상살이에 매달려있고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님도 어떻게 갑자기 십자가의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는데 그러시는 건, 너무 뜬금없으시잖아요?

믿음의 성장도, 은혜도, 축복도 내가 준비하고 노력한 만큼 주십니다.

우리 관심과 노력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야 사랑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받을 중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잖아요?

만일 이 사랑이 없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손에 못이 박히고 찢기시고 피흘리신 그 죽음을 생각할 때 송구하고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삽니까?

내가 한 것도 없는데 그런 큰 복을 누리게 된다면 늘 신세 지고 사는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게 이 구원의 동기였다면 다르죠.

사랑 받아 보셨잖아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게 느껴지고 그 사람 앞에서 자유롭고 만족스럽습니까?

눈치 보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늘 속 썩이면서도 우리 앞에서 당당한 게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천국에서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만 하시는 게 천국이 아니라 사랑해주시니까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지금도 여러 가지로 알고 깨닫지만 가장 분명한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이 땅에서도 조금씩 더 알아가고 믿어지고 은혜로 경험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랐던 40년간 모든 것이 점점 더 만족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에 좋은 것들을 계속 베풀어 주시는 것을 누리며 삽니다.

건강이나 소유가 더 넉넉해져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제 소원은 세상 어떤 편의나 풍요로 인한 기쁨보다, 예수님의 사랑이 더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입니다.

건강이나, 성공이나, 살림살이나, 사람 관계에서 받는 기쁨보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커지길 계속 원합니다.

그래야 돌변하는 생활의 조건들과 상관없이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잖아요?

우리 신앙은 하나님께로 부터 무엇을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받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 신앙이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해도 방향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 자신을 자꾸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그런 믿음을 갖게 되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이 유월절을 하나님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죠.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먹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잖아요?

포도주는 혼례와 같은 큰 기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내일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의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 속에서 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기 위해서 다 받는 고난들이 있잖아요?

주님은 그 사실이 안타까워서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는 주님 자신도 기쁨을 유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하며 살아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 삶에 예수님이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대로 아직까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우리를 지원하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이 성찬에서 나누는 포도주와 떡의 의미입니다.

19,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구약시대는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매년 갱신했습니다.

율법은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흘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내 죄를 속죄하셨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안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을 잡고 문에 피를 바를 때 애굽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엔 사망이 찾아갔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나와 내집이 예수님의 피가 보호하시는 안전한 가정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유월절을 지켰던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9,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교회가 지키는 이 특별한 성만찬 예식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무언가 처음 시초가 있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잖아요?

역사를 거슬러 뒤로 돌아가다 보면 이 성만찬이 처음 시작한 날이 바로 오늘 다락방의 식사와 주님의 명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계속해서 행하며 기념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이 매번 성찬을 다시 행함으로써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강력한 되새김이 되는 것입니다.

또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속죄하심이 우리 안에 실제로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행할 때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지금 내게서 유효하게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유월절 의식과 어린 양은 예수님의 대속의 예표입니다.

때가 되어 실물이신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찬식은 눈으로 보고 먹고 마시며 경험하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우리 안에 충만히 부어주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