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세계불평등보고서에 보면 미국인들의 경우 지난 40년간 하위 50%의 소득은 늘어난 게 없다고 분석합니다.
40년간 눈부신 미국경제성장의 혜택을 절반의 국민들은 전혀 못 받고 있다는 것이죠.
막대한 부를 일부 부자들이 다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부의 편중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상위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요즘은 부동산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이 생기고 있습니다.
최근 치솟는 짒 값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불행하다고 하죠.
물론 상위1%에 해당하는 다주택자는 예외겠지만요.
무주택자들은 아파트 가진 사람들이 그냥 자고 일어나기만 해도 돈을 번다는 생각에 속으로 울분이 쌓여갑니다.
집 한 채 가진 중산층이라 해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로 자식들 결혼도 시키고 노후대책도 세워야 하는데 자식들 집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집을 유산으로 받지 않는 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영원한 세입자로 남기가 쉽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자에 대한 선망과 질투는 점점 깊어지는 것이겠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지 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 마음에 한 줄 위로의 빛이 될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부자가 등장합니다.
고가의 옷을 입고 매일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던 부자는 역시나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음식찌꺼기로 연명하던 병든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래저래 우리 입장에선 마음이 편치 않은 말씀입니다.
천국은 좋지만 그렇다고 이생에서 가난하고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는 않잖아요?
또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은 부자가 지옥에 간 걸 생각하면 왠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이 그동안 많이 들어왔던 뻔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은혜와 용기와 도전을 주시는 복된 말씀이 되리라 믿습니다.
1. 예수님의 비유에서 부자는 어떻게 살았기에 음부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19절을 보면 그는 고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습니다.
누구나 한번 살아 보고 싶은 삶이죠.
그런데 그의 호화주택의 대문 앞에는 헌데 투성이의 거지인 나사로가 오래 버려져 있었습니다.
고급 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죠.
왜 부자는 종을 시켜 나사로를 치워버리지 않았을까요?
나사로가 대문 앞에서 얻어 먹게 한 것만 해도 꽤 괜찮은 선행이지 않을까요?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의무가 율법으로 명시화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도 구제를 안 하는 사람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려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구제를 일삼았습니다.
그걸 보고 예수님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구제활동에 내면의 동기가 선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죠.
부자는 그래서 나사로를 대문 앞에 둔 것입니다.
호화로운 자기의 생활을 과시할 뿐 아니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거지 나사로를 거둬 먹이고 있다는 선행을 홍보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사로는 그의 고달픈 일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온갖 좋은 것을 누리며 럭셔리하게 살던 부자도 돈으로 생명을 더 살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우리도 다 죽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 뒤에 사람들이 가야 할 두 장소가 있다는 걸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나사로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삶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과 용기가 생기고, 기도를 통해 좋은 길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
위기와 시련을 만날 때야말로 신앙의 힘을 알게 되죠.
그러나 현재 이런 삶의 혜택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게 될 장소가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안도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번도 꿈꾸지 못했던 천국의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어봐야 알지, 혹은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또 다른 세상이 있냐고 할지 모릅니다.
누가 사후세계를 알겠습니까?
막연한 사람들의 말을 믿느니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겠습니다.
내세가 없는데 뭐하러 이런 교훈을 가르치시겠어요?
부자는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 끔찍한 음부로 보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진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부자는 죽음 이후에 놓여 진 자기 처지에 깜짝 놀랐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겠죠.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늘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세상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구원의 언약을 하셨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죠.
유대민족들은 이 언약을 자기 민족의 구원으로 오해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사람으로서 전통에 따라 종교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안식일도 지키고 유월절엔 양도 잡고 십일조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더니 아브라함의 품이 아니라 음부, 지옥이었습니다.
단지 교회에 속했다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인 부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요?
대문 앞에 버려졌던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서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도 다 위험합니다.
우리도 돈 벌어서 나와 식구들을 위해 썼지 언제 집 앞 거지들을 돌보는 데 썼나요?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부자가 자기 입으로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형제가 다섯 명이 있으니 나사로를 보내서 지옥이 진짜 있으니 이곳에 절대로 오지 말라고 증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다 자기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서 말하면 이들이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할 것이라고 하지 않죠.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개하면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기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회개했기에 천국에 갔다는 것이죠.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처음 구속사역을 시작하실 때 촉구했던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회개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17장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삶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자의 모습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삶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어려울 것 없이 하나님을 모르던 때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 됩니다.
다 그렇게 살아 보았잖아요?
우선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못 들어서가 아니라 들었어도 인정하지 않고 공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의 최종 목적은 오직 나를 성취하고 내가 행복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내 기준을 따라 선을 긋고 때로는 내 이익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벗어난 명백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특별한 피조물 인간에게 부여하신 명령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이 명령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이고 그런 죄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들 회개 하셨습니까?
부자의 삶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일서가 그 마음을 이렇게 판단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그런 사람은 하나님 모른다는 거예요.
부자의 냉냉하고 이기적인 삶은 그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외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한 나사로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굳이 부자와 비교할 사람을 거지 나사로로 삼았습니다.
온몸에 종기가 터지고 자기 힘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 개떼가 상처를 핥아대도 쫓아 버릴 힘도 없는 절대 무력한 나사로를 내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사로는 유대인의 절기를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남을 구제하지도 못했고, 율법이 정한 의무를 한 개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자의 대표로 이런 나사로를 등장시키신 것일까요?
자신이 이렇게 의를 행할 능력이 일도 없는 영적 거지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러 오셨는지를 비로서 깨닫고 구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죽었다 깨나도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구원받을만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죠.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 의롭다고 인정 될 행위를 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하나 정해서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게 지켜보려고 하면 담박에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나온 것 하나, 예를 들어 ‘비판하지 말라’ 이거 됩니까, 안됩니까?
비판하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는 순간 이미 마음은 그 사람을 비판했잖아요.
잘못하고 후회하고 회개하고 다시 해보겠다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거의 똑같지 않습니까?
매 주일 설교 듣고 좀 달리 살아봐야지 하고 돌아가지만 똑같이 살다 다시 나오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정말 성경대로 성숙하고 성화되어 죽는 분들 보셨습니까?
다들 본성의 저항에 막혀 낑낑대다 별 성과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거지 나사로처럼 아무 것도 가져갈 것 없는 볼품없는 영혼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의롭게 고친다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당장 바르게 고치라고 몰아 붙이지 않으십니다.
간혹 말씀대로 지키려고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엔 오히려 기쁨도 없고 이상하게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억압을 풀어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지 또 다른 종교에 억압되라고 부르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가 자유하길 원하시는지 죄 짓는 자유까지 허용하시잖아요?
억지로 복종시키려면 애초에 선악과를 왜 만드셨겠어요?
어떤 인위적인 억압으로 자신을 수양하는 사람에겐 점점 관대함과 자유로움과 인간미가 없어집니다.
그런 사람 앞에 가면 뭘 잘못했을까봐 왠지 마음이 불편해 지죠.
그게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 대충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반대로 너무 철저히 해서 그게 자기의 의가 되버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다음 장에서 바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사백구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강하게 우리의 선한 삶을 독려하시는 건 그렇지 않으면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하지만 되지 않는 그런 긴장관계 속에서 늘 실패하는 우리를 용서하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용서받는 것처럼 의롭지 못한 저 사람도 용서하라시는 것이구요.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신앙의 올바른 변화도 은혜가 강력한 동기이고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활에도 담대함을 얻고 말씀대로 지키고 싶은 자발적인 마음이 일어납니다.
아이들 억지로 공부시키고, 잘못 된 것 뜯어 고치려고 한다고 됩니까?
억지로 시키면 더 하기 싫어합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권하고 기다려 주고 다독여 주면 아이들이 스스로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 받기 위한 채널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주일설교는 성도들이 믿음을 갖고 은혜의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점점 예수님께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야 믿어집니다.
또 우리가 충만한 은혜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 그 힘으로 점점 더 즐겁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실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부자의 삶에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부자의 냉냉하고 인색한 삶을 통해 분명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도가 이 말씀 안에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자, 가난한 자에 대해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도 살아가기에 늘 빠듯하고 남을 도와 줄만한 여력이 그렇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네의 모든 거지를 도와줄 수는 없어도 내 집 대문 앞에 불쌍한 사람 하나는 좀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도울 마음을 주시고 감동하실 때 마음을 닫지 말고 조금이라도 선의를 베풀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도 지난 주 긴급한 기도요청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기도만 하려고 했는데, 딱한 처지가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도 별로 여유가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기도와 함께 돈도 조금 보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우리 삶의 언저리에 데려다 놓으십니다.
큰 도움은 아니라 해도 다소 힘을 보태주고 위로해 주며 예수님의 마음을 늘 보여주며 사는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대문 밖에 만 나사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문 안에도 나사로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나사로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위로의 말과 다독이는 손길이 필요한 외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이 부자가 두고 온 자기 형제를 걱정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성경에서 배워 회개해야 하듯 우리 가족들도 이생에서 십자가의 속죄와 회개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새가족초청예배를 준비하는 것이고 오늘 다시한번 이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의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이 불쌍한 나사로에게 살아생전 그 이름은 우수꽝스러울 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인들이 부자의 상에서 남은 음식을 던져주며 뭐라고 불렀겠어요?
‘어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야’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더 비참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기의 삶이 그것 밖에 안되었으니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잘 하려고 하지만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모습에 낙담이 됩니다.
차라리 내가 교회 다닌다는 것을 누가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사로 같이 최악의 생애 중에서도 하나님은 나사로를 도우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소망하도록 그를 도우시고 마침내 나사로를 그 품에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후의 영원한 삶을 생각하면 이 땅의 기준으로 얼마나 잘 먹고 살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처럼 살면 뭐하겠어요?
예수님은 왜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거지 나사로를 등장시키셨습니까?
잠시 부자처럼 살다 고통스러운 영원을 보내는 것보다 최악의 경우 나사로처럼 살았다 해도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상기하며 힘든 삶에서 용기를 얻으시고 믿음에 강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8년9월16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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