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2장1절-7절 (구유에 누우신 하나님 : 대림절 넷째 주일)

남수연 2017. 12. 28. 12:25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기대하는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이 방문하셔서 은혜와 축복의 근원이 되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대림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좀 깊이 있게 성경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살펴본 것은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이 역사에서 동떨어진 신화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를 다스리시고 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실제 인간 역사 속에 내려오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실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의 일화입니다.

성탄절엔 뭐니뭐니 해도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야기가 제일 잘 어울리죠.

본문에서 지난 주 요한사도가 보았던 말씀이 육신이 되신그 하나님이 아기가 되어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너무나 크고도 큰 진리라 우리의 이해와 감정의 영역을 초월합니다.

안다고 하지만 사실 체험적인 지식이 아니라서 겉돌기가 쉽습니다.

성탄절에 아기로 오신 성자하나님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는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최대한 자세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생각들을 개입해서 성탄의 사건들을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초월한 성육신의 진리가 믿음의 영역에 잘 저장되는 것입니다.

지식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 위대한 성탄의 진리를 모두가 확신하고 믿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서 강조된 것은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의 출발점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있었던 호적등재로 이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태어나셨던 분이심을 증명하려면 호적만 있으면 되는 것이잖아요?

물론 당시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이 당연히 실존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승천 후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누가는 로마관료인 데오빌로에게 보내기 위해 이 복음서를 쓰고 있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호적이야기부터 시작한 것은 로마인 데오빌로가 예수님을 로마인들의 신화 속의 신처럼 인식할 것을 처음부터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을 보면 당시 로마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아구스도황제와 구레뇨총독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들의 정권 중에 있었던 인구조사 이야기를 통해 그 때 태어나신 예수님의 실제적인 탄생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전말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잉태가 자칫 로마신들의 탄생처럼 신화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우려한 것이죠.

우리 문화적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이 마치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각색한 이야기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보통사람과 똑같이 태어나신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신기루처럼 존재하신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존재하셨다는 것이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데오빌로는 이 복음서를 읽을 때, 자기 세대에서 일어났던 역사들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배경인 중동과 너무나 먼 이방나라, 이미 2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누가의 복음서를 읽는 우리는 이 내용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때 배경이 되는 역사를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다 배웠습니다.

식민지 영토에 대대적인 호적등재를 명령한 1절의 로마황제 이름은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영어식으로 하면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이고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가물가물하지만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이죠?

로마황제의 권좌를 두고 벌어진 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이 세계사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황제에 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세계사는 전하죠.

파스칼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납작했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주인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황제로 있던 때가 본문의 시대입니다.

제가 왜 다 잊어버린 세계사까지 끄집어 내고 있겠습니까?

데오빌로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로 이해해야 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실제 인물이심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을 멀리 초월적 종교의 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세금징수 목적으로 인구센서스를 실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확증시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절묘하신 개입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무의미하게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에 의해 진행되는 세속사에 가장 하나님다운 방식으로 끼어들어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임신한 마리아와 약혼자 요셉도 당연히 황제의 칙령을 지켜야 했기에 조상들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4절입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가니.

이 한절의 말씀 안에는 이 호적등재로 인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원래 다윗이 태어난 곳이란 것입니다.

더 위로 올라가면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서 낳은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고 룻기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구약선지자들의 예언을 다 충족시키셔야 합니다.

예언된 대로 오셔야 바로 그 분이신지 알아 볼 것 아닙니까?

그중 하나가 바로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여 한다는 것이었죠.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예언하셨잖아요.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요셉이 다윗의 집 후손이라고 밝혀지고 요셉의 법적 아들인 예수님 역시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죠.

왜 예수님이 요셉의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인지는 대림절 첫 주일에 나누었습니다.

그날 머리에 쥐가 나며 잘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 기억나시죠?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요셉의 양자이기에 법적으로 그 가문에 속하고 다윗의 후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또 혈통적으로도 마리아 역시 다윗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었죠?

다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호적등재를 위해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인 다윗의 마을로 간 사건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이들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수도 없이 예언했던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것이 정확하게 증명된 것이죠.

또 하나, 출산을 앞 둔 마리아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은 또 다른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미가서 5장을 한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미가선지자는 예수님보다 7백년전 사람입니다.

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태초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은 다윗의 가문임과 동시에 실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데서 태어나면 안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마을을 떠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베들레헴 인에서 묵고 다음날 나사렛으로 이동했는데 버스로 달려서도 꽤 긴 시간이었습니다.

거리상으로 두 지역은 100킬로미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차량으로는 그나마 두어 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지만 그 당시는 교통편도 그렇고 험악한 지형 상 여행이 쉽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 길을 만삭의 마리아가 어쩌면 나귀도 못타고 걸어서, 더위에 숨을 몰아쉬며 이동했을 것입니다.

황제의 호적령이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냥 갈릴리에서 태어나셨을 게 분명합니다.

미국원정 출산도 아니고 뭐 하러 베들레헴 가서 아기를 낳겠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마을로 가게 되었을까요?

이들이 미가서의 예언을 성취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베들레헴 출산계획을 세운 것은 당연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곧 태어날 예수님도 같이 호적에 등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예수님이 태어난 다음 다시 가서 호적에 올렸겠습니까?

우리나라 몇 십년 전만 해도 시골사람들이 아기 낳으면 제때 출생신고를 못했잖아요?

그래서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도 이제야 겨우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절묘한 타이밍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다윗의 족보에 등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메시야가 분명하다는 것이 증명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손이 역사 위에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황제가 정책을 세우고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거기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개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때때로 신기하고 놀라워할 때가 많습니다.

계획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던 일들이 어느 시기가 되면 누군가 장기판을 움직이듯 이리저리 상황들이 급히 움직이고 절묘하게 일이 이뤄지는 걸 종종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이 만삭의 마리아가 위험한 베들레헴 여정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시온의 대로같이 앞 길이 뻥 뚫리고 형통하게 모든 게 진행되길 바라지만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승승장구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하는 일마다 안된다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계획 안에 있다 해도 때로 난감하고 괴롭고 불편한 일들을 우리는 거치게 됩니다.

아니, 우리의 교만과 죄성으로 인한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오히려 허락하십니다.

현재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거쳐야 하는 힘든 일들도 훗날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복된 여정 안에서 일어난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이 당혹스럽고, 번거롭고, 힘든 일들이 엮여져 인생의 행로가 하나님의 길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로 해서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생기고, 누군가를 만나고, 인생의 진로가 바뀌기도 하는 것이죠.

오늘 호적등재의 과정을 절묘하게 기획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그렇게 기획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손을 놓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이끌지 않았다면 이렇게 복된 예배의 자리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신 성탄의 장소가 왜 하필 가축의 우리여야 했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위해 택일된 호적정리 기간에는 그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다 보니 작은 마을 여관이 꽉 차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의 만삭의 몸을 보고도 방을 양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만삭의 임산부가 노숙할 처지가 딱했던 여관주인은 마굿간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시기와 역사를 마련했던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왜 방 한칸을 준비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별 걸 다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잖아요?

때로 아주 사소한 일까지 예비하신 하나님의 배려에 깜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다급한 상황에서 기적처럼 비어있는 주차공간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기뻐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내려 보내신 날, 따뜻한 잠자리 하나를 준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잉태되는 순간 이미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감당하실 대속자의 삶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한 고난을 짊어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위태한 여행길을 거쳐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초라한 강보에 싸여 딱딱한 여물통에 여린 몸을 눕히셔야 했습니다.

첫 성탄부터 험난한 예수님의 대속의 여정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즈음 헤롯왕이 동방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 찾아 온 박사를 통해 위대한 왕의 탄생소식을 듣게 되죠.

그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는 군대를 보내 아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천사의 지시를 받은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데리고 그 먼 이집트까지 또 위험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것입니다.

아직 영아기 때부터 예수님은 고통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장기엔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집에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적어도 중산층 쯤 태어나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하필 만삭의 아내를 위해 웃돈을 얹어 방을 마련할 능력도 없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양아들로 내보내셨습니다.

게다가 동생들을 줄줄이 낳아놓고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없는 집 장남의 역할을 해야 했던 예수님은 그 생애 자체가 녹록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죄악 세상에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내려오신 예수님은 죄악이 낳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짊어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가난의 힘겨움, 사별의 아픔, 신분적인 멸시, 철저한 오해와 비난,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십자가에서 당한 육체의 고통과 죽음, 영혼이 파랗게 질릴 만큼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

예수님은 인간사의 고통 중 겪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당할 때, 예수님은 몸소 겪은 체험을 통해 우리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십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415절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딱딱한 구유에 누워 첫성탄을 맞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따스하고 평안히 잠들게 하시려 스스로가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일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로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혹은 단지 하나님을 경외했던 한 진실한 위인의 자리에 올려 놓으려 합니다.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하늘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우리 역사 속에서 사셨다고 증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 된 하나님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축복의 주님을 몰라보지 않도록 무수히 예언하신대로 다윗의 가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을 또한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오직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은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말구유에서 첫성탄의 밤을 보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대림절에 이 부요케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마련하신 모든 생명과 부요를 충만히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12월24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