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1장5절-6절 (주의 백성을 준비하라)

남수연 2020. 12. 28. 18:08

www.youtube.com/watch?v=7xyEoV9M0qo&t=3597s

 

성탄절을 기다리는 마지막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코로나로 살얼음판 같은 시기인지라 올해는 성탄 캐롤도 많이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제 코로나 5대 민폐족이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 마음이 착찹했습니다.

스키족, 파티룸족, 해맞이족, 손소독 기피족, 거기에 교회출석 사수파가 끼어 있더군요.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여전히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성탄절을 기다리며 예수님보다 먼저 왔던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보다 여섯달 먼저 잉태 된 요한의 출생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특이점은 사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처음에 함께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두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죠.

한마디로 말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구약성경과 연결시켜주는 교각의 역할을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밝히는 세례 요한의 임무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우리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교회력에 있는 절기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구원의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생활이 항상 우선이고, 먹고 사는 게 다급한 문제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문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단단히 서면 그런 건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다 살아지게 되어 있잖아요?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더 잘 살아지잖아요?

그 모든 문제의 원인과 본질이 되는 것을 직면해 해결하지 못하게 마귀가 자꾸 결과에만 정신을 쏟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이라는 열쇠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성육신의 의미를 더 깊이 아는 복된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1. 세례요한의 수태 배경에 대해서 본문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세례요한의 때는 5절에 ‘유대 왕 헤롯의 때’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무심히 지나가기가 쉽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성경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세례요한이 잉태된 오늘 본문의 시대 사이 4백여년간은 성경에 아무 기록이 없는 긴 공백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일대기에 이렇게 침묵하시는 시기는 없었죠.

그런데 침묵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잖아요?

이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모든 에너지가 구원사의 절정인 메시야의 탄생을 향해 숨죽여 모아지는 그런 기간인 것입니다.

그 기간 이스라엘에 있었던 일들은 성경에 없지만 대신 세계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간은 알렉산더대왕이 나와 서방세계를 정복했고 다시 패권이 로마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입니다.

이스라엘도 그 정복전쟁의 피해자가 됩니다.

그 후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가 다스리고 있고, 유대 영토를 다스리는 이 헤롯왕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본래 이스라엘왕은 다윗과 언약하신 대로 다윗의 왕가로 이어져야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헤롯이 지배국인 로마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어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성경묵상에서 보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했던 결과가 항상 이렇다는 것을 보며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리시다 말리시다 결국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너 그렇게 우상신이 좋으냐, 그럼 우상 섬기는 게 뭔지 가서 경험해 보려무나’

이게 바벨론 유수입니다.

지금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았다는 증거겠죠.

이방인 왕이 통치하는 이 상황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치욕스럽고, 암울하고 불행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관심은 자연히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약속하셨던 다윗의 자손에게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나타나 고대 다윗왕국이 누렸던 그 영광을 되찾길 고대하게 되는 것이죠.

선지자도 없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었던 이 사백년의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그 때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때로 정말 막막한 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욱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고, 간절히 응답을 구하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약속하신 예수님보다 먼저 약속하신 세례요한이 태어납니다.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죠.

부모가 다 제사장 가문이니 신앙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엘리트 가문입니다.

게다가 6절에 보니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 같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죠.

구약성경 시대에 가장 영예로운 명칭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법적으로 완전하게 의로운 신분이 되었다는 뜻의 ‘의인’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믿음과 행위가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아마도 행실은 이들보다 덜 의로울 것입니다.

차이를 아시겠죠?

이렇게 경건한 부모 밑에 태어나 일찍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면 훨씬 큰일을 할 수 있을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죠.

우리 몸이 세상에 최적화되어 있으면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세상 일이 자꾸 떠올라 눈감고 진중하게 기도하기도 어렵죠.

생각 뿐 아니라 몸도 자꾸 믿음에 복종시키고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도 종일 머리속에 하나님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시간을 따로 내서 기도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면 하나님나라에 모든 것을 맞추어 가는 게 정말 중요한 삶의 포인트입니다.

하나님도 준비 된 만큼 그 이상은 쓰시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생애 전체를 광야에서 오직 주의 일을 위해 준비하며 바친 사람입니다.

 

3) 또 세례요한의 잉태 자체가 신비로웠습니다.

7절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자식이 없었고 이젠 나이가 많아서 임신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속한 반열이 마침 성전에서 봉사하는 순번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적게는 8천5백명에서 많게는 이만 오천 명까지로 예측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 하는 것은 반열에 따라 순번이 있었습니다.

또 성소 안에 들어가서 분향하며 기도하는 일은 그 중에서 다시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던 것이죠.

거기에 뽑히는 일은 제사장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확률입니다.

바로 그 때, 마침,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갈 제사장으로 제비 뽑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실히 노력하는 것을 축복하시지만 원하시면 언제든 제비 뽑히게 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추수에서는 우리 평생에 선하게 심고 뿌린 그대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선 그렇지 않죠.

세상에선 착하게 최선을 다한다고 잘 되는 게 보장되지 않잖아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로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에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운이 필요한 경우라면 더 더욱 제비 뽑히는 은혜도 구할 수가 있는 것이죠.

저는 평생 노력한 그 이상으로 제비 뽑히는 은혜를 많이 받은 편입니다.

제가 교사가 되기 위해 한달 반 순위고사 공부를 하고 합격했지만 저보다 더 성실하게 일년을 공부한 친구는 떨어졌습니다.

시험이라는 게 다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 아시잖아요?

대신 교사로 지낸 28년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좋은 일에 제비 뽑히는 은혜도 많이 받으시고 하나님의 일에 더 귀하게 사용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갈 제비가 뽑힌 것은 가브리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소에서 분향하며 기도하던 그 순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엘리사벳의 잉태를 예고하며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주죠.

그리고 이 아들이 장차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고지합니다.

이 말을 처음에 사가랴가 믿지 못하는 바람에 요한이 태어나기까지 벙어리로 살게 됩니다.

이 신비로운 사실은 유대 땅에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은 태어날 아이에 대해 경이로운 기대를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신망을 얻고 태어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떤 특별한 뜻을 위해 태어난 것일지를 보겠습니다.

13절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14절을 이어서 보면 아들을 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가 평생 한번 분향하게 된 그 거룩한 성소에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사가랴가 아들을 낳을 것이란 천사의 말에 의아했고 믿지도 않잖아요?또 사가랴가 ‘간구했다’는 단어는 그 날 한번 기도한 게 아니라 계속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고 흠이 없이 행했던 사가랴는 무슨 기도를 그렇게 계속 해 왔을까요?

당연히 다윗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였겠죠.

뒤에 2장에 보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 안나가 나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의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사가랴는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이 오시기를 기도했을 게 분명하죠.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간구에 드디어 때가 되어 응답을 하셨는 데, 바로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와야 하기 때문이죠.

그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4백년 전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에 예고해 놓으셨거든요.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말라기 마지막 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4장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오늘 가브리엘이 그 얘기를 똑같이 하잖아요?

17절입니다.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네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해 왔지? 그래, 이제 메시야가 오실 것인데 그러려면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해야 하지? 바로 그 일을 할 아들을 너에게 주겠다’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세례 요한 이런 사람들은 성경역사의 중요한 지점에 포진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구도를 잡아주는 인물들입니다.

이런 것을 잘 이해하면 더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3. 그럼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요?

1) 17절의 말씀대로 먼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신앙을 이끌어 줄 지도자가 없어 맹목적으로 살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을 세례 요한이 합니다.

뒤에 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73년에 여의도가 허허벌판 모래밭이었던 그 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오셔서 5일 동안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연인원 110만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한국교회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부흥의 파도가 몰려올 때가 있잖아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유대와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같이 호응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본성대로 살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가길 자원하는 마음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잘 호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설교하신 네 가지 마음 밭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딱딱해진 마음 밭에는 복음의 씨가 뿌려져도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강퍅하고 행실이 나쁜 사람이 한순간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앞둔 대림절에 예수님을 맞이할 마음은 세상과 죄로 인해 둔해진 마음을 다시 확실하게 돌이키는 일입니다.

어쩌면 코로나가 몸보다 영혼에 더 해를 끼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 요한은 죄를 회개하는 세례를 주며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을 믿는 출발점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만큼 큰 죄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죠.

어렸을 때 구멍가게에서 슬쩍 물건을 훔쳐 나온 그런 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이는 죄인식은 윤리적인 죄인식과 완전히 다릅니다.

윤리적인 죄인식은 바른 교육을 받고 양심의 기준으로 삼은 일반 사람들 중에도 민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깨닫고 믿게 되는 죄인식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교양이나 교육과 관계없이 선명하게 자각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죄인식의 상태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기준으로 나를 가늠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근본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내 죄를 다 못 본 것입니다.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 그것도 위험합니다.

남과 비교가 되고,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윤리적인 죄의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죄의 정체성은 항상 최악의, 항상 같은 방향, 항상 같은 강도, 항상 같은 분량이지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것입니다.

남보다 내 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더 고상하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성숙해 가고, 그렇게 보이는 것은 매 순간 나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고 매 순간 성령님을 의지해 새 마음을 옛사람보다 앞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삶에서는 얼마나 계속 예수님을 붙드냐가 거룩과 승리의 관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라는 것은 죄의 본성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내 깊은 곳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죄의 뿌리를 보며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죄의 치명성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왜 오셔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는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기까지 알아가도록 계속해서 도덕적인 내 죄를 먼저 회개하며 고치고 더 본질적으로 악한 나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보면 볼수록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정확히 알수록 오히려 그런 나를 용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걸 알기에 이해하게 되고 갈등이 적어지게 됩니다.

죄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것은 은혜의 삶의 시작입니다.

세례 요한도 먼저 도덕적인 죄를 회개하고 그걸 고치라고 합니다.

뒤에 3장에 나오죠.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은 부과 된 것 외에 더 거두지 말라

군인들은 강탈하지 말고 받은 월급을 족하게 여기라

물론 세례 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오게 하는 회개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성적인 죄인식과 회개는 도덕적인 죄에 대한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점점 나를 선하게 바꾸려는 진지한 태도로 이어지고 성령님의 역사로 더 깊은 죄의 뿌리를 알게 되는 것이죠.

성탄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세례 요한 앞에 나온 사람들처럼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또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세례 요한은 신분이 제사장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입니다.

본래대로 하면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도록 성전에서 하나님께 동물 제사 드리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사장이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제물도 없는 회개의 물세례를 주며 죄를 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파격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알아왔기에 헷갈릴게 없지만 이스라엘사람들에겐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물제사 없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세례 요한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에 성전 제사가 없는 죄사함이 인정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구원의 지평이 열린 것이죠.

물론 세례 요한이 구원자는 아니고 구원자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성전제사의 완성이 되고 완벽한 한번의 제사를 통해 죄를 해결하실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증언하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의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은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특별한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용하시는 것이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죄에 빠져 영벌의 운명에 처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이 구원의 대장정을 준비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이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심과 신실하심이 어떻게 일을 이루시는 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죄인들을 품으시고, 정의로운 율법을 주시시고, 복을 주시려하지만 죄인들이 줘도 그걸 얻어먹지도 못하잖아요?

용서를 통한 구원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경 역사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통한 구원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먼저 왔던 것이죠.

오늘 말씀대로 내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주님 앞에 나를 깊이 들여다 보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이 죄의 사람을 회개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여 나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열심히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항상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