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mlmXR2aYik&t=168s
<2020년 2월16일 설교영상>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창립1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가 10년을 존립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쉽지 않습니다.
함께 한 모든 성도님들을 예수님께서 붙들어 주셨고 성도님들도 충성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든든한 동역자로 함께 가주시는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읽은 짧은 본문은 완벽하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에게 교회는 주일에 한번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성도란 말도 생겼죠.
성경은 교회를 그렇게 알려준 적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다른 말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혼자는 모임이 될 수 없고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성도들은 크게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하나의 교회공동체에 속했지만, 개교회에 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함께 하며 섬겨야 합니다.
우리 딸이 어릴 때 할머니댁을 갈 때면 거의 5분 간격으로 묻던 말이 있습니다.
‘얼마큼 남았어요? 언제 다 와요?’
시간과 거리 개념이 없으니 뒷자리에서 무작정 따라가는 목적지는 퍽이나 지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 가면서 개념이 생기니 다시는 그런 말을 묻지 않더군요.
가는 길 전체를 아니까 좀 막혀도, 더뎌도 뒤에서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편하게 할머니댁까지 가는 것이죠.
요즘은 운전자들이 주로 티맵을 켜고 주행을 합니다.
옛날엔 어느 차 안에든 지도책 한 권이 있었죠.
지도책을 보고 찾아갈 때 좋은 점은 언제든지 현재 위치와 목적지까지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 성경 말씀에서 지켜야 할 세세한 계명들을 배우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계명들은 오늘 당장 내 발에 등이 되어서 엎어지지 않게 해 줍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화를 벌컥 냈기에 관계가 엎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 전체, 신앙의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갖고 있으면 목적지가 어느 방향인지 쉽게 보입니다.
큰 지도를 갖고 있으면 곁길로 샜다가도 금방 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곁길로 많이 나갈수록 다시 곧은길로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신앙 여정이 새겨진 지도를 꺼내 전체를 확인하며 믿음의 걸음에 확신을 채워야 합니다.
머리 속에 신앙의 큰 지도가 있으십니까?
오늘 교회 공동체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본문 말씀이 큰 지도를 보여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목적지인 예수님께로 방향이 다시 잘 조정되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복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나라입니다.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나라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자연적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나라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우리에게 가르치러 오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없기에 그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 생각으로는 헛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위해 우리가 쏟아 붓는 노고를 어리석고 아깝다고 생각하죠.
성도님들은 정말 본적 없는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에 대해 선포하셨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나라를 믿는 우리에겐 성령께서 주신 내적인 확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자연세상 이상으로 우리 심령 안에 확고히 인식되어 있기에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이런 확신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것이나 사람의 교훈을 따라가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나라는 장차 우리가 들어갈 곳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나라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 땅에 있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속한지 아닌지는 간단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통제를 받고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면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복음은 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복된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기만 하면 뭐합니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죠.
우리가 누가복음 말씀을 계속 나누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는 말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열려진 것이 바로 은혜의 해입니다.
죄와 사망에 포로 되었던 우리, 눈멀어서 하나님을 못 보던 우리, 마귀와 인생의 고통에 짓눌렸던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는 날이 은혜의 해입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모든 불행의 원흉인 죄를 속죄하심으로 열립니다.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예수님은 신성모독자란 오명을 쓰실 것을 알면서도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막혔던 그 길을 주님께서 속죄하심으로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것을 위해 삼년여의 짧은 기간에 정말 쉬지 않고 일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피곤한 일정에 좀 천천히 가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어서 가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된다’며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문을 여시기 위해 망설임 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때나 똑같이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불러 교회로 세우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작전상황실은 지구역사가 막을 내리고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세워지기 까지 밤낮없이 풀가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성도들을 불러 함께 하게 하십니다.
2.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열두제자를 세우셨습니다.
6장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고 열두명의 제자를 택하시고 ‘사도’라고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단순히 모든 것을 가르치고 전수해 주는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대신해 보냄을 받을 것이기에 사도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다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제자란 점에서는 사도들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세우신 목적을 마가복음3장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을 세우신 가장 큰 이유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좋아하기에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이 함께 있으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긴 시간 함께 있으면 아주 피곤해져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오래 같이 있으면 사랑하는 것이고 일찍 일어서면 좋아하는 사이는 아닌 것이죠.
사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 중 늘 사람과 함께 하셨고 초대받고 그들과 함께 지내셨잖아요?
지난주엔 주님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바리새인 시몬의 초대에도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아들이 결혼하고 분가한 뒤 우울감에 빠져 있던 어머니가 나오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들 얼굴이 보고 싶은지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신혼집에 가보려고 계속 꾀를 내더군요.
결국 며느리가 빵을 좋아할거라며 사들고 신혼집을 찾아갑니다.
그렇지만 딸의 만류로 벨도 못 누르고 문 앞에 빵을 두고 나오더군요.
자식 얼굴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건 둥지를 떠난 자식을 그리워하는 모든 부모들 마음이죠.
아무리 효도하는 자식들도 부모의 마음이 그 정도인지는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게 이 세상에 가장 큰 아픔인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아주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 같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은 여기저기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 형이라는 끔찍한 죽음을 왜 선택하셨겠어요?
창조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데리고 살기 위한 사랑 때문이잖아요?
의무로 사는 관계라면 어찌 생각하면 고맙긴 하지만, 불행이죠.
하나님의 진노는 미움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걸 보면 부모 마음에 불이 붙죠.
자식을 사랑하고 잘되길 바라기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이 항상 선보다 악을 택하고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등지고 멸망의 길로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는 죄인들 틈에서 사시며 그들을 사랑했던 예수님께로부터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래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주님의 이 마음을 성경을 통해 점점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도 서로의 마음이 비취지 않으면 진실한 관계는 어렵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도 주님께 기대고 의지하고 늘 속을 털어 놓고 기도하며 주님을 더 사랑해 가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또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나라와 복음전파를 제자들에게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전도하고 귀신을 좇고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예수님이 하고 계시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열두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도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열두제자 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망라해 모든 주님의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전파되고 억눌리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얻은 것이죠.
그렇다면 열 두 사도를 특별히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두 제자들만의 특별한 사명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주님의 인격과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을 잘 보고 증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들은 사람들만 진실을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약성경은 이렇게 목격한 제자들에 의한 예수님 기록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시 완성본이 있던 구약성경도 나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선지자들이 전해 주고 예수님이 인정하신 구약성경과 사도들의 증언과 그 믿음을 전수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이 이것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오늘도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했죠.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 중에 있는 신앙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신앙의 내용을 벗어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가 만든 복음서를 갖고 사람을 인도하려고 합니다.
이를 들어 예수님께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 판단과 지혜로 남을 인도할만한 사람들이 못됩니다.
성령께서도 이미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시는데요.
우리 교회는 이 사도들이 전수해준 신앙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복된 교회이고 우리 모두는 복된 성도인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사역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합니다.
2절과 3절에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함께 했던 여성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여성들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고 사회 참여가 적었던 시절에 남자들과 동등하게 주님을 따르던 여성제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께는 당연한 것이죠.
어떤 면에서 바울사도도 그 시대의 아들이란 한계를 뛰어 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가 통용하는 노예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남성들 위주의 사회체계를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열두 제자에 이어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던 여성들의 이름을 당당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보았고 동등하게 대우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서로 보완하며 완전해지게 하십니다.
섬기는 데 우열은 없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는 말씀을 위해 봉사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으로, 재물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주님께 봉사합니다.
오늘 나온 여성 성도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역자들을 돕던,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던, 교회를 강하게 하건, 우리는 여기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대개 사람을 섬기는 것이잖아요?
다만 봉사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것이 좋습니다.
은혜 받지 않고 봉사하는 게 저는 제일 무섭습니다.
그래서 늘 은혜 받은 만큼,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결국 자기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위해 섬길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한 일과 봉사가 결국 자기 의가 되기 쉽습니다.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사람의 본성은 정말 비상하게 움직입니다.
교회를 위해 일을 많이 한 사람들도 냉담한 사람들 못지않게 주님의 관심 대상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들은 먼저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린 비참한 상태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헤롯의 아내 요안나는 중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왕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직에 있었으니 권력과 재산이 많았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한들 내 몸이 죽어가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귀신에게서 풀려나고, 중병에서 고침을 받고,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한결같이 겸손히 주님을 섬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방 설거지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많은 봉사와 사역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과정과 결과에는 점점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채워집니다.
빠듯한 가운데서 쪼개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귀하지만 다 그래가지고는 언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겠습니까?
그런 믿음의 헌신 다음엔 더 풍성하고 성숙한 발전을 주셔서 더 많은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 갔다고 누가는 뒤에서 이들의 이름을 다시 기록합니다.
사도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 다 도망갔잖아요?
예수님의 수난의 과정을 눈물로 지켜봤던 이 여인들의 증언에 의해 당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모든 과정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빈 무덤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처음엔 주님 일행을 위해 음식을 챙기고 생활비를 담당했지만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된 것입니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가 경배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존재와 십자가 대속은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희미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비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할 때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 내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열매로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육십여년 전 실화를 다룬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가 식인 풍습이 있는 남미의 아우카 부족을 전도하기 위해 네 친구와 함께 그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복음을 채 전해보지도 못하고 창에 찔려 무참히 살해 됩니다.
당시 기자들은 이 기사를 전하며 그들의 죽음을 낭비라고 했습니다.
뭐하러 그런 미개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목숨을 낭비하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대우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리에서 사셨으니 제자 된 성도들도 당연한 것이죠.
나보다 더 못나 보이고 어렵게 살면서도 자존심만 강한 사람들을 자존심 눌러가며 섬기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돌아올까요?
주님의 칭찬과 하늘 창고에 선한 일들이 쌓이는 것일까요?
최선을 다해 섬겨도 마치 노력을 낭비 하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에게 이렇게 까지 잘 해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들 때, 성령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 같은 자를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낭비하셨구나.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섬기든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은,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와 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주님을 위해 자기의 것을 헌신하고 따를 성도들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드리고, 돈을 드리고, 고단하게 봉사하는 것들을 주님은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방청소 한번 하고, 설거지 한번 하는 것도 기특히 여기는 데 하나님께서 헌신하는 자녀들을 얼마나 귀하게 보시겠습니까?
우리 당대에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자녀에게 까지 대를 이어 축복해 주실 것을 믿으시고 즐거이 주님께 봉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창립10주년을 맞아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세 가지 큰 그림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나라에 속했습니다.
앞으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 준 성경대로 우리는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완성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저 여인들처럼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다짐하는 우리 주는나의산성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께 현세와 내세에 하나님은 크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1장5절-6절 (주의 백성을 준비하라) (0) | 2020.12.28 |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24장44절-53절) (0) | 2020.04.15 |
누가복음6장39절-45절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0) | 2020.02.03 |
누가복음5장17절-26절 (믿음과 탐색) (0) | 2020.01.23 |
은혜의 해가 왔다 (누가복음4장16절-22절) (0) | 2020.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