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1절부터 연결해서 보는 것이 내용을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기도문의 내용을 따라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하게 되지 못하겠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수되는 일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용할 양식,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구요.
또 죄 문제를 기도하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나,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시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언론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통계를 내 보았다고 합니다.
세 명 중 한 명은 10분미만으로 기도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10분에서 30분사이 기도한다는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가장 즐겨하는 기도는 1위가 회개기도, 2위가 중보기도, 3위는 식기도였습니다.
기도는 매주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누가도 기도의 중요함을 가장 강조했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에 ‘기도’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크레이크 바로톨로뮤라는 기독교 작가는 누가복음을 ‘기도의 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모두 기도를 강조하지만 특히 누가복음을 읽으면 기도의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심장이 멎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 생명에 심각한 위기가 온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데살로니가전서5장에서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기막힌 도움이 온다.
평생 5만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죠지 뮐러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한 주 기도하지 않은 이유가 이 중에 들어있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실까 하는 의혹
영적으로 게으르고 태만해서
삶이 풍요롭고 안락해서
마음과 육체가 너무 분주하고 바빠서
대중매체와 오락 때문에
이 중에 기도하지 못했던 이유가 들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문제점들을 잘 극복하고 기가 막힌 도움이 오는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기도의 핵심 주제가 9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따르니 열심히 기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와 관련 된 두 개의 이야기를 앞뒤에 배치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 나온 비유는 한 밤중에 찾아와 떡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이야기이고 뒤에 나온 비유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한 밤중에 떡을 빌리러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핵심은 기도응답의 확실성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기도에 대한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지만 오늘은 가장 뚜렷하게 의도하신 주제만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밤중 사람들이 다 잠든 시각에 이웃집 친구를 찾아가 떡 세덩이를 좀 빌려 달라고 합니다.
자기 친구가 여행 끝에 막 찾아 왔는데 집에 대접할 음식이 없다고 하죠.
그렇다면 잠자리에 들었던 친구가 일어나 떡을 주겠습니까, 안 주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죠.
‘아무리 귀찮아도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친구는 없다.’
속으로 욕을 할지언정 일어나서 떡을 챙겨줄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꼭 친구이기 때문에 주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일어나 온 식구의 잠을 깨기 싫다면 누운 채로 없다고 소리쳐 보낼 수도 있잖아요?
우리도 친구가 돈 좀 빌려달라면 있으면서도 없다고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떡을 받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찾아와 강청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긴급한 상황인지를 알 것이기에 떡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한 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떡을 꾸러 왔겠냐는 것이죠.
사람이 그 정도 인정은 있잖아요?
그럼 이 비유의 요지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자기 편의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친구의 처지가 급하고 딱하다고 생각하면 힘이 되는대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은 어떠시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우리의 친구라고 자청하셨잖아요?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신 것은 가장 진실 되고 사랑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 좋은 친구이시기에 우리의 절박한 기도의 요청에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시겠다고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라는 것이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유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로 응답의 확실성을 다시한번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골라 주는 아버지를 비유로 들으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처지를 아시고 기도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의 의혹을 불식시키시기 위해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아무리 아버지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도 일반적으로 이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대부분 세상 아버지들의 자기 자식 사랑은 대단하죠.
예수님 때도 아버지들은 똑같았나 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구워달라는 데 물뱀을 잡아다 주겠느냐, 삶은 계란이 먹고 싶다는 데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는 전갈을 주겠냐는 것입니다.
설령 악당이라도 자식은 귀하게 여기고 힘에 부치도록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이번에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5060세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이 있습니다.
거기보니 네 집 중 세 집이 성인자녀들에게 생활비를 대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후준비를 완벽하게 갖췄다는 사람들은 열 명 중 1명도 되지 않고 마땅한 노후 대책이 없다는 사람들이 60%가 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노후에 자식들의 부양을 원치 않는 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부양의 대물림을 끊겠다는 것이죠.
육신의 부모도 자식 사랑이 이런 데,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어떤 아버지십니까?
육신의 아버지처럼 악하지도 않고 능력에 한계도 없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아버지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위하거든 하물며 그 부성애를 만드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위하지 않으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아끼셔서 이 절박한 기도를 들어주실까를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고 그 자신도 같은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속을 뒤집어 보이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그걸 캐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아버지는 구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심을 믿으시고 범사에 주님께 의논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기도응답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에 보면 하늘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냐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좋은 것을 한 단계 더 해석해서 들려줍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최고의 응답이십니다.
모든 종류의 기도응답은 성령님을 통해서 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간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나서 감나무 밑에 누워서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 다음엔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것이 기도자체를 말씀한다면 찾는다는 것은 기도한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모든 과정을 누가 인도하시냐면 바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직접 도와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기도응답을 찾아가도록 지혜를 주시고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기도응답을 받기도 전에 지쳐서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이 맞는 문인지 분별하게 하시고 그 문을 향해 지속적으로 두드리며 노력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을 받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기도제목에 앞서 성령받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세세한 기도응답에 우선시 되는 더 중요한 기도가 무엇인지로 결론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을 구해고 받아야 하겠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영의 상태에서 다시 영이 되살아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모든 사람은 모태에서 날 때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선악과 언약을 위반하고 범죄 했을 때, 계약파기의 결과인 죽음이 즉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영적 죽음은 즉시 일어났고 육체의 죽음은 아담이 죽은 930살이 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범죄와 동시에 즉시 영이 죽은 아담은 영이 죽은 아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영의 아담이 산 영의 아들을 낳을 수는 없는 것이죠.
사람의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죽은 영에 숨을 불어 넣으셔야 합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으시자 살아있는 영의 존재가 된 것과 같은 것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숨을 불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잖아요?
이렇게 죽은 영이 다시 산 영이 되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지가 생기고 자신의 죄인 된 상태와 영생에 대해 인식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사도의 입을 통해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될지를 확실히 밝혀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피조물임을 모르고 창조주하나님과 관계없이 되는대로 산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살면 큰일나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똑같은 말 두 번 반복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는 계속 말해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영혼에 가장 긴급하고 가장 은혜로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듣는 사람도 이 말씀은 질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약속에 대해 신실하게 이행하실 것입니다.
누구든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각자가 이 말씀에 진실되게 반응하고 성령을 구하면 오늘 예수님이 약속하신 엄청난 선물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들은 성령충만 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삶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가장 큰 힘은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옵니다.
뭔가 현 상태에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우리 마음이 나쁜 상태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성품과 권능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스며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나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도 불안하고, 부정적이 되고, 속이 좁아지고, 자기 자신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자신감이 떨어지기에 모든 게 막연히 두렵습니다.
미래가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좌절감도 생깁니다.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게 불신앙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양심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이고 현실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은 늘 그렇잖아요?
지나치게 현실만 보이는게 문제인 것이죠.
오히려 막연히 모든 게 잘 될 거라 생각하며 요행을 바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자가 더 불신앙이고 현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관적이고 나약한 마음상태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하신 감화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항상 성령께서 충만하게 우리 생각을 주장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바른 길을 제시하고 바른 교훈으로 인도하실 때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은혜가 하루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 시간 기도했다고 내일 기도를 쉰다는 계산은 오산입니다.
또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도는 자연종교들이 하는 명상수련이나 기복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과 공유하고 하나님의 좋은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능력과 축복이 우리에게서 이뤄지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로 삶 전체를 하나님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는 것은 우리 본성이나 바쁜 사회여건 등으로 인해 쉽지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계신 성도님들은 더욱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기도는 없습니다.
구한 이상 하늘 아버지께서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부끄러운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몇 번을 기도해도 후회가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저를 책망하시기는커녕 예기치 못했던 깜짝 선물을 주셔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가기만 해도 우리를 웰컴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저는 정말 절감합니다.
아무리 한심한 일도, 가망 없는 문제도 예수님은 맡아주시고 좋은 결과로 인도해 주십니다.
지난주도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그런대로 살만 했다는 증거겠죠.
그렇게 평범하고 소소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에 일정한 정도 신경 쓰며 살아가지 않으면 점점 우리 마음은 본성대로 세속에 빠집니다.
세상의 시시한 것에 시간을 뺏기고 죄성이 선호하는 일에 빠져듭니다.
의식주에 매달리게 되고 세상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더 편해 보이고 더 화려해 보이는 세상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 갑니다.
선하고 바르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길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아이들이 자꾸 단 것을 먹으면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점점 싫어하는 이치나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구해야 할 어려운 문제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그 내용을 줄줄 암송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삶의 세부사항들을 매일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지 못하면 우리가 빠질 위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분들은 성령을 주시길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며 진지하게 어려움을 털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은 매일 성령충만케 해주셔서 우리의 전 인격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해지고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평균기도시간이 십 분에서 삼십분 사이라고 했죠.
우리 모두가 평균 성도들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세상에서 우리 눈을 거두고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매일 꾸준한 기도생활을 해나가실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밤중에 찾아와 조르는 그런 우리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점점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삶 전체를 하나님과 공유해서 능력있게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8년5월13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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