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FLNgg8MPe0&feature=youtu.be
2020년1월12일 설교 영상
새해 두 번 째 주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 모든 해는 은혜의 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은혜의 해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실제로 올해가 은혜의 해를 풍성히 누리는 해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인 예수님의 나사렛회당 설교에 대해 먼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신 뒤 인류구원 역사의 첫걸음을 떼십니다.
예수님이 다니며 선언하신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명세계가 우주의 중심이고 대단한 걸로 알고 있지만 그 나라는 죄의 도성이므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한 복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땅의 일에만 빠삭하면 안되고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죠.
믿기만 하면 안 되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잘못 살아왔던 것을 꼭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자란 곳은 북쪽으로 한 백킬로 이상 떨어진 갈릴리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인생 대부분을 사셨던 곳입니다.
갈릴리에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리호수가 있죠.
제가 가 본 갈릴리는 메마른 예루살렘에 비해 수목이 울창하고 농지가 많아 아주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바다만큼 크고 풍부한 갈릴리호수 주변에는 어부도 많았습니다.
주님의 열두제자들 중에도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이 많았죠.
저는 갈릴리호수 근처 식당에서 옛날 베드로가 잡았었다는 베드로고기 튀김도 먹어 보았습니다.
예수님 사실 때는 로마의 세금수탈로 주민들이 거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창조주께서 30년 동안을 이런 시골 한적한 곳에서 나무를 다루는 소소한 일을 하시며 가난한 살림을 하며 지내셨다는 게 우리 아이디어와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우리에게 삼십년을 그렇게 살라면 아마 좌절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원사역을 시작할 때도 도시가 아니라 이 갈릴리와 나사렛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배경을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성경 속에 계신 게 아니라 성경 밖으로 걸어 나오시길 바래서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원래 다니시던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16절을 보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부터 회당예배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예수님도 거룩한 생활을 습관을 들여 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충만케 되신 예수님과 그 이전의 예수님이 완전히 달라진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충만해지셔서 갑자기 설교를 잘하시게 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와 설교 사역과 사람을 돌보신 사역은 잘 하실 수 있도록 훈련되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니 반복적인 훈련을 통한 습관이 우리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전에 조지아 주립대학에서 ‘부의 세습’에 대해 연구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대 20년간 미국경제를 움직이던 백만장자들을 연구한 것입니다.
그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재벌의 80%가 중산층이나 노동자 가정 출신이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부를 세습 받은 게 아니라 좋은 습관을 물려 받았다는 것을 보고서는 밝힙니다.
우리 청소년 세대, 청년세대들은 일찍부터 좋은 믿음의 습관을 갖고 바른 생활습관을 갖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장년 세대는 이미 세속적으로 굳어진 습관들을 경건하게 고치도록 꾸준히 노력하며 바꿔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동안 해 오셨던 대로 오늘도 안식일 예배에서 말씀을 읽고 강론을 맡으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명쾌한 해석을 하셨기에 사람들이 좋아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설교 잘하는 목사가 인기가 있잖아요?그런데 오늘 설교는 그동안의 다른 안식일 설교하고는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설교하시기 전에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펼쳐 오늘 본문18절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우리 성경 이사야서 61장1절에 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당시 이렇게 이해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사야선지자가 바벨론 포로가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은혜의 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실제 바벨론포로 귀환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경을 읽으신 뒤 다시 성경을 말아서 사환에게 주시고 가르칠 때 자세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때 회당엔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소문이 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뭔가 다른 것을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때 입을 여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바벨론 포로해방의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 은혜의 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은혜의 해가 왔다니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대가 되고 희망이 생기는 말씀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가 ‘은혜가 된다, 옳다’라고 호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상한거예요.
아니, 저 사람이 지금 이 은혜의 해가 왔다고 선포하는 건 자기가 이 날의 주인공이라는 말이잖아? 자기가 메시야란 말인가?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 주민들은 은혜가 코앞까지 왔는데 그만 그 은혜를 발로 걷어 차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은혜의 해를 가져오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날들과 오늘 은혜의 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확고히 알고 우리는 실제로 이 은혜의 해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2. 이 이사야선지자의 예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십니다.
1)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은 가난한 자만 골라서 복음을 전한다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포함되지만 특히 영적인 궁핍을 말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부요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영적인 궁핍도 물질적인 궁핍 못지않게 밖으로 드러납니다.
성도들도 영적으로 풍성한 상태인지 믿음의 저수조 눈금이 바닥에 닿아 가는지 서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복음, 복된 소식은 무엇입니까?이제 부자가 된다는 것이겠죠.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이르면 사람들이 영적인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자산이 영이었던 사람들이 놀랍게도 영혼이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께서 거룩한 영을 부어주시면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를 모든 가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신기한 것은 영적인 부요가 찾아오면 마음과 물질과 몸에도 부요가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복적인 의미가 아니고 삶이 부요해질 수밖에 없게 우리를 복되게 교정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데도 게으르고, 낭비하고, 몸관리를 안하고, 무모한 사행심에 빠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아요?
믿음은 그렇기에 우리를 점점 번영하게 해 주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자진해서 낮아지고, 스스로 청빈하게 산다면 모를까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지기가 힘듭니다.
다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난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가난한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잖아요?
이렇게 가난했던 우리를 부요케 하신 복음을 믿는 우리를 날로 더 부요케 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2) 사람들은 포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조상들의 이집트와 바벨론 포로시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자신들의 생활도 포로생활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포로는 단지 물리적으로 노예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사탄과 죄에 포로가 된 상태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신이 지금 포로 상태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포로는 자기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풀려날 수 없습니다.
마귀의 마수에서 자유자재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 왜 많은 사람들이 운세를 보고 점을 칩니까?
우리나라에서 무속인을 찾아 점을 보는 연 인원이 일 억명이라고 합니다.
인구 4천5백인걸 볼 때, 일 년에 수차례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왜 점을 보고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하려고 합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앞에 놓인 악재를 피할 수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일을 당한 뒤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올해 삼재가 들어서’ 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는 마귀가 놓은 잔인한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격적으로 완전히 귀신들려 지배당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쫒아 주신 것은 포로 된 자를 풀어주시는 분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도박, 마약, 음란, 도벽, 각종 중독으로 묶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며 습득한 편견과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포로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을 뻔 했던 나사렛사람들이 결국 자신이 알아왔던 동네청년 예수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은혜의 문 앞에서 돌아선 것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성경은 사람들이 죄에 얽매여 있다고 합니다.
나름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부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잣대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은 범법자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은 나한테 잘못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합법이지만 예수님의 법으로는 불법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은 내가 벌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사는 게 합법이지만 예수님의 법으로는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한사람이 한 개씩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촌 평균에 비해 전부 다 너무 많이 갖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법에 맞춰 하나라도 고치고 바꿔보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그게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걸 알게 됩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게 포로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만이 마귀의 속박을 벗어나고 죄의 결박을 벗어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은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눈 먼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진실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속이려 작정하고 나서면 거의 다 속아 넘어갑니다.
거짓말 해보셨잖아요, 사람들이 믿어요 안 믿어요?
다 그대로 믿습니다.
또 사람들의 눈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눈이 열려야 봅니다.
존재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죄 문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 열어 놓으신 속죄의 길, 장차 받게 될 영원한 천국.
이런 것들은 자연인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3장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교회에 오면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팔로 우리를 인도해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걸 못보고 사람만 보이면 교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가정에서 화목하지 못한 것도 그렇습니다.
죄 많은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못 보기에 나를 실망시키는 가족들의 허물만 보이는 것이죠.
성령께서 매일 우리 눈에 안약을 발라주셔서 하나님을 밝히 보는 모두가 되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4) 사람들은 무언가에 눌려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에 짓눌린채 살아가는 게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심지어 자다가 가위에도 눌리잖아요?
그만큼 살면서 사람을 짓누르는 게 많다는 것입니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건강, 내일에 대한 염려, 당장 해결해야 할 근심, 갚아야 할 빚, 해도 해도 끝없이 반복되는 일, 공부, 설교, 이런 것들이 다 우리를 짓누릅니다.
서원이가 며칠전 카톡을 보내왔는데요.
다니는 교회 목사 사모님이 이번에 넷째를 낳았거든요.
금요 기도회 때 보니 앞에서 목사님이 ‘주여, 주여’하시는데 자식 하나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는 거예요.
우리를 짓누르는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해가 되면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고 하신것입니다.
예전엔 그 억압을 해결 할 방법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이 주신 교훈과 계명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사랑의 폭을 점점 넓혀 갈 때 대인관계의 억눌림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억누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게 짓누르는 근심에서 벗어날 실제적인 해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짓누르는 일들에서 평안을 주시고 실제 해결할 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시잖아요?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문제들을 말씀의 해법을 따라 벗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이 얼굴에 가득 내려 앉은 얼굴로 혼자 애쓰지 마시고 매일의 억누르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해결 받으며 자유하게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좀 솔직히 말해 봅시다.
정말 예수님이 주신 이런 은혜들을 온전히 누리고 계십니까?
믿음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항상 ‘이미’와 ‘아직’ 사이의 이 땅의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믿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이미 맞이했습니다.
법적인 서류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를 선언한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그 죄의 습관과 기억들이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에 머물러 있으면 가난과 억압과 영적인 답답함과 억눌림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장할수록 더 많은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누리는 이 은혜의 넘치는 축복 안에서 나만 풍요속의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죠.
믿음이 성장해야 가난도 벗어나고, 억압도 벗어나고 눌림에서도 벗어납니다.
미래의 나, 그 영광스러움이 영안으로 확실히 보이기에 오늘 당장의 어려움도 여유를 갖고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옛사람을 자꾸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새사람의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오늘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우리를 모든 억압과 짓눌림과 가난과 슬픔 속에서 건져내 주님의 은혜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혜로운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거의 은혜를 받을 뻔 했지만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립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마터면 가문도 별 것 없고 학벌도 없는 요셉의 아들을 위대하게 인정할 뻔 했네.
거의 은혜를 받을 뻔 했는데, 육체를 주장하는 편견과 경험과 이해타산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뒤에 보면 이들이 예수님을 몰고가서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제가 나사렛에 가봤는데 정말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있더군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미에 안 맞으면 자기 영역에서 사정없이 밀어냅니다.
또, 사람에겐 하던 것을 계속하고 믿던 것을 계속 믿으려는 현상유지편향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이득추구 성향보다 손해기피 성향이 더 크다고 합니다.
더 믿음이 자라길 원하기도 하지만 지금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현상유지편향성이 발목을 잡는 것이죠.
더 열심을 내고 싶지만 이익을 따르기 보단 당장 불편과 손해를 기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이 더 성장하고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데 걸림이 됩니다.
결국 풍족한 은혜의 해 안에 들어왔지만 늘 영적 빈곤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고 믿음대로 살려는 우리의 적극적이고 성실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번에 추미0장관이 검찰 개혁을 위해서는 안과 밖에서 줄탁동시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을 했죠.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고 껍질을 쪼는 걸 줄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는 걸 탁이라고 합니다.
줄탁이 동시에 이뤄져야 병아리가 부화되어 밖으로 나온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옛사람을 깨고 나오는 힘든 믿음의 싸움을 혼자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성경 말씀으로, 삶의 잔잔한 은혜로, 성도간의 교제와 기도응답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시련을 통해서도 알 속에 안주하지 않고 나오도록 도우십니다.
올해도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누리시기 위해 이렇게 성령님과 함께 믿음의 삶에 더욱 진보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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