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18장9절-14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남수연 2019. 3. 12. 23:31

2019년3월10일 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WvmOB9omeg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우리가 아는 그 사람과 본인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서로 불일치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상담학에도 현실적 자아가 있고 타인이 본 자아가 있다고 하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심과 동시에 사람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잘 관찰해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를 잘 모른다니 인생이 얼마나 갑갑하고 불리하겠습니까?
오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우리를 비춰 볼 거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확인하게 하시고 또 더 굳건하게 하시는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좋은 기도와 나쁜 기도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보면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기도 잘 못했다고 구원을 못 받는 건 이상하잖아요?

물론 기도 내용만 들어도 바리새인의 기도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있죠.

그러나 무슨 내용, 무슨 말로 간구하느냐 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겐 어떤 태도로 대할지를 정해 놓고 삽니다.

직장 상사를 대할 때, 가족을 대할 때, 손님을 대할 때, 아이들을 대할 때가 다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 사람을 만나도 정해진 태도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오죠.

그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과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태도가 나옵니다.

지금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예배 드리느냐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들의 기도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태도에 주목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메시지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이죠.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많이 책망하시고 잘못을 지적하셨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겠죠.

이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유대교의 경건주의자들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 뜻이 말해주듯이 바리새인들은 세속과 구별되어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유대교의 분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에는 없던 계층인데 신약성경에 등장하죠.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말라기에서 마태복음 사이에는 사백년 정도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대적으로는 헬라제국의 영향이 이스라엘로 쏟아져 들어올 때입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고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분파가 바리새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냈다는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람이 그렇잖아요, 뭔가 희생하면 당연히 기대하는 게 있죠.

바리새인들은 점점 더 율법에 집착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자꾸 율법세부 조항을 만들어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은 사탄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 비난받았잖아요?
바리새인들에겐 율법이 신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간데 없고 율법과 만 남은 것이죠.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고 오직 율법과 나만 나오잖아요?

11,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십계명을 어기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죠.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는 신앙적으로도 의무와 열심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식구들은 요즘 간헐적 단식을 하느라 가급적 저녁6시 이전에 식사를 다 끝냅니다.

저녁 6시 이후에 뭘 먹으려고 하면 죄인 취급을 당합니다.

저녁을 다 먹고 겨우 야식 안 먹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매 주 두 번 금식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금욕 생활을 했다는 뜻이죠.

또 수입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따져서 헌금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바리새인이 거짓말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켰으니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이런 기도를 했다고 말씀할 때 듣는 사람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역시 율법을 저렇게 잘 지킨 바리새인은 구원받을 사람이 분명하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공로주의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도 가장 위험한 게 이 공로주의입니다.

신앙생활을 좀 잘하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반대인 경우는 왠지 하나님이 내게 불만을 가지실 것 같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면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사람들에게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면 심한 열등감과 시기심에 빠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을 추종하자 시기심에 사로잡혀 주님을 로마법정까지 몰고 가잖아요?
이 공로주의는 우리 믿음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것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구원받는 조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 받을 때 이런 공로는 십억 짜리 집을 사는 데 천 원짜리 한 장 같은 가치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왕이 불쌍히 여겨 완전 탕감해 주셨다는 말씀이 있잖아요?
일만 달란트면 천문학적인 돈입니다.

당시 고위관료가 16년 정도 받을 월급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죄값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등가교환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우리 죄의 무게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무게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생각하듯 율법의 조항 몇 가지를 평생 열심히 지키는 것,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위해 예배드리고 작은 봉사를 하는 것, 그것이 지불해야 할 죄값에 얼마나 보탤 수 있겠습니까?
그걸 가르쳐주시기 위해 누가 봐도 구원 받을 공적이 아예 없는 세리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매국노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하면 경멸의 대상인 것과 같았겠죠.

세리는 로마당국이 정해 준 세금을 걷어다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로마당국에서 월급을 주지는 않습니다.

정해 준 세금에다 자기 월급을 적당히 붙여서 걷으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과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했던 것이죠.

도둑질도, 횡령도 점점 대담해지잖아요?

멸시받는 만큼 더 뜯어내 잘 사는 걸로 복수해야겠다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세리장 삭개오도 상당한 부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돈만 모았지 율법 같은 건 지키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신 것 자체가 바리새인에겐 모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는 의롭다 하셨고 바리새인은 불의하다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사람 같지도 않게 여긴 세리에게 의문의 일패를 당한 것이죠.

 

하나님이 이 둘을 판단하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행위의 공로나 지은 죄가 전혀 계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헌신을 무시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그건 심판의 저울에 앉은 먼지의 무게 정도 밖에 안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 나누신 것은 단 한 가지 항목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근원이 얼마나 악하고 파괴적인지를 아느냐, 그에 따른 심판의 결과를 아느냐입니다.

기독교는 여기서 출발해야 예수그리스도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 죄의 실체와 파괴력을 깨닫지 못하는 한 나와는 겉도는 종교적인 교리일 뿐입니다.

자기 악함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독생자의 죽음으로 구원해 줘도 왜 그 정도로 하셔야 하는지 의아하고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가르쳐줘도 그게 뭔소리냐고 하잖아요?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자신의 불의함이나 죄에 대한 각성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리의 기도는요?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의 죄를 통렬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세리는 무슨 죄로 가슴을 치며 이렇게 간절히 회개하고 있는 걸까요?

과도하게 세금을 매겨 부정축제 한 것을 회개했겠습니까?

번 돈을 방탕하게 쓴 것을 회개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세리의 기도모습을 보면 정말 이렇게 애절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가 또 있을까 싶죠.

만일 세리라는 직업과 불법 세금징수에 대해서 이 만큼 회개할 정도라면 세리직을 그만두었어야 맞는 것입니다.

이 정도 뉘우치면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 진짜 회개가 맞겠습니까?
그러니까 세리가 가슴을 치며 고백하는 죄는 그런 외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근원적인 죄인식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는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살 길이 없음을 처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구원을 주십니다.

그 절대 절망의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것이죠.

이 죄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닌,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동기가 죄라는 것을 통감하고 겸허해진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은 구원받을 만한 죄인식과 회개가 없기에 구원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로 말씀하시려는 뜻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졌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피조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자시고, 하나님의 존엄과 선하신 의지를 거역하는 데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법이 있습니다.

세리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는 죄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닫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도 그래서 주신 것이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살려면 율법의 정신대로 살아야 하는 데 그렇게 못 산다는 걸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이대로 살지 않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이미 그걸 다 보이셨고 주실 것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에겐 떨떠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쁜 법입니까, 그렇지는 않잖아요?

사람사이에 사랑보다 의미 있는 게 없지 않습니까?
가족 간, 이웃 간 서로에 대한 사랑이 삶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고 그것 자체에 심오함은 없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미가 있는 것이죠.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를 보면 달인들은 정말 자기 일을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 자체가 무슨 목적이 되겠습니까?
결국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고생 안시켜서 좋다고 합니다.

생활은 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직업이나 성공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죄인이라서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점점 더 깊이 자각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내 몸과 똑같이 사랑하십니까?
못 하십니까?

그러시면 죄인이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죄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죠.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다윗이 인간성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원초적인 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닌 것 같을수록 연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성숙하고 견고해 진다는 것은 자기의 죄의 실체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점점 더 알게 되는 것이죠.

성령께서 우리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을 알고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도록 더 역사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처리하는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본성적인 죄문제를 깨닫고 십자가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 죄의 본성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세리의 기도만 있는 게 아니라 공로주의에, 나만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도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로 단번에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아있는 이 죄의 본성을 제어하고 다스리며 살도록 우리를 계속 다듬어 가십니다.

악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환경과 상황들로 그렇게 하십니다.

세리는 어쩌다 세리가 되었을까요?

남들이 그렇게 멸시하고 손가락질하는 세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남의 평가와 시선에 다 약합니다.

사람들은 창피하면 못삽니다.

그래서 비난하는 댓글로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남의 말 삼일 간다는 속담이 있지만, 말의 상처가 당사자에겐 뼈아픈 것이죠.
세리는 돈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뼈대 있는 신앙의 가문도 아닌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머리는 좀 좋았을지 모르지만 사회에 뿌리내리게 끌어 줄 배경이 없었습니다.

로마식민치하에 무슨 기회라는 게 있었겠습니까?

결국 이런저런 좌절을 다 겪고 나서 남들이 꺼려하는 세리 직업을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는 불변하는 이치 하나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존경받고, 의식주가 풍요롭고, 안정된 생애를 누리는 사람은 육신의 안일에 안주하고 영혼의 외침에 둔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부자들은 별로 안 모였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쓰잖아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환경은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교관입니다.

우리는 고분고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인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죄인식이 더 어려웠던 것은 남들이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고 있었던 것이 한몫했습니다.

차라리 잘 안 되는 것이 사실 성도들에겐 더 가치 있는 걸 얻을 복입니다.

사업이 실패하고, 돈 줄이 막히면 결국은 허세가 사라집니다.

세상을 탐닉할 기회도 없어집니다.

건강문제, 가정불화, 대인관계의 어려움 이런 것들 역시 교만한 본성을 억제하는 고마운 지원병들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외적인 힘든 환경 가운데서 교만한 본성이 상처를 입습니다.

상처받은 본성이야말로 세상 소망에서 그리스도의 소망으로 가치관을 전환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세리처럼 마음이 낮아져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심령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지금 우리를 낮추시고 계시다면 낙심하지 마시고 낮아지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욥기 2229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억지로 낮추지 않아도 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비유 속의 바리새인은 영원히 하나님께 버려졌고, 세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 같은 죄의 실체를 인식했느냐?

그 죄와 죄의 형벌에서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밖에 없다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현대 교회는 죄를 부정적인 감정이라 생각하고 죄와 회개 같은 말씀을 잘 전하지 않습니다.

죄인식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죄의식, 죄책감이 부정적인 것이죠.

죄인식이 잘 된 사람은 죄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문제를 회개하고 돌이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해결되었으니 죄의식이 없는 것이죠.

죄인식이 안된 사람이 오히려 잘못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해 막연한 죄의식이 있고 죄책감을 느끼며 불안 속에서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세리처럼 우리의 죄를 자각하며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안팎에 있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젠 용서받은 자녀로서 삶의 모든 괴로움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고민을 쏟아 놓은 뒤 다시는 수심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세리 역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힘과 위로를 얻고 매일 수심이 없는 기쁜 얼굴로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