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성탄절 설교 (누가복음2장1절-7절)

남수연 2021. 12. 21. 17:37

 

https://www.youtube.com/watch?v=HnpER9q91Xc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의 그림자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숨으로 성탄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아동성범죄자 조두순이 피습을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조두순집을 찾아가 흉기를 휘두른 가해자가 한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삶에 의미가 없다. 조두순을 응징하면 내 삶에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울부짖음 같이 들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매일 반복되는 고단함 속에서도 ‘주님, 아직 괜찮아요. 잘 견디고 있어요’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에서 세 가지 믿음의 내용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누가를 통해 전해 주시는 성탄의 지식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성탄의 은혜를 더 감사하고 복되게 하리라 믿습니다.

 

1. 첫째로 누가는 역사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의원 누가는 바울사도의 주치의였죠.

누가복음의 기록연대를 볼 때 바울사도는 이미 로마감옥에서 순교한 다음입니다.

아마도 이 즈음까지 살아있던 사도는 요한사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누가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잘 정리 된 예수님에 대한 일대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1장1절을 보면 왜 이 복음서를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을 믿게 된 한 이방인 고위관료의 믿음을 위해 이 복음서를 썼던 것입니다.

누가의 성격이 서두에서 나오죠.

이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원문대로 직역하면 ‘처음부터 정확하게 모든 것을 추적해 온 나도’ 라는 뜻입니다.

의사 누가의 논리적인 성격상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까지를 자세히 조사하고 추적해서 이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이죠.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당시에 실시되었던 인구센서스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다루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사람 데오빌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성육신, 부활을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먼저 받아들인 문화와 지식은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무속신앙과 유교, 불교 토양에 기독교가 들어왔기에 사람들 속에 자리 잡은 기독교 신앙에 많은 불순물들이 섞여 있습니다.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이 실제 사람으로 태어나서 호적에 등재되었던 분이심을 밝히는 것은 신화와 역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는 것이죠.

호적등본을 내밀면 그만이잖아요?

우리의 신앙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은 하나님을 저 멀리 초월적으로 계신 분으로, 마치 수소풍선이 하늘로 떠가듯이 올려 보내려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자다 환상을 보잖아요?

바로 자기 머리 위에 계단이 있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죠.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펼쳐져 있는 것을 봅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하나님의 보좌에 서 계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았잖아요?

우리의 영안을 여시면 지금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가 보일 것입니다.

누가는 신화적, 종교적, 초월적 신에 대한 생각을 호구조사라는 현실에 단단히 붙들어 맨 것입니다.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말합니다.

황제에 오르기 전엔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죠.

세계사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하시죠?

아우구스투스가 제위 한 뒤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식민지에 총인구조사를 명령한 내용은 세계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2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당시 이스라엘을 포함한 수리아 지역은 총독 구레뇨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구레뇨는 세계사의 인명으로는 퀴리니우스입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의 이름들도 그렇고,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쓰는 말과 다르게 음역한 것이 많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성경 역사를 세계사 연대 속에 배치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떨어지니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고향에 갈 수 없어 호적에 이름도 못 올리고 살았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누가의 의도대로 우리도 예수님을 베들레헴 관청에 호적되어 있던 역사 속의 주님이심을 항상 확고히 하시길 바랍니다.

세상 역사는 예수님을 점점 가상의 인물로 역사 속에서 지워가고 신화화 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본문에서 누가가 전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성경으로부터 예언되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긴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잘 알아보도록 구약성경에서부터 끊임없이 가리키고, 가르쳐 왔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은 그만큼 다릅니다.

4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절,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이 구절도 직접 구약성경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녹아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다윗의 족보’에 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잖아요?

성경은 죄의 기원과 인간의 타락과 심판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인간을 구원하실 구원자가 올 것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구원자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되죠.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자손 등으로 점점 포커스를 좁혀 메시야로 오실 그 분을 지정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면 이 구약의 많은 예언들과 정확히 일치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 자격 중에 하나가 바로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자손’은 사무엘하 7장에서 정해진 구원자의 특정한 일면입니다.

사울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다윗은 평화시대를 맞이하죠.

자신은 좋은 궁전에 살다보니, 여전히 장막 안에 모셔 있는 법궤를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섬기고 싶은 거예요.

다윗의 이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하7장,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왕상8장18절,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대신 너의 그 마음이 나를 기쁘게 했기 때문에 너와 이런 언약을 맺겠다고 하십니다.

삼하7장11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너를 위하여 네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배하는 교회를 세우려는 우리 모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똑같으십니다.

‘네가 내 교회를 세우려는구나, 그 생각이 네게 있는 것이 너무 좋구나. 내가 네 집을 세워주겠다’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시길 또한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집과의 특별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그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언약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곧 이뤄질 계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전을 말씀하실 때는 항상 성전 되시는 예수님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실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세우신 성전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다윗과 맺은 언약이고, 다윗시대의 영광을 가져올 인물을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은 모든 후손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럽던 시대는 다윗왕 때죠.

이후 주권 없는 수욕의 역사를 살며 이스라엘이 항상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다윗 왕조의 영광과 번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영광을 다시 가져다 줄 약속의 인물 그 ‘다윗의 자손’을 대망하게 되었던 것이죠.

메시야인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집 후손이라는 걸 알 수 있죠.

5절, 그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요셉 뿐 아니라 마리아도 함께 호적하기 위해 다윗의 동네를 찾은 것입니다.

만삭의 마리아가 굳이 먼 길을 동행했던 것은 유대법과 다른 로마법에 따라 여성도 호적을 하도록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태어나실 예수님을 함께 족보에 올리려 했겠죠.

그래서 마태는 요셉의 족보를 갖고 있었지만, 누가는 이때 호적한 마리아의 족보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요셉의 족보가 아니라 마리아의 족보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여성인 마리아의 이름 대신 남편 요셉의 이름을 썼지만 그 족보에 나오는 이름들이 마리아 쪽 조상이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유력한 견해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베들레헴 관청에 가서 이 낯선 마리아의 족보를 확인하고 적어 오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요셉의 양자로 법적인 다윗의 자손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혈통적으로도 실제 다윗의 자손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져 요셉이 이릅니다.

누가복음 마리아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 이어져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 이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제가 단지 세금 더 걷으려고 시행했던 것이 인구조사입니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가 예수님 부모의 양쪽 가계도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남겨 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 해서 구원 받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의심의 세력은 문득 이런 마음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은 예수님의 양부인데, 피가 섞이지 않은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말씀을 꼼꼼하게 살펴서 얻는 성경지식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철통같이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렇기에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룻기에서 다윗의 고조부 보아스가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잖아요?

메시야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더 확고히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못 박기 위해 한 가지 예언을 성경에 덧붙여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미가서5장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예언까지 더불어 성취되려면 예수님이 반드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나셨다면 예언이 안 맞게 되죠.

황제의 인구센서스 명령이 없었다면 마리아가 살던 곳 나사렛에서 백사십 킬로가 넘는 베들레헴까지 가서 원정출산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제 마음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침 해산달이 가까웠을 때, 황제의 칙령이 떨어진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환경에 관여하시고, 환경에 맞춰서 각자를 불러내십니다.

그 후 삶을 인도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실 때도 환경과 상황에 절묘하게 맞춰서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과관계로 이어집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다 창조해 놓으신 그 룰을 깨뜨리지 않으시고 노련하게 일하십니다.

기도한다고 인과관계가 없이 뭔가가 자꾸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도 당연히 자연세계의 인과관계 속에서 이루어가십니다.

현재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 일, 계획, 자산, 하나하나를 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시고 중요한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땅히 심어야 할 것을 안 하며 열매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룰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필 왜 해산달이 가까웠을 때 이런 번거로운 일이 생겼는지 속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절묘하신 인도라는 것이 나중에야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내게 있던 어떤 일이든 믿음 안에서 보면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허용하신 것이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잊어버리고 싶은 힘든 일이었다 해도 지금 이순간 예수님을 믿고 잘 따라가면 그 모든 아픔이 언제였냐 잊혀 질 만큼 복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 세 번째로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로마황제와 같은 권력자가 아니라 성육신하셔서 초라한 구유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법과 세상의 왕과 통치 방법이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형상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은 우리 지각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완전히 망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사람처럼 육체 안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게 가능할까요?

인간이 되지 않고는 인간을 속죄하실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망가뜨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실 때 낮아지심은 절정에 이르십니다.

모욕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가짜 취급을 당하고 부끄러운 죄인의 낙인이 찍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모욕을 당하고 수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다 해도 예수님만큼 망가지고 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의 결과들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그 사랑을 절절이 실감 못한다는 것이 매일 매일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난 주 십년 전 작고한 한 정치인의 부인이 남편이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모든 자료들을 모아 기념도서관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부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사를 수없이 다녔지만 남편의 책은 물론이고 대학노트, 쪽지, 편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유품을 담은 박스 오백 개가 큰 방 두 개를 꽉 채웠기 때문에 자기는 작은 방에서 쪼그리고 십년을 잤다고 하더군요.

남편 냄새가 나가 버릴까봐 문도 잘 안 열고 십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사랑의 파편도 이렇게 진한데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체감한다면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이 베들레헴 구유에 누워 계신 것입니다.

6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이 신생아가 되어 구유에 누우신 모습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복잡해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아기를 쌌던 강보는 마치 미이라처럼 몸을 단단히 휘감아 놓는 천이었습니다.

어쩌면 얼굴만 남기고 강보에 감싸인 아기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옮겨져 수의로 감싼 채 돌무덤에 누우신 모습과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이만큼 낮아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베들레헴에 가서 당시 양의 우리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당 구석에 한 칸을 마련한 그런 가축우리가 아니더군요.

집 옆에 있는 돌언덕을 동굴처럼 파 놓은 차디찬 곳이 양의 우리였습니다.

구유도 돌절구처럼 돌덩이를 우묵하게 파 놓은 것이었구요.

포근한 침대가 아닌 돌로 만든 구유에 강보에 쌓여 여린 몸을 뉘이신 아기예수님은 밤새 한기에 떨어야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환영하지 않고 냉대하고 거절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했던가요?

누군가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귀찮아했고, 때로는 싫어서 다퉜고,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열어드리지 않았잖아요?지금은 정말 예수님을 가장 따뜻하게 마음에 모시고 환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다시한번 이런 낮아진 모습으로 내게 오신 주님을 감사로 영접하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이번에 구유에 누워 잠드신 신생아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성자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성을 인간 아기의 한계 안에다 맞추셨다는 게 신비하고 놀라웠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신비한 것은 낮아질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낮아지려고 하지 않죠.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낮은 환경으로 내려오는 게 참 힘들죠.

더 힘든 것은 내 인격과 자존감이 깎이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매일 불안하게 하고 격동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높아지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내 존재를 증명하고, 나를 높여 줄 수 있는 것들을 좆다 지치고 채워지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자신을 송두리째 베들레헴 구유에다 신생아로 눕혀 놓으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원칙은 낮은 곳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이든, 사랑이든, 지혜이든, 삶의 어떤 필요이든, 우리가 낮아져야 주님께 속한 더 유익한 것으로 다시 채워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낮출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증거이고 특성일 것입니다.

다 비우고 가장 낮아지신 구유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느새 세상을 따라 높은 곳에 두었던 우리 마음이 다시 낮아지는 성탄절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