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BOZVSjk4ir8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던 이천년 전 그때와 가장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때도 목동 몇몇이 찾아와 경배했듯이 오늘 각 교회마다 정말 소수의 경배자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칸타타도 없이, 성극도 없이, 풍성한 성탄 식탁도 없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함께 웃고 행복해 하던 성도님들이 다 모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온라인을 통해서 다 같은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며 예배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구원입니다.
만일 내 인생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갈 길을 얻게 되고, 현재 삶에서 은혜를 얻으며 사는 이런 삶이 아니었다면 크리스마스의 악몽이겠죠.
오늘 성탄절엔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옛날 성탄절 성극에서 보았던 동화 같은 마굿간에 멈춰 있습니다.
오늘은 성탄절에 알아야 할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아는 만큼 믿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1.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지난 주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를 찾아 갔던 가브리엘 천사가 여섯달 뒤에 나사렛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려는 것이죠.
그런데 27절을 보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로 아직 처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가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 말씀 속에는 너무 많은 구원의 진리와 이치들이 담겨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다 언급할 수조차 없는 내용들이죠.
나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은 믿어야지 그런 마음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좀 부족합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사탄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 깊이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셔야 했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 이후 전 인류가 죄에 빠져 영원히 받을 형벌에서 구제해 주실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고, 이 탄생의 신비에서 단 하나라도 변경되면 안됩니다.
동정녀를 통한 탄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니 그걸 빼고 믿자고 하면 나머지 구원의 원리하고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연적인 부부사이에서 태어나실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우선 성경은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창조시에 이미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창조 된 인간만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7장10절에서 이걸 보여주죠.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이 이미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하죠.
또 에베소서도 역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창조의 시점에 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상태라는 걸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창조 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처럼 태어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시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이죠.
또 사람의 죄성은 아담에게서 유래되기 때문에 아담의 대열에 끼지 않은 완전하게 거룩한 제물이 되시려면 자연적인 출생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신 것이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성립될 수가 없는 중요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2. 또 구원자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32절,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오늘 가브리엘이 한 이 말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통해 무수히 예고하신 것입니다.
마리아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이 와서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을 고대하고 있었잖아요?
27절을 보면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가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아들로 입적 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과 요셉은 혈통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족보에 적용시킨 것은 법적 관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양자를 받아들이면 법적으로 자식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은 법적 관계를 사실 관계와 똑같이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법적으로 양자가 된 것이잖아요?태어날 때는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니라 소름끼치게도 사탄에게 속한 자였다고 성경에서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 된 것이지만 자녀의 권리를 그대로 우리가 받았잖아요?
예수님을 베들레헴 동사무소에 가서 요셉의 아들로 호적에 등재했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고 다윗의 후손인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 성경을 읽다가 큰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예고하신 부분이 있더군요.
남유다 멸망 전 선지자들이 우상숭배하고 악을 행하는 왕들에게 무수히 경고하는 것을 역대하 묵상에서 보았잖아요?남유다 패망 직전의 여고냐라는 왕에게 예레미야가 이런 예언을 합니다.
렘22: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인 그 왕들에게 완전히 질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자면 다윗에게서 솔로몬으로 이어진 정통 왕조가 여고냐에서 끊어지고 다시는 왕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 속에서 왕이라함은 다 메시야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후손 중에서는 메시야가 나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여고냐의 이름이 마태복음 예수님 족보에 당당히 올라와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분명히 다윗의 적통인 족보에서 왕이 나오지 않을거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런데 이 문제를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가 아주 적법하게 풀어줍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의 족보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족보가 두 개이고 그것이 서로 다르다면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그것은 한 쪽은 부친의 족보이고 한 쪽은 모친의 족보라는 뜻이겠죠.
마태복음의 족보는 다윗에게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데,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윗의 다른 아들인 나단으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기 전에도 성경을 꽤 읽은 편인데 두 족보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걸 설명해 준 목사님들도 없었구요.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족보는 오히려 전시용 족보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성경으로 알고 있죠.
유대사회에서 여성의 족보가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널리 전해야 되는 데 그런 걸로 시비가 걸려 복음전파를 지체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예수님을 보내실 다른 다윗의 줄기를 생각해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솔로몬의 계보를 따라 솔로몬의 27대손인 요셉에게 속하지만 실제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나단의 42대손인 마리아를 통해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이 역동적으로 실현되는 루트를 보면 대개 이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주류를 꺼려하시고 비주류를 통해 일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필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 선택한 사람이 나사렛의 평범한 처녀 마리아인 것도 그렇죠.
왜 하나님은 권력을 주셔 놓고 그들과 함께 일하지 않으실까요?사람이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영향력이 많으면 죄성이 활성화 되기가 더 쉽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총장 직인을 다루는 직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상장을 위조해서 대입원서에 사용했겠습니까?
우리는 권력이 없어서 그런 짓 못하죠.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가치관과 같이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나 다니엘 같은 그런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죄 짓지 않으려면 몇 배는 더 경성하고 자신을 바로 세워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목동일 때의 다윗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왕위를 잇는 자손들에게서가 아니라 우리가 읽으면 이름도 생소한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의 계보를 통해 영원한 왕을 내려 보내신 것이겠죠.
3. 처녀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전해 준 잉태 소식을 듣고 이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마리아가 어리고 순진무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순종에 비길만 합니다.
본문에서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대화를 읽어보면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 보는 영적인 존재 천사를 두려워했지만 전혀 주눅들은 모습이 안 보입니다.
오히려 상황을 파악해 가며 천사와 대화를 이어갑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먼저 이렇게 인사를 건넵니다.
28절,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숨거나 떨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29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 말을 제대로 듣고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천사가 계속해서 마리아가 한 특별한 아들을 낳을 것을 고지합니다.
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이어서 그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고 다윗의 왕 위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이미 천사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아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대했을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그리고 천사의 이야기가 이제 곧 요셉과 결혼할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캐치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잖아요?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가브리엘이 예고한 그 아들이 곧 결혼할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다고 이해하는 게 더 자연스럽잖아요?
신랑 요셉이 다윗왕의 적통이니 당연히 천사의 말과 부합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게 아닌 것을 직감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를 위시해서 당시 하나님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정치적인 인간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노래를 보면 그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봅니다.
43절입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마리아의 뱃 속에 잉태 된 예수님을 성령을 통해 알아보고, 하나님을 일컫는 ‘주’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가 범상한 인간이 아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왜냐하면 구약성경 곳곳에 태어날 메시야가 신적인 존재라는 암시를 주셨잖아요?
오늘 읽은 교독문이 미가서와 이사야서의 예언이죠.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뒤에 나오는 말씀도 다 인간에게 붙일 수식어가 아니잖아요?
그렇기에 마리아는 그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공지를 들었을 때 주저 없이 결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8절,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여기서 왜 하나님이 마리아를 선택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이라’는 관계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목사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시대 ‘종’의 의미하고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대행자 같은 권위가 담겨 있죠.
그러니까 주의 종님이라는 이상한 말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기록시대에 ‘종’은 그야말로 노예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지 자기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로서 주인과 종의 관계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걸 현대 성도들이 거부하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고, 살아보려고 해도 그렇게 힘들고 항상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살려고 종종 애를 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내가 그 말씀대로 이를 악물고 참는다’
이러면서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용납하려고 아주 아주 힘들게 참습니다.
그런 경험 있으시죠?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 명령들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푼다면 어떨까요?
억지로, 겨우 참아내는 게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 감정을 생각지 않고 즉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편지에서는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서는 아니죠.
내 감정도 중요하고, 나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히 ‘나는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 라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자꾸 앞서서 일하기 때문에 주님이 일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하게 될거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밤새 생각했다면 결론이 어떻게 났을까요?
사랑하는 요셉과 결혼을 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데, 임신이라니.
요셉은 분명히 나를 부정한 여자로 알고 파혼하자 할텐데.
배가 불러오면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나는 간음한 여자 취급을 받겠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겼는데. 사람들이 나를 위선자라 하겠지, 돌에 맞아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밤새 했다면 하나님의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복합니다.
아직 스물살이 채 되지 않았을 어린 마리아의 이 당찬 순종이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잔다르크 같이 용감한 마리아에게 큰 도전을 느꼈습니다.
제가 단톡방에 올려 드렸던 필리핀 빈민촌의 아이들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것은 내가 가장 복되고 보람 있게 사는 길인데 왜 지리멸렬하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감정과 죄성에 끌려 다니는지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어린 청소년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멋지게 순종하는데 온갖 핑계를 대며 징징대기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성탄절, 예수님을 그 몸에 영접한 마리아에게서 배워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믿음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점점 성장하려면 우선은 말씀대로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명령하신 것은 따지지 말고 즉각 순종하는 태도를 점점 키워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득실을 계산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계산하신 것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과 교훈들은 우리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다 계산해 놓으신 것입니다.
조금 귀찮은 것을 감수하고, 조금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결과는 다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설교를 듣고 예수님의 계명을 배우는데 마리아처럼 따지지 말고 지켜보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왜 성령으로 잉태되셨는지, 왜 마리아의 족보를 타고 오셨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성육신에 담긴 진리가 우리 믿음을 더 견고히 다져주었으리라 믿습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일하시는지를 유념하길 원합니다.
언제나 주류가 되고 싶고, 남보다 더 나아야 되고, 더 성공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은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별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싸워야 할 본성 중 하나가 남에게 보여지는 걸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을 결산할 때 인정받고 기념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맞게 행한 일 뿐입니다.
이 땅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데 둔다면 성공하지 못해서 삐뚤어지지 않고, 성공해서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도 올바르게 주님을 따르기에 공명정대한 자긍심이 있죠. 높은 자리에 올려주셔도 더 높은 주님을 섬기기에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낮은 곳이든 높은 곳이든 우리 마음은 항상 낮은 마음이 되어야겠습니다.
남보다 잘 안 될 때 시기하고 불평하는 것은 그것 역시 내 마음이 높은 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곳이 내게 가장 좋은 자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질과 사명에 따라 데려다 놓으시는 곳이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낮추셔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이 성탄절에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 겸손하고, 순종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주님께 선물로 드리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18장15절-23절 (어린 아이 같은 믿음) (0) | 2021.12.18 |
---|---|
누가복음18장1절-8절 (불의한 재판장 비유) (0) | 2021.12.10 |
누가복음1장5절-6절 (주의 백성을 준비하라) (0) | 2020.12.28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24장44절-53절) (0) | 2020.04.15 |
창립주일 설교 (누가복음8장1절-3절 : 하나님의 나라) (0) | 2020.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