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 동안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십자가 사역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속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본을 반복해서 잘 다져야 합니다.
오늘 삭개오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여리고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키 작은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간 이야기는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이 일은 그냥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알려주려는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이 사건 뒤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모두가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성경은 믿음이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아래에 우리는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믿음을 늘 점검하며 지켜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을 ‘잃어버린 자’에 두려고 합니다.
구원받은 잃어버린 자 삭개오를 통해 우리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잘 비교해 보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삭개오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조국 이스라엘은 국권을 잃고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자유자가 아니라 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종이라는 성경말씀과 같은 것이죠.
유대인들은 뼈 빠지게 고생해서 온갖 사치를 누리는 로마제국의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멍에를 메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사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매일 힘들게 일하고 땀흘리지만 그만한 충분한 댓가를 받는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생계형 알바생들의 평균 한달 소득이 68만9000원이라니 정당한 댓가라 생각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들이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자유민인줄 압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됩니까?
힘들다고 직장 그만둘 수 있습니까, 집안 일을 하루라도 파업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습니까?
나이 들면 몸도 족쇄입니다.
또 생애의 조건을 누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삭개오는 내세울 것 없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 게 분명합니다.
부모가 번듯했다면 삭개오를 세리가 되게 하진 않았겠죠.
우리 생각엔 세리가 세무사 정도 되고 세리장이면 세무서장 쯤 되는 것 같지만 당시엔 전혀 아닙니다.
로마관료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세리들을 뽑아서 동족들의 세금을 걷게 했습니다.
세리에겐 봉급을 주는 게 아니라 정부에 입금할 할당량을 정해주고 거기다 알아서 자기 몫을 붙여 먹으라는 식이었습니다.
합법적인 도둑질이다 보니 과하게 세금을 붙이기 마련인 것이죠.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빌붙어 먹고 살며 동족을 괴롭히는 세리를 가장 악질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창기와 동급으로 취급했고 유대교 회당 모임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집안이 좋았다면 이렇게 손가락질 받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는 좋고, 먹고 살 방법은 없으니 세리가 된 것이죠.
우리가 처한 환경, 지금 내 모습이 내가 선택하고 원했던 게 아닙니다.
누구나 더 행복하고 부유한 가정을 원하지만 원대로 되지는 못했죠.
그래서 자식들이라도 잘 되길 바라는 근심이 끊이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외모도 만족스럽게 타고나질 못했습니다.
얼마나 키가 작았으면 키 작은 삭개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겠어요.
저도 큰 키가 아니라서 학창시절에 매우 불만이었습니다.
어지간히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다 생긴 것에 열등감을 갖고 삽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 이 땅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늘 사람들의 경멸의 눈초리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삐죽거리며 수근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세상에서 삭개오만 그런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갑니까?
솔직히 세상에서 누가 내게 순전한 호의를 갖고 변치 않고 잘 해줍니까?
주위의 시선은 내 행동과 말과 일하는 모습을 쉴 새 없이 관찰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완전히 나를 이해하고 넓은 아량으로 무조건 덮어 주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람 만나는 게 갈수록 두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잖아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생활이 자유인줄 알지만 사람은 모든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환경에 속박되고,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줄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삭개오처럼 다 외롭고 서글픈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들을 찾아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삭개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려진 자들은 이 땅의 삶에서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든, 고달프게 살든, 단지 이 땅의 일들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대만족인 사람들은 믿음 같기가 힘듭니다.
잃어버린 자들의 심중 깊은 곳에는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본향을 막연히 인식합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기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죠.
어려서 해외에 입양되었던 사람들이 간혹 뿌리를 찾아보겠다고 단서도 없이 한국에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뿌리가 한국이기에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죠.
삭개오의 모습은 이런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실력을 인정받아 세관장이 되었지만 그에겐 채워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왕따 당해서가 아닙니다.
부자인데 사람들한테 욕 좀 먹으면 어떻습니까?
‘쥐뿔도 없는 것들이’ 그러면서 피차 무시하고 살면 되는 것이죠.
삭개오에겐 현실의 삶 그 이상의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원도 보다 작은 땅덩어리인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받아주셨다잖아요?
고위층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라고 비웃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로 믿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마을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그걸 말해주는 것이죠.
그는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면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심판을 받을 거잖아요?
그에게는 영원을 느끼고 갈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해답을 가진 예수님이 자기 마을을 지나가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부자들은 아무 대나 얼굴 비치지 않잖아요?
게다가 자기를 죄인 취급하는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하는 그 인파 속에 섞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 싶은 그의 열망이 수그러들지가 않은 것입니다.
삭개오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될 것 같습니까?
세관장 정도 되려면 적어도 오십은 넘지 않았겠습니까?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이 되자 체면 불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3,4절을 잘 보면 삭개오가 얼마나 예수님을 보고자 애쓰는지가 느껴집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헬라어의 시제로 보면 계속해서 보기 위해 애썼다는 의미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 쯤 되면 내면의 희미했던 갈망이 점점 강하게 반응합니다.
먹고 사는 일, 좋아하는 일, 성취해야 할 일들로 정신없이 살 때는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의식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다가 삶의 허무를 느끼는 시기에, 삶이 두려울 때, 기대었던 것들이 무너질 때, 감당키 어려운 충격을 느낄 때, 저녁 해가 저물 때.
이런 일로 마음의 틈이 벌어질 때 영원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납니다.
‘이제 내가 교회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믿음을 결단해야 할 텐데.’
그런 시기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석처럼 끌려오게 되는 것이죠.
믿음을 가진 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오라고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흔들어 놓으십니다.
예수님이 왜 굳이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경로를 택하셨겠습니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여리고를 들렀다는 것은 상당히 우회해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저도 여리고에 가 보았는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직선도로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된 삭개오를 찾으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영생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있습니까?
그래야 예수님께서 찾아 오십니다.
삭개오가 그냥 구경거리로 나갔다가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이렇게 구원을 사모하는 잃어버린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잖아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 들려주면 잃어버린 주님의 양들은 그 음성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따라야 할 목자의 음성이라는 것을 결국 알아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찾아와 삭개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유하여야 하겠다.
이 음성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단지 ‘내가 오늘 밤 네 집에서 신세 좀 져야 하겠다‘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젠 예수님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삭개오야, 이제 됐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돈이면 될 줄 알고 힘들고 모진 세상 이를 악물고 살았지. 알아주는 사람 없어 외롭고 미움 받으며 괴로웠지. 그걸로 족하다. 이제 내가 네게 들어가야겠다. 이제 나와함께 가자.’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렸던 우리 모두를 다 이렇게 불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우리 인생이 과거에 비할 때 얼마나 복되게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당한 앞의 고민과 고통들이 하나 하나 달라진 것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삽니다.
아직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더 가까이 와주시길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삭개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반드시 갈망하고 사모하는 모두를 찾아내 구원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삭개오와 같은 잃어버린 자 중에서 죄인을 찾아 오십니다.
삭개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잃어버린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모두가 죄인이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부정축재한 경제 사범입니다.
가난한 동족들의 고혈을 빼내 부자가 된 파렴치한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수군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이 말뜻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날 여리고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죄인 삭개오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미투 폭풍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죠.
순박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정을 느끼는 아름다운 시를 써서 존경받던 노시인의 추한 모습에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검사, 의사, 연극인, 배우, 교수에 이르기까지 그 추악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으로 성차별, 성추행에 무관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람들의 죄에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깨끗할까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모두가 밝혀질 죄인들입니다.
삭개오는 남들이 자신을 괜히 죄인 취급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했고 주님 보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올 땐 거짓말 좀 하고, 부당 이익을 챙기고, 방탕하고, 남을 욕하는 것들을 죄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점점 내면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죄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불의에 대한 애통함이 깊어지는 반면 남의 죄에 대해선 점점 입이 무거워지는 것이죠.
우리에게 이런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까?
그게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이해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양심을 새롭게 해주시고 죄를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삭개오에게는 기적 같은 변화가 생깁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삭개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주셨다면 이제 그렇게 선망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확정해 주시잖아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성경에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즉시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 기쁨입니다.
삭개오는 분명히 기분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음울하고 냉소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많죠.
구원은 사람을 바꾸고 그동안의 경험과 가치관을 뒤짚어 놓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구원의 큰 기쁨이 분명히 존재하는 줄 믿습니다.
바쁘고 힘겹게 살다보면 이 기쁨이 사라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매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로 기도할 때 언제든 그 기쁨이 다시 솟아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 삶은 삭개오 같은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에게 유일한 힘과 희망은 돈이었잖아요?
재산의 절반을 내 놓는다면 그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닙니다.
그의 의지했던 힘을 잃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걷어낸 것을 네 배로 변상하면 오히려 가난해 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엔 가난이 두렵고 돈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한순간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돈이 가장 큰 힘이고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주인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이젠 돈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가장 큰 가치이고 가장 위대한 힘이 되십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기에 돈을 벌고 또 많이 벌려고 합니다.
여전히 돈 문제로 고민하고 근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돈이 우리 최대의 목적은 아닙니다.
너무 부자 되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남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면 먹고살 만큼 축복해주십니다.
부자는 부자로 태어나거나, 하나님이 뜻이 있어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부자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거라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다 진작 부자가 되었어야죠.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어느 순간 다시 돈에 노예가 됩니다.
돈 때문에 믿음을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젊은 부자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나이에 부자에다 관료였다면 집안이 좋았다는 얘기입니다.
거기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하는 이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선한 선생이시여 제가 무엇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죠?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부자관원은 재산이 많아서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삭개오와 무엇이 다릅니까?
자기가 신봉하는 것을 버려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사람의 반응을 보면 영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자관원은 돈을 버리라고 했더니 차라리 영생을 버렸습니다.
삭개오에겐 평생 뒤쫒던 돈이 영생과 결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구원과 영원한 삶을 원하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잃은 자를 되찾으려는 예수님의 사랑과 이젠 자기의 모든 가치를 내 놓아도 좋다는 돌아온 자의 감격을 진하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때 패전을 직감한 나치군은 수용소의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 자기 가슴에 붙어 있는 수감 번호가 불리워지면 밖으로 나가야 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모녀가 함께 수감 된 방에 군인들이 들이 닥쳐 수감번호들을 불러댔습니다.
딸의 수감번호가 불리우자 엄마는 다급하게 자기의 옷을 벗어 어린 딸에게 입혀주고 자기는 딸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전쟁이 끝나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풀려난 딸은 엄마가 왜 옷을 바꿔 입고 나갔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같은 우리 인생들을 대신해 죄인의 옷을 입고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잃고 당하던 수많은 고통의 짐을 벗겨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불의한 삶을 회개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했습니다.
돌아온 자에겐 그런 삶이 따라오는 것이 진정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이후에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는 삭개오가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어 가이샤랴지방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장차 어떻게 될까요?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우리 삶을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며 점점 더 가치 있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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