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고난주간 설교 ( 누가복음23장32절-46절 : 세 개의 십자가)

남수연 2019. 4. 15. 01:35

https://www.youtube.com/watch?v=HhYTCGZ0JRM

<주일설교 영상>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지금도 그 기억이 아주 선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힘들어도 지켜봐야 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은 살아생전의 그 어떤 일보다 의미가 크잖아요?

그래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평생 안타까워하는 것이겠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자들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전 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만 아는 것 뿐 아니라 십자가형의 모든 과정을 기억하는 것은 신자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동안 사순절과 고난주간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형을 받으셨는지를 살펴보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십자가의 현장에 가보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중요한 구원의 진리와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느끼고 확신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을 거두시기까지 여섯 시간이 걸렸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셨을까요?

주님이 사셨던 삶은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만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동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람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고통 속에 뒤틀려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사형도구가 십자가입니다.

이런 형벌을 고안해 내고 시행하는 인간들의 내면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참 두렵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독한 아픔과 고통을 육체로 다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 같은 고통의 순간에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내게 대못을 박은 사람을 이미 용서하셨고 아버지께서도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의식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도 아닙니다.

사람은 극한의 순간에 모든 위선과 가면이 벗겨지고 가장 본질적인 게 나오잖아요?

육체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형편을 생각조차 못합니다.

내게 작은 아픔만 줘도 상대를 미워하는 게 인간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였을지라도 나를 괴롭게 하면 돌변하는 게 사람입니다.

내게 좀 나쁘게 했다고 친했던 사람도 원수를 삼잖아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숨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것이 주님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죄인을 향해 흘러나오는 끊어지지 않는 긍휼 때문이시잖아요?그 긍휼이 죽음의 순간에도 변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불변하시기에 변할 것이 없으십니다.

이런 주님의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면 평생 주님을 따르는 데 한없는 위로와 든든한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종잡을 수없이 변하는 분이라면 어떻게 평안히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주님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잖아요?

우리의 착함과 열심과 굳센 믿음에서만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나와 감사의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이것을 깨달은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감격스런 진술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연약하다고 그 사랑이 변하시겠습니까?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누구, 혈육보다, 친구보다, 동업자보다, 연인보다 더 강합니다.

또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습니까?

사실 내일 일도 모르잖아요?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다 우리 곁을 떠날지라도 예수님은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실패하고, 낙담하고, 힘든 순간들이 올 때마다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으로 위로와 도움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 십자가에 주변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이들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형이 집행 되던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십자가 구원의 여러 가지 진리들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을 못박은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 갖고 있었습니다.

사형수의 옷을 왜 나눠 가질까 이상하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빨래해 널어놓은 옷들을 훔쳐갈 만큼 가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당연히 의복이 더 귀했습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죄수의 옷을 제비 뽑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다윗의 시편에 이미 예언된 그래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구약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지는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가형이 진행 되는 중에는 가장 많은 예언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성취됩니다.

오래 전 기록된 구약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 둘 꿰어 맞춰지는 걸 보면 전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또 주님의 십자가 주변엔 예수님이 메시야이길 기대했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망감과 허탈감에 빠져 십자가의 주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최후의 순간에 일어날 기적을 바라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걸 지켜보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48절에서 기록합니다.

이 외에 악한 감정으로 예수님을 모욕하는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질병에서 구원하신 것도 트집을 잡고 조롱합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이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주님이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신다는 것을 알 리가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죠.

성경과 성령님은 주님의 십자가의 형벌이 우리가 당했어야 할 형벌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중해서 보려고 하는 예수님 좌우의 두 강도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세 개의 십자가죠.

이 두 강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못 박히게 된 것은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 또한 구약성경에 이미 주님이 죄인들 사이에서 죽으실 것이 예언 된 대로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우리가 잘 아는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한 부분이죠.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 범죄자들과 함께 범죄자로 취급되실 것이 미리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언도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간교한 자입니다.

유대인들의 압박에 못 이겨 무죄한 주님에게 사형선고를 했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추종하던 사람들이 일으킬지 모르는 폭동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주목받지 못하도록 사형당해 마땅한 강도들의 형을 그날 같이 집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때가 유월절 명절 전인데 누가 사형을 집행시키겠습니까?

명절에는 오히려 특사방면을 하는 게 맞는 것이죠.

예수님을 한낮 범죄자로 보이게 행악자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계략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계획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범죄자가 되셔서 심판을 받으신 거잖아요?또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죄인의 십자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죄인의 십자가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십자가는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39절에 보면 한 십자가의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했다고 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40절을 보면 다른 한명의 행악자는 오히려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하며 죽었고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강도 중 하나에 해당된다는 것이잖아요?두 개의 십자가 외에 다른 어정쩡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행악자처럼 다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선언하셨잖아요?인간의 죽음은 죄값이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증거라고 합니다.죄인의 숙명대로 숨을 거두고, 평생 지은 죄의 댓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행악자의 결론이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는 것이 모든 죄인에게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강도는 어땠을까요?이 사람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본장8절에 보면 헤롯왕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오는 중에 이 강도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다 모여 들어 소동하는 걸 보았습니다.

27절에 보면 백성들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죄수가 아니라는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예수님의 죄목을 적은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이 대망하는 메시야 왕을 자칭했기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뜻이죠.

또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 누구와도 남달랐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의연하게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은 분명히 남달랐을 거 아니예요?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저 사람은 누구일까, 메시야라고 사기 쳐서 죽는 걸까, 아니라면 정말 메시야일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잖아요?주님의 모습 어디에서도 비열한 사기꾼이나 정치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강도는 예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고스란히 제 몸으로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 편의 강도는 어떻습니까?

마태복음을 보면 처음엔 이 강도 역시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6시간 동안 이 사람에게 신비롭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강도가 하는 말을 보면 경건한 성도들의 입에서 나옴직한 숭고한 믿음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너무 기이한 일이죠.

이 사람의 말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의 믿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 또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하는 말에 잘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40절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무 이상하죠?

이 강도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를 잘 못 짓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모함 받아 죽으며 하는 소리가 있잖아요?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유대인들은 물론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강도가 진작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강도로 살다 사형까지 당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분명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악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 인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경외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41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 입에서 모든 것을 술술 자백하고 양심으로 깊이 그 죄를 자책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은 죄에 대해 핑계를 대고 남을 탓합니다.

마약을 하고도 잘 때 남이 자기에게 주사를 놨다고 그러잖아요?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피의자가 되면 부인하고 기자회견까지 하지만 나중엔 죄를 지었다고 밝혀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과 양심에 비추어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성도 된 징표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전혀 안 하는 것이 성도가 된 특징이 아닙니다.

잘못한 뒤에 그것을 바로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냐가 핵심인 것이죠.

그걸 수없이 반복하며 점점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게 나 자신을 너무 괴롭게 하니 아예 죄를 안 짓고 싶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사기꾼이 아니고 옳은 분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행하신대로 구원자 메시야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것은 첫 번째 강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교 사기꾼이고 행악자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명료한 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간단한 논리조차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편을 선택했는지 잘 모르니 얼마나 큰 비극이고 재앙입니까?

그리고 구원받은 강도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지금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참고 있는 주님은 곧 죽으실 분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당신의 나라가 임할 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게 죽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할 거라고 알아왔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가 올 것이고 영원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이 강도와 같이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우리는 의문을 갖고 생각합니다.

왜 한편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심판에 이르렀고 한편 강도는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요?구원의 뼈대가 되는 원칙적인 교리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구주로 믿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이 강도에겐 당연히 성령께서 감화하고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강도에게는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두 개의 십자가를 세워 놓으시고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성경과 양심과 지식을 동원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쪽 강도가 예수님이 옳으신 것을 충분히 알만했지만 끝까지 자기 고집과 악한 감정으로 믿지 않은 것은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충분히 알면서도 믿지 않는 강팍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경은 믿으라고 말씀했지 누구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실지, 언제 역사하실지를 따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강도처럼 죽음의 순간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예수님을 부인할 것인지 아니면 구주로 믿을 것인지 단 두 개의 십자가만 있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사랑이고 완전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게 된 것은 내가 영리해서가 아닙니다.

과거엔 예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등졌던 우리입니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부드럽게 감화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이렇게 주님을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죄로 한평생을 살다 영원히 심판을 받을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창조주의 사랑이 피가 되어 주룩주룩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 대신 아들을 심판해야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참담한 마음이 모든 빛을 가려 온 땅엔 어둠이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하나님과 죄인을 막고 있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쫙 갈라지며 아버지께 갈 길이 열렸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먼저는 두 개의 십자가를 보고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본문 앞 28절을 보면 주님을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준다면 큰 위로가 되죠.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울기보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부족한 믿음과 구원을 위해 안타깝게 울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죄값을 치러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이 깨달은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를 영원한 낙원,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