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2A-rWAHsH8&feature=youtu.be
<2019년9월15일 설교영상>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남편과 둘 만 있는 명절을 보냈습니다. 식구가 셋이 있다 둘만 남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인 것 같습니다. 추석 전날은 남편도 울적했는지 일찍 자러 들어가더군요. 저는 할 일이 좀 있어서 거실의 불을 다 끄고 서재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둘 만 덜렁 남는 처지가 되었지? ’ ‘앞으로는 또 어떤 낯선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노년기로 접어들면 건강문제든 가족과의 사별이든 이런 더 큰 인생의 과정들을 겪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말 하나님을 모르고, 영원한 삶을 몰랐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하는 게 더 절실하게 와 닿더군요. 곧 가을이 오고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 텐데 혹시 여전히 인생의 허무와 적막함이 느껴지실 것 같습니까?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모든 날들을 다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에 대한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의 핵심은 33절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아주 당연하고 일반적인 말씀이죠. 움은 깊숙이 파인 굴 같은 곳이고 말은 곡식을 계량하던 통 같은 도구입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켠다면 이런 데 놓지 않고 모든 사람이 빛을 볼 수 있게 잘 보이는 곳에 둔다는 것입니다. 불을 켜고 그것을 일부러 가려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적엔 밤에 일정 시간 불을 꺼야하는 등화관제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때 시험공부를 한다고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려고 담요로 가리고 그랬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불은 잘 보이는 데 놓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주변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을 빗대서 영적인 내용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등불을 켜는 평범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경험을 떠올려 구원의 원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이 말씀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게 있잖아요?삶에는 어둠이 있다, 어둠을 밝히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불을 켜는 목적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말씀하시려는 주님의 의도는 여기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말씀을 따라가 되겠습니다. 1. 세상에는 어둠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전혀 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들을 다 보고, 다 알고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요즘엔 안방에 앉아서도 TV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다 볼 수 있잖아요?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연인은 모두가 다 영적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관 안에는 정확히 지적할 순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영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 기관이 죽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가정선생님은 맛을 느끼는 감각기관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색을 구별 못하는 색맹처럼 맛을 못 느끼는 유전병을 미맹이라고 합니다. 음식의 맛을 전혀 못 느끼고 맛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전에 학교에서 가사실습 하던 때가 있었죠. 이 선생님은 그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돌아다니며 맛을 봐주고 간을 더해라 설탕을 더 넣으라 품평을 해 줘야 하는 데 그게 안되는 것예요. 그래서 그 분이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언약하시길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은 반드시 영의 죽음을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어마어마한 반역입니다. 이 세상의 예를 들자면 왕이 버젓이 있는 데 왕관을 가져다 자기 머리에 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런 반역에 대한 결과는 아예 영광스런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살아서는 하나님을 못 느끼고, 죽어서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복으로부터 격리되어 영원히 살게 된 것이죠. 아담이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순간 이런 참담한 영의 죽음이 온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낳지 못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잖아요? 죽은 영이 살아있는 영을 낳을 수가 없기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죽은 영으로 자연 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것, 믿음의 뿌리가 되는 영적인 원리들을 잘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를 알고 대속의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죽은 영으로 태어났기에 이 엄청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스스로 있는 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시더군요. 우리와 모든 피조물들은 저절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맹인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없는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9장에서 주님이 오신 이유가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못 보는 맹인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자기들은 다 본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가 먼저 영적 맹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눈을 뜰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이고 하나님의 통치하는 광대한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영적 맹인이라는 유전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인간의 영적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밝은 빛이 우리를 이 절망적인 영적 어둠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인식시켜 놓으셨습니다. 시편80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빛이 비추실 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죠? 이사야 9장 2절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 분이 구원의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로 그 빛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으리라 사람이 해야 할 유일한 복된 선택은 예수님이 내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이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어두움이 밝아집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죄와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천국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믿어지고 어딘가에 있는 영의 기관으로 감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 라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내일이 암흑처럼 무섭고 깜깜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걸어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장 길이 안 보이고, 준비하는 미래가 불투명해도 흑암에 혼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사망이 위협적으로 우리를 공격해도 죽음이 우리를 절망에 쳐넣지 못합니다. 전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망의 어둠이 무겁게 어머니와 우리 가정을 짓누른다고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에 설령 죽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늘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시는 강력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와 진학에 대한 고민과 삶의 여러 가지 고충으로 마음이 어두워질 때 우리를 다시 빛 가운데 환하게 이끌어 주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미가서 7장8절에서 바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빛을 주셨을 뿐 아니라 매일 엄습하는 어둠을 이길 환한 빛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이 바라 볼수록 우리 안에 어둠이 더 많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이 구원의 빛을 모든 사람에게 비춰주셨지만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34절 말씀을 보면 사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를 알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 뒤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던 때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여러 가지 말씀과 기적으로 주님이 메시야임을 밝히셨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본문 앞 14절에도 보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좇아내고 고쳐주셨지만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쫒아내고 있다고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예수님이 메시야인 표적을 대라고 추궁합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님이 오늘 이 말씀을 하셨다면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그 의도가 34절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아무리 밝은 빛이 비춰도 눈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빛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눈으로 빛을 보아야 어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행하신 일을 처음부터 비판하고 비뚤어진 눈으로 보려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빛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을 제대로 보지 않는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표적만을 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다 사흘 만에 밖으로 나와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했던 것을 인용해서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니느웨사람들이 너희를 심판할 거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지만 너희는 내가 부활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엄중한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고하신대로 이스라엘사람 대다수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성경교사들입니다. 왜 이들은 성경에서 계시하신 그대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3장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들이 자기 행위의 악함을 비호하며 빛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밀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복음을 비춰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결사적으로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습니까? 빛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성령께서도 함께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감화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못할 백가지 이유를 대며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겉으로 다 인정하는 것 같지만 결국 믿으러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빛이 내 안에 없고 여전히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행위의 악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어둠을 밝혀 주시도록 빛 되신 예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강론입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만일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눈을 돌리지 않고 겸손히 그 빛을 구한다면 하나님아버지께서는 기쁘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4. 그리고 빛을 받은 우리도 빛 가운데 있는지를 늘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35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빛을 지닌 몸은 밝고 빛이 없는 몸은 어둡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은 영적인 빛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산 위의 동네가 사람들 앞에 숨겨질 수 없듯이’ 우리 안의 빛이 그렇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고,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남들에게 그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를 예수님이 행하신 빛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관대함과 정의와 용기와 겸손과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들이 감출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빛이 점점 밝아지는지 어두워지는지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주신 이 빛으로 다른 사람을 비춰야 하는 사명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신자들도 똑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우리 영에 불을 켜 놓으신 것은 누군가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까?전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빛을 비추려고 복음에 헌신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빛이 우리 대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비취게 할 계획이십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참혹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광주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안타까운 화재가 발생했죠. 자식들은 살았지만 부모가 다 죽었다는 소식에 ‘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들이 자기 전에 충전해 놓았던 전동휠에서 불이 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 새벽 불이 난 걸 보고 주민들이 모여들어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를 썼더군요. 맞은 편 동에 살고 있던 한 주민은 불이 난 5층에서 보일러실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딸아이와 그 옆에서 상반신을 걸치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잠옷 바람에 달려간 이 주민은 그 아래 4층 보일러 실로 진입해 배관을 밟고 위에 있는 딸아이를 붙잡아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보일러실 창문에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반쯤 걸쳐져 버티고 있는 딸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고 합니다. 딸을 구하고 황급히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추락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아버지의 눈빛은 어땠을까요?자기 죽음을 직감하고 딸을 구해주는 그 사람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본능으로 자기를 먼저 구해줬으면 하는 그런 절박한 눈빛이었을까요?어쨌든 그 눈빛이 구해준 사람의 뇌리에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어둠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못 보는지 모르고, 생명의 기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건지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구원하지 못한 우리 가족, 친구들이 나를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지금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순간의 절실한 눈빛을 지금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을 마칩니다. 육신에 매여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은 늘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무겁고 힘든 문제를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만일 이 힘겨운 문제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한 가지 관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남겠죠. 이런 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것,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것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들은 성실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적당히 누리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셔야 하는데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설교들을 뒤적여 보면 전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고 그 빛을 비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라는 말씀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또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어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 일에 힘쓴다면 가장 복된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성도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있잖아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 새가족초청예배를 위해 다시 한번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작정하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빛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춰지길 간절히 원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선하게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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