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나 요즘 시대나 세금문제는 참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번 대선토론에서도 세금 더 걷지 않고 공약 이루겠다는 후보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세금 더 걷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으니까 선거전에서 증세문제를 솔직히 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세금문제로 예수님과 반대자들이 논쟁을 벌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거의 40%에 육박하는 세금을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될 것 같나요?
공식적으로 근로자 소득에 대한 조세율이 20%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을 준조세로 간주하면 조세율이 40%가 넘는다고 하죠.
그러니 월급쟁이들이 월급 받아도 쓸 돈이 없을 수 밖에요.
총소득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예수님 시대에 그렇게 뜯어가니 세금문제는 유대인들에게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 세 사람은 이 조세논쟁 사건의 중요성을 파악해서 성경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물론 세금문제가 심각하다는 차원을 다루려는 게 아니죠.
이 사건을 기록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중을 파악했던 대로 우리도 잘 깨닫고 이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이 일은 십자가를 지셨던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유월절 명절기간에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순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구약성경인 말라기서에 보면 장차 메시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 이렇게 예언되어 있었거든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이건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이죠?
그리고 세례요한의 뒤이어 메시야가 오실 것이 이어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홀연히 그 성전에 임하시는 메시야로 믿고 열광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층은 이 광경이 심히 못마땅했지만 19절에 이런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일어난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구원사역 마지막 주에 일어난 일이고,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단지 국가에는 세금 잘 내고, 교회에는 십일조 잘 내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님께서 주셨겠습니까?
그런 교훈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사건의 발단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권력자들은 예수님께 들러 붙어 번번이 시비를 걸며 반박하고 공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본문 바로 앞에서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드십니다.
이것을 잘 엮어야 오늘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갑니다.
세월이 지난 뒤 사람을 보내어 소출을 좀 보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악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사람들을 때리고 빈 손으로 보냅니다.
아주 악하죠?
보내는 족족 그런 상황이니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면 혹 존대하리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악한 농부들은 되려 상속자를 죽이고 유산을 차지하자며 아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노한 주인이 와서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이에게 맡겼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했다는 것을 눈치 챈 권력자들은 크게 분노하여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둬선 안되겠다고 마음을 굳힙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잡아내려고 꾸민 일이 오늘 세금논쟁입니다.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둘 다 예민한 세금문제로 엮어 예수님을 로마당국에 고발하려는 것이죠.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시 역사에 보면 세금문제로 큰 사건이 한번 있었습니다.
로마에 내는 세금을 거부하자며 갈릴리사람 유다가 백성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킨 일입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로마군 수만명이 파병되었고, 이천개가 넘는 십자가가 갈릴리지방 초입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조세를 거부하면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아주 확실하게 이미 보여준 것이죠.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이 문제라면 확실히 예수님을 잡아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들은 단단히 작전을 짠 뒤, 착하고 의로운 척 하는 정탐꾼을 보내 작전을 개시합니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옳은 말씀을 하시고 오직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이제 예수님을 함정에 밀어 넣을 그 입에 번들거리는 웃음을 지었겠죠.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가합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게 요즘 대선토론에서 상대 후보를 꼼짝 못하게 하는 질문들이나 같습니다.
홍후보께서 문후보께 동성결혼 반대하냐, 찬성하냐고 집요하게 묻죠?
소수자 인권문제의 핵심 사안으로 보는 이 동성애 문제를 반대하면 어떻게 됩니까?
진보적인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문후보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죠.
만일 찬성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나마 남아있던 보수층들이 다 등을 돌릴 수 있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신경이 쓰이겠죠.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하다가 동성결혼 법제화는 다른 문제라며 어물어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한다 하면 지금 열렬하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무리들은 돌을 든 폭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갈릴리의 유다처럼 조세반대 선동자로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둘 중 어느 답변을 해도 예수님은 큰 곤궁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른 답변은 나올 수가 없잖아요?
주변에 몰려 있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답변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을 것입니다.
누구든 이 질문은 낚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도 긴장 속에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으로 바치던 은화인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통용되는 동전엔 이 가이사의 얼굴 형상과 신의 아들 아무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장내를 경탄케 합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절묘한 답변이 나온 것입니다.
로마장교가 들어도, 유대인들이 들어도 뭐라 반론을 낼 수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지혜, 지적 권능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논쟁에서 사람의 지혜를 뛰어 넘는 답변이 구약성경에도 나오죠?
아이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두 엄마에게 아이를 둘로 나눠 주라고 한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백성들을 판결할 지혜를 구했잖습니까?
친엄마를 찾아 준 솔로몬의 그 판결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설전에서 종종 나타나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 기억하시죠?
이런 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 머리로는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수백가지의 답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해답이 없을 것 같은 환경, 앞 뒤가 완벽하게 막힌 것 같은 절망스런 문제, 그건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없고, 그 환경에선 끄집어 낼 수 없는 기막히게 절묘한 것을 얼마든지 내놓으십니다.
그게 하나님이십니다.
다들 경험해 보셨죠?
그래서 지난 주에 그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 가며 살자고 했던 것입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지혜로 잘 사셨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세요.
반드시 빠져나갈 지혜를 주십니다.
결국 정탐자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에 놀랍게 여겨 침묵했다고 26절에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칭송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기이한 답변에 공격자들조차 우러르는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말인지는 딱 짚어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기가 막힌 말인 건 확실하잖아요?
그러나 여기서 시험하는 자들의 본심을 살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또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사실 질문의 취지에 맞는 정확한 답변은 아닙니다.
둘 중 하나로 답하라고 했는데 어찌 보면 동문서답을 하시는 격이죠.
이것은 물론 위기를 넘기려고 직답을 회피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싸움의 본질을 끄집어 내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세금 문제는 세상의 제도에 대한 불만, 불의한 법에 대한 논쟁을 하자는 것 같지만 그 원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까?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그 속에 담긴 본질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 속해서 살려고 하는 데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오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가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올 때 사람의 내면에 격렬한 전투가 일어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의 마음엔 하나님의 나라를 밀어내려는 저항이 일어납니다.
사탄과 합작해서 만들어낸 세속문명, 이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오려고 하니까 전력을 다해 사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완강한 저항에 예수님이 부딪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진지한 상상 속에서 읽어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미움 받으시잖아요?
마치 하나님을 너무나 공경하기에, 신성모독하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들이 계속 태클을 거는 본심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간파하십니다.
그것은 그냥 가이사의 것으로 남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사실은 세상 임금, 가이사가 주는 이 세상을 곁눈질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세상나라, 가이사의 나라와는 절절한 애착관계입니다.
이들이 후에 빌라도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가 왜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냐며 조롱합니다.
이때 이들이 자기 입으로 스스로 증언합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가이사가 왕인 세속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죄인들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그들이 그리 좋아 좇아가는 가이사의 나라가 주는게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혈을 짜내 세금을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릴 뿐입니다.
가이사나라에 충성을 다해 봤자 진짜 보물이 아닌 싸구려 빤짝이 구슬이나 만지작 거리게 해줍니다.
마실수록 목마른 갈증 나는 물을 줍니다.
자꾸 더 그걸 원하지만 절대로 세상이 인간의 갈증을 채워주고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사탄이 조종하는 이 세상은 바짝 따르면 따를수록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음란하고 거짓의 원조인 마귀를 닮아가고, 자기를 높은 자리에 앉힌 교만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세상 대부분의 권력자의 모습에서 우린 이걸 보잖아요?
그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세상이 줄 수 있는게 이것 뿐인데도 스스로 세상나라의 통치를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너희는 내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것에서 완전히 제해졌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언급하신 악한 포도원농부가 비유라면 실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행동하는 이 사건은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진노한 주인이 와서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듯 가이사의 것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막으려는 이들은 지금 예수님 말씀으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는 두 임금에게 속한 두 백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을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는 사탄과 세속나라를 선택한 가이사의 백성, 그리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은 성경시대만이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권세를 상징하는 당시 로마황제의 권력과 돈과 화려한 문명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나 마찬가지로 가이사의 세상왕국을 흠모하고 스스로 가이사에게 속박됩니다.
사람들을 보면 세상 일에는 아끼지 않고 바칩니다.
시간도, 돈도, 열정도, 가이사 제국의 삶을 위해 바치는 건 아까워하질 않습니다.
세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갑니까?
유행은 앞서서 따라가고, 새로운 전자기기가 나오면 그걸 제일 먼저 사고 싶어 줄을 서고 난리가 나잖아요?
오직 이 세상 것에 모든 관심이 가고 세상이 주는 것만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앞으로 왔을 때 그것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것이 맞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아주 확실히 말씀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 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아무 것이나 소유하시겠습니까?
사람도 자기 수준에 맞는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털털 거리고 찌그러진 차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다 떨어진 지갑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교양과 인격과 땅의 것으로 휘두르고 있다 해도 결코 존엄하신 하나님이 소유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직 아들 예수님의 보혈로 값을 치르고 사신 인간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를 하나님은 가이사나라의 황제와는 전혀 다르게 대우하십니다.
말라기3장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우리는 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이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면 소유자이신 하나님께 걸맞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에 중점을 두다보니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강조하지 않은 게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내일은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세상에 애착하며 왔다갔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세속의 죄성에 찌들어 있고 그게 몸에 익어있어서 저절로 그곳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을 환기시키십니다.
그때 ‘아니라, 나는 가이사의 세상에서 세속의 취미와 재미를 위해 살겠다.’
그러면서 버티지 말고 순순히 하나님께 속한 생각과 태도로 다시 돌이켜야 합니다.
세속적인 취미와 향락 자체가 우리에게 금지 된 악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허용된 것이지만 그게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세상 취미생활에 집착하는 정도는 신앙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취미생활 하셨겠어요?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면 하찮은 것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아인쉬타인이 종이 인형이나 오리고 있으면 격이 안 맞는 것이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성도에게 격이 맞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고 그 앞에서 사는 게 가장 만족스러운 취미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그 선하고 좋으신 인품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이 논쟁을 통해 결코 그들의 얕은 덫에 빠지지 않으실 뿐아니라 이 일을 통해 인간 두 본질과 그 영원한 운명을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했느냐, 내게 속했느냐.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눈으로 보이는 이 세상에 것이 진짜가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이 안에 침투해 온 하나님의 나라, 이 나라가 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게 모조고 어떤게 리얼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고 일시적인 세트장 같은 것입니다.
제가 전에 순천에 가서 드라마 세트장에 한번 가봤습니다.
드라마에서 마치 실제 동네인 것처럼 실감나던 그 곳이 가보니까 완전히 꾸며 놓은 세트장이더군요.
이 세상이 그런 것입니다.
이 세트장과 같은 임시의 세상 안에 침투해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이 나라가 그대로 들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가이사의 세상을 신봉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악의 세력과 같이 영원한 멸망,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꼭 들으셔야 합니다.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017년4월30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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