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18장15절-23절 (어린 아이 같은 믿음)

남수연 2021. 12. 18. 09:40

 

https://www.youtube.com/watch?v=EtPSEICKGu0 

누가복음은 특히 기도와 구원에 대한 주제를 깊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죠.

오늘은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 받기 위해서잖아요?

저는 지난 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문득 내가 주님 계신 천국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확정되는 그 순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확신하지만 실제로 그 상황이 벌어질 때 느낌은 당연히 다르겠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사람들이 호명된다면?

수험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순간처럼 얼마나 떨리고 간절할까요?

그 사람들 중 내가 천국 시민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상상하니 말 그대로 소름이 끼치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매달려 우리가 살고 있지만 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봉사도 좋고, 자선도 좋고, 훌륭한 인품도 좋지만, 구원을 늘 챙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앞 뒤에 몇 몇 사건들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주연인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더 명료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조연들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내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은지 돌아보고 구원의 확신을 다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1. 본문 말씀의 배경과 어린 아이를 축복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앞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생애 서른 세 번 째 유월절 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서른 세 살의 예수님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서른 세 살의 주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저자인 누가는 9장부터 19장까지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이 십자가를 향한 여행에 집중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 명절 전이었기에 각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가족들이 삼삼오오 걸어오느라 인산인해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월절 때 예루살렘에는 십만여명의 순례객들이 모였다고 요세푸스란 역사가는 전합니다.

그 무리 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 돌풍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주변에 달라붙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안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죠.

부모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자 제자들이 저리 가라고 호통을 칩니다.

15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지금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메시야왕국을 세울 일에 마음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곧 나라를 세울 장부의 길을 갓난아기들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시고 말씀하십니다.

16절,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주님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비장한 마음이시겠습니까?

그러나 멈춰서 아기들을 받아 안으시는 주님에게서 사람에 대해 한결 같은 예수님만이 가지신 진심이 느껴집니다.

내가 괴로우면 품을 파고드는 자식마저 슬그머니 밀어내는 게 인간인데, 예수님께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시는 중에도 오른 편에 달려있는 강도의 간절함을 듣고 그 품에 품어주시잖아요?

작은 아기들에게도, 아이를 안고 축복을 구하러 나오는 부모에게도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걸 누가 막겠습니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사랑이 철철 흘러나오는 게 다르죠.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나라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깨끗이 해주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영접하신 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린 아기들의 특징 중에서 특히 의심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앞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이고, 본문 뒤는 부자관리와 맹인입니다.

 

2. 이 네 사람을 비교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믿음을 살펴보고 나의 믿음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서 먼저 믿음의 대상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한 부자 청년 관리가 먼저 등판합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관리라고 표현한 단어는 회당지도자나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리의 첫 한 마디에서 이 관리의 믿음이 심각한 위기에 있음을 간파하십니다.

먼저 영생을 구하는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잘못 된 것입니다.

19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자청년의 심중에 인간이 선할 수 있다는 오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경지에 이른 단지 인간 스승으로 알고 영생을 묻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인간은 없습니다.

18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인간은 없다.

예수님이 선한 인간으로서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선한 인간도 없고 영생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영생에 대한 의문은 풀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후세계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성인군자 예수님이 사후세계와 영생에 대해 말했다면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에 대해서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내세를 보고 온 사람이 없고 누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기에 말씀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부자관리와 달리 후반부에 나오는 맹인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38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관리는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암송하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주실 구원자 메시야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사회를 들썩이게 하는 예수님을 한번쯤은 구약성경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닐까 생각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길에서 구걸하는 맹인의 입에서 오히려 메시야를 상징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단지 다윗의 족보에서 나온 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이미 메시야인 다윗의 자손은 신적 존재임을 밝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다윗의 자손’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간에, 읽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절,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십니까?

이것이 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믿음입니다.

 

2) 다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자기의 공로와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청년의 문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냐는 질문에 네가 이미 십계명을 잘 알고 있지 않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청년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사람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명을 지켰냐고 물으시는 의도는 이것입니다.

네가 계명을 열심히 지켰지만 그것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네 스스로가 알기에 지금 내 앞에 와서 묻는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뭘 더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것이 자기가 남보다 더 구원받을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바디메오는 이렇게 예수님께 외칩니다.

38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메오에게 구원은 다윗의 자손을 믿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 구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구원이 당장은 안 보이던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이 눈을 다시 뜨게 해주신다고 믿는 것은 천국을 믿는 만큼 큰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오직 예수님께 달렸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대표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지게 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어린 아기로 태어난 다음에야 진정한 따름이 됩니다.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그게 뭐나 되는 듯 대단한 자랑거리만 될 뿐입니다.

오늘 부자청년이 율법생활의 성과를 주님 앞에 내 놓듯, 본문 앞에 나온 바리새인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기 행위를 줄줄이 읊어대죠.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사람은 본성이 인색합니다.

인색하기에 자기가 하나님과 남을 위해 드린 것이 너무 대단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시고 구원하신 그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 까지 자기 장부책에 기록하고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아직은 그런 믿음의 상태이죠.

28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구원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만 아무리 갚고 또 갚아도 여전히 구원받은 값이 남아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받은 은혜를 계산하는 믿음을 더하시고, 드린 것은 잊어버리는 은혜를 더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하나님 앞에 내가 한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행하신 그 크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의 믿음은 종교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부자관리에게 이 중대한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시죠.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관리는 꽤나 영생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했죠.

그러나 예수님이 네 많은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정말로는 내세를 믿지 않았고, 영생을 어린아이처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진짜 믿었다면 돈을 포기해야지 영생을 포기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노숙인들을 도와주고 가난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부자청년에게 그러신 것은 그가 스스로를 신령한 믿음에 이른 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세속적인 사람이란 것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이죠.

그는 영생에 대해 전혀 모르고 믿지도 않았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바디메오는 어떻습니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공개적으로 소리 지르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출교당할 위험한 행동입니다.

유대인 사회는 이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자들을 출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는 맹인이 사회에서 추방당하면 죽음 밖에 더 있겠습니까?

바디메오는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얻어먹을 권리마저 내 놓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추상적인 종교심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 실제로 믿는 믿음인 것이죠.

예수님이 그런 바디메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절,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지 못했고 바디메오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부자청년은 근심하고 주님을 떠났지만 바디메오는 주님을 따랐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막연한 종교심일까요, 실체가 있는 참 믿음일까요?

그것은 ‘네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나타납니다.

물론 주님의 명령에 다 순종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믿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것 중 어느 것 하나를 예수님을 위해 살며시 내려놓아 보려고 하면 우리가 부자청년처럼 근심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아주 사소한 즐거움인데도 포기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저는 그런 저를 보다 어느날 되려 이렇게 주님께 되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매번 저런 시시한 것들에도 저를 차지하지 못하고 지세요?’

주님의 영광 한번 보여주시면 이깟 돈, 성공, 쾌락, 인기, 자존심, 아무 것도 아닌 걸 알 텐 데 말이죠.

공명심과 성공욕구가 컸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한번 보더니 다 필요 없으니 그냥 그 산에 머물자고 했었잖아요?

그러나 이 자연세계에서, 새사람과 옛사람이 공존하는 인격체로 살아야하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에 매료되는 것이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소소한 우상에게도 매일 지시며 주님은 우리와 함께 가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부자청년과 다른 것은 주님의 말씀이 찔리고 불편하고 순종하기 힘들어도 주님을 떠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그런 내가 부끄러워서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탄식하는 것이죠.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전히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내일을 염려하며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불의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아이들은 죄 중에 잉태되고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장차 큰 죄인이 될 가능성을 한껏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죄성이 교만입니다.

기어 다니기만 해도 다른 아기의 장난감을 뺏고, 엄마 젖이 안 나온다고 젖꼭지를 깨무는 작은 폭력을 아기들은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아기를 본 적 있으십니까?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교만이잖아요?

감추고 있어도 인간은 다 교만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어린 아이 때는 교만이 안 나타납니다.

인간이 겸손이라는 불가능한 성품을 어린 아기 때처럼 다시 가질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서 다시 어린아이 같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주를 위해 많이 하고 바리새인처럼 늘어놓을 것이 많은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걸 처절히 깨닫고 겸손한 것이 낫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였다면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는 게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생활고 뿐 아니라 사람과 부대끼며 시달리며 사는 것도 참 힘들죠.

다윗은 시편131편에서 하나님 품에 있을 때 자기가 젖 뗀 아이와 같다고 평안을 노래합니다.

젖 뗀 아이는 젖을 만족하게 먹은 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너 살이 되어서 엄마 젖을 뗀 아이를 말합니다.

아이가 엄마 젖을 뗄 때 세상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엄마에게 배신당한 것 같잖아요?

그런 고통을 거쳐 젖을 떼고 나니 엄마 품에서만도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쫒기는 중에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먹이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매일이 근심이고 고통이었습니다.

하루가 저물어 갈 때 홀로 광야에 나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의 마음이 모든 괴로움을 잊고 비로소 젖 뗀 아이 같은 만족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언제고 그런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면 오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서부터 체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고 신뢰하는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신가?

내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로 주시는 하나님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가 정말 천국과 영생을 어린아이처럼 사실로 믿고 있는가?

항상 내 구원을 따져보고 챙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