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이 예년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촛불을 켜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만 나라를 염려하는 또 다른 촛불들이 이 시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실망과 불안한 내일로 국민들이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기분입니다.
며칠 전 1층 직원을 현관 앞에서 만났는데, 자기는 요즘 매일 한번씩 운다고 하더군요.
농담이 섞인 말이지만 의지할 곳 없는 서민들의 마음은 정말 울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천년 전 예수님이 태어나신 밤에도 그 땅은 로마황제의 지독한 폭정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통치하는 곳에만 진정한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탄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데 그치는 성탄절이 아니라 어두움을 밝히시고 상처를 고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과 변화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탄절이면 우리는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예수님의 신비한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이 가브리엘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특별한 아기를 갖게 될 것을 예고하는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에는 사람들의 경험과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갖가지 초자연적인 신비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만나는 신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신 출생의 신비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태어날 메시야가 태초부터 계셨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의 탄생 수 백년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셨던 성자하나님이 아기가 되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죠.
하나님이 아기가 되신 것이 믿어지는 게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이신 신성을 믿게 되면 성경의 모든 신비가 풀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가장 훌륭한 성인에 한사람이라면 우리는 굳이 오늘 밤에 모여서 예수님의 탄생에 열광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성실하게 살다 죽은 오류가 있는 존재일 뿐일테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신이시고, 우주와 만물과 생명체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지금도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대개의 종교가 교주의 탄생을 특별나게 꾸며 신격화시키는 시도가 있습니다.
혹자들은 예수님은 단지 인간일 뿐인데 제자들이 동정녀 탄생 등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가미해서 신격화사켰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엔 항상 거짓과 사욕이 섞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요즘 미국에서 골머리를 앓는 것이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기승을 부리는 가짜 기사들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미국 연방수사국(FBI) 소식통을 인용해 클런턴후보가 이메일사건으로 곧 구속될 거라는 기사가 대선 직전에 올라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기사가 뉴스 하단의 자막기사로 뜨는 걸 저도 보았습니다.
대선 경쟁이 치열했던 미국에서 이 기사는 삽시간에 14만건의 댓글과 공유를 기록하며 큰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사실인즉, 가짜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로 인해 미국대선의 판도가 하루 만에 뒤집어 졌고 그로인해 대통령이 바뀌게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문가들은 봅니다.
누군가 위증한 결과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렇다면 이 거짓기사를 쓴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이 기사를 올린 청년은 기사가 조회될 때마다 돈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뭔가 자극적이고 음모론적인 기사를 써 조회수를 높여 광고수익을 올리려고 허위사실을 배포하는 것이죠.
이런 방식의 거짓기사를 써서 매달 오백만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시키기 위해 기상천외한 동정녀 탄생을 제자들이 지어내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걸 통해 무슨 이익을 챙겼을까요?
이것은 2천년전의 유대사회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철저한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가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면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당장 돌에 맞아 매장됩니다.
우리나라처럼 아무나 나는 이만0하나님이다, 안상0하나님이다 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논쟁을 할 때 그랬습니다.
스데반이 연설을 하다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위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감격한 스데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쳤습니다.
보라,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
그 순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고함을 치며 귀를 막고 신성모독에 분개하여 돌을 던져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든 제자들이 순교한 죄목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전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의 죄목도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이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로마당국에 대한 반란죄였습니다.
동정녀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결코 날조 될 수가 없는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로마법정에서 그것을 진술하셨고, 제자들이 목숨과 바꾸며 우리에게 전해준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한다고 이런 게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의심이 많은 존재입니까?
이런 비현실적이고 조작된 신화 같은 성경이야기가 믿어지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처음에 이런 것을 믿을 의도가 전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을 각성시키시는 순간,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믿어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게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라는 게 믿어집니다.
이젠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믿어지며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연에 짙게 깔려있던 답답한 안개가 스르르 걷히며 놀라운 평안과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다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주님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 오셨지, 우리에게 뭘 받아 가려고 오신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까요?
이 예수님을 우리는 저 우주 멀리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재 나를 통치하고 계시는 왕으로 섬깁니다.
세상이 온통 지도자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어느 나라 건 최고의 권력자를 세우고 그 세운 권력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설사 잘하려는 의도가 있다 해도 여기저기에 다 통하는 완벽한 해법은 없습니다.
마약사범 용의자 3600명을 사살한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기 스스로도 죽으면 지옥에 갈거라고 말했더군요.
철권통치로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면 권력에 과도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박근혜정부가 탄력성 있는 노동시장과 청년일자리를 내세우며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결과가 나온 것도 그런 것입니다.
어느 지도자건 이미 악과 부패와 부정 위에 세워진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젠 이 역사가 너무 오래되어 그걸 건드리면 도미노처럼 사회가 위태하게 흔들거립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그것을 바로잡으려니 걷잡을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요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지경이 되었습니다.
옥스퍼드사전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탈진실’입니다.
감정이 그렇다고 공감하고 느끼면 진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트럼프지지자들이 그렇잖아요?
이런 현재의 세상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능력 있는 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한심한 게 아닙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 어느 나라 지도자건 혹시나 하지만 역시나로 임기를 마치고 계면쩍은 얼굴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기대와 평가를 보면, 임기 시작 땐 6,70%로 시작하지만 임기가 끝난 뒤 잘했다는 평가의 비율이 어떻습니까?
이명박전대통령이 21%, 노무현전대통령이 12%, 김대중전대통령이 24%, 김영삼대통령이 6%입니다.
박근혜대통령은 5%대이죠.
대통령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도 되지만 한 나라를 이끌만한 그런 역량과 자격이 있는 대단한 인간이 사실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 위에 왕이 되라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냥 동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왕은 역사의 비극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 왕이 존재하던 시대가 다 어땠습니까?
왕의 명령이 법이었고, 왕의 절대 권력은 무한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왕은 살인해도 되고, 약탈해도 되고, 멸문지하를 시킬 수 있고, 모든 국토의 땅을 다 소유하고 자기 마음대로 봉신들에게 하사했습니다.
한 인간에게 그런 왕의 권력을 도대체 누가 준 것입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만들었지만 결국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왕권에 의해 자신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짓밟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이 사람 위에 신이 되고 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에 인간 왕을 통해서가 아닌 신정통치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이 간절히 원해서 세웠던 왕들이 결국 나라를 말아먹잖습니까?
이미 당시 이스라엘도 다윗왕 이후 후계자들이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예수님 태어나던 때, 로마황제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당국에 의해 임명받은 헤롯왕은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수탈되고 굶주리고 사람 취급도 못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한가닥 희망은 다윗왕과 같은 선한 메시야왕이 다윗의 자손으로 올거라는 선지자들의 예언 뿐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전하는 가브리엘천사의 말을 들어보실까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바로 그 다윗왕의 후손이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왕은 백성들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립니다.
결코 그 나라는 다른 세력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고 무궁하다는 것이죠.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완벽하고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기독교 국가에서만이 절대 권력자인 왕을 몰아내고 평등한 민주주의국가를 세운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이 끊임없이 개혁과 투쟁을 통해 그나마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탄생 칠백년 전에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왕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세상 권력자는 국민을 지배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섬기기 위해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평생 자식을 사랑으로 섬기듯이, 왕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신 왕입니다.
자식들이 크면 반대로 부모를 섬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모가 끝까지 자식들을 섬깁니다.
우리 근심하는 속마음과 삶의 아픔들을 누가 알아 주겠습니까?
아무도 모르잖아요?
하나님만이 우리를 아시고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상처와 고통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도 다 우리 같이 힘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잖아요.
지금은 좀 부족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길 것입니다.
이시형박사께서 쓴 칼럼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이제 팔십이 넘어 반백이 된 이박사님은 길에서 동년배를 만날 때 정말 힘든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지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고 합니다.
‘여보, 노형! 당신이 용케 살아 남았구려’
힘든 세월을 죽어라 살아온 부모님 세대의 애환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지난 일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동안 참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애증과 고락을 견디며 함께 살아남은 우리 가족과 형제들을 보며 아직 내 곁에 있어준 서로에게 감사하고 섬기는 우리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베들레헴 마굿간에 아기로 오신 사랑과 겸손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 분의 백성들이 따를 길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이 땅에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내 상한 마음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같이 위태한 내 삶을 끄지 않으시고 고치시고 바로잡아 온순히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예수님과 함께 무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이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시형박사님이 홍당무라는 책을 쓴 작가의 기도문을 매일 외우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는 데 우리도 귀담아 들어 둘만 합니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그리고 하나의 기도를 덧 붙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니 다 잘될 것이다. 오늘도 평안하고 안심이다.”
성탄의 밤에 오셔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되새기며 감사로 받아들이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게 가장 안전한 사랑의 왕의 통치와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6년12월24일 성탄감사의 밤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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