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주 들어오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전혀 새롭지 않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분이 아니라면 다시한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중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런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본성은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순순히 지켜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거의 쉴 새 없이 비판하고 남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한번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비판거리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정말 내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이 용서가 됩니까?
주라고 하셨지만 도대체 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줘야 하는지 이해도 잘 안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한 가지라도 제대로 지키려고 노력해보면 그게 우리 본성과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는지를 알 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말씀대로 지키려는 엄두를 못 내고 그냥 살던 대로 삽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예수님께서는 심각하게 보십니다.
이 명령을 주신 뒤 예수님께서 다시한번 확고히 깨닫도록 한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비유입니다.
‘너희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왜 내가 하는 말대로 살지 않냐’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십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홍수가 나면 다 쓸려가 버릴 인생의 집, 믿음의 집을 짓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며 왜 설교를 듣습니까?
하나님을 잘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듣고 그대로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도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공들여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지키냐 안지키냐는 단지 인격이 훌륭해지고 인간성이 돋보이는 차원에 관한 게 아닙니다.
이 명령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에 우리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대로 그대로 돌려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전문가인 우리들에겐 심각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측면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는 자에게 얼마나 풍성한 축복이 보장되었는지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오늘 말씀을 잘 깨닫고 이런 복된 성도들이 다같이 되시길 원합니다.
1. 먼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판은 객관적 기준으로 정당하게 선악을 분별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괜히 남의 잘못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사실에 관계없이도 그냥 비난합니다.
일본에선 요즘 30년 만에 장기계에 천재가 탄생했다고 열광하고 있습니다.
중학교3학년인 천재기사 후지이 소타입니다.
이번 대국에서 29연승을 함으로 일본 장기계에 최다연승자가 되었다죠.
그런데 후지이가 긴 대국 중 시켜 먹은 김치우동 때문에 우익네티즌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후지이는 조선인, 증거는 김치.’
‘일본 장기가 재일한국인에게 점령당했다.’
이런 비난들을 퍼붓고 있습니다.
아니, 김치 먹었다고 한국인이면 햄버거 먹으면 미국인입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게 바로 비난의 실체입니다.
비난은 사실과 공정보다 주관적인 판단과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이 내가 사는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도 비판합니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고 형편도 다른데 어떻게 자기가 기준이 됩니까?
엄청난 교만이죠.
지금 우리 예배에 대해서도 비판한다면 비판거리가 수 십 가지는 나올 것입니다.
왜 11시여야 하냐, 성가대는 왜 모여서 앉지 않느냐, 설교는 왜 30분을 넘어가냐, 반찬은 왜 세 가지로 정하지 않느냐, 카페에선 왜 머그컵을 쓰지 않느냐.
아마 적어서 내라고 하면 열 가지 씩은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 사람은 모두 다 비난받을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삽니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지 내 앞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못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이 다 화살이 되어 눈에 보인다면 우리는 다 전사했을 것입니다.
이게 죄인과 마귀가 합작해서 만들어 가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천국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곳에 어떻게 죄를 끌어 드리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이런 것들을 골라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천국에 들여 갈 것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평지설교라고 불리우는 예수님 설교 중 일부입니다.
산상수훈은 산에서 하셨고 본문은 평지에서 하신 설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제와 강조점은 비슷합니다.
세상시민과 천국시민이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가진 자들인지 보여주십니다.
천국의 자녀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생명으로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뚜렷이 보이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세상자녀들과 구별되는 도덕적 성품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비난받을 사람은 마땅히 비난해야 합니다.
비판하고 비난 잘 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자녀는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너희가 세상 사람과 똑같다면 칭찬받을게 무엇이냐.’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세상적 기준과 죄의 본성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더 엄중한 경고를 하시잖아요?
‘비판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받지 않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 했든 비판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하고 다닐 수가 있냐’ 이런 말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 문장에서 주어가 감추어져 있지만 신적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오직 하나님의 평가이면 됩니다.
하나님께 비판받을 게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주관적인 비판정도는 감수해도 됩니다.
남의 평가에 너무 예민하면 피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비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한줄기 희망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그 기준에 이런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던 그 비판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집사가 저럴 수가 있냐, 저런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냐’ 비웃고 멸시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데 분명히 우리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당연히 그렇죠. 죄의 본성이 다 같은데.
오히려 이렇게 남의 단점이 유독 잘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그 일에 범법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회사 내 스캔들을 제일 먼저 눈치 채고 퍼뜨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성 관계에 약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그 때 내가 했던 말, ‘저것은 신자도 아냐.’
그 말을 내게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것입니다.
나도 똑같이 그런 잘못을 했으니 나도 신자가 아닌게 된다는 것이죠.
‘저런, 천벌을 받을’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비난하려면 영생을 걸고 하십시오.
목숨 걸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비난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면 정죄가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각자 좀 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봉사나 전도나 기도나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헌금생활 등등, 그런 걸 조금이라도 더 잘하게 되면 그게 곧 우리의 대단한 의로움이 됩니다.
그러면 그런 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된다는 것이죠.
비난이 종교의 옷을 입으면 더 무섭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지옥에 보내는 일을 종교인 바리새인들이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라 해도 남의 잘못을 보고 지적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도 가끔 차라리 실컷 퍼붓고 회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들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말씀대로 순종하다 이렇게 무너지면 도미노 쌓다가 무너뜨리는 거나 같습니다.
이제까지 기껏 잘해주다 말 한번 잘못해서 사단이 나잖아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우리에게 그게 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릅니다.
실컷 상대방의 잘못을 쏟아 내고 나면 속이 정말 시원할까요?
죄짓고 속 시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 상대와의 사이는 더 악화되고, 우리 마음에도 금이 갑니다.
죄성에 한번 먹이를 주고 나면 다음엔 다루기도 더 힘들어집니다.
비난하는 입을 닫고, 예수님이 내게 해주시길 원하는 것을 그대로, 상대를 위해 복을 비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까요?
내가 말하고 행하는 대로 예수님이 갚아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힘을 다해 본성적 죄를 대항하고 천국시민의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영적전투입니다.
지역귀신을 쫒아낸다고 땅밟기를 하고 그런게 영적전투가 아닙니다.
그냥 내 안에 죄성을 부추기는 영적세력과 싸워 말씀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 전투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죄를 골라내고 관대하고 너그러운 천국시민의 성품을 확장시켜 가면 우리 안과 밖이 다 아름답게 됩니다.
아주 괴팍한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를 칭찬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계속 실패한다면 겉으로는 믿음을 지키는 것 같지만 내면으로 부터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비난하는 입술이 축복하고 위로하는 입술이 될 때까지 치열하게 나 자신과 싸우고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은 용서하라 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고통과 상처를 주며 삽니다.
그러나 모두가 피해자라고 하지 가해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때 할 일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내가 한 그대로 내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와 사랑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원천이 하나님의 용서에 있습니다.
우리가 대체 어떤 죄에서 용서받았는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비춰주시면 ‘내 죄가 머리털보다도 더 많구나’ 그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걸 다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희생 없이 용서해 주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신 거예요.
자식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자식 앞에서 자기 종아리를 때리듯이.
그렇게 성자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의 형상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런 큰 용서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 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 본성 안에는 용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 못하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이렇게 고약하고 힘들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확고한 징표는 쉽게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받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에 거기에 비하면 타인의 죄는 작은 것임을 아는 것이죠.
어찌보면 같은 죄인으로서의 동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 또한 여전히 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관대함이구요.
용서하면 내가 더 패배자가 되는 것 같지만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천국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3.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라는 것은 재물에만 한정 된 게 아닙니다.
앞에서 하신 말씀과 연관시키면 비난대신 관대함을 주고, 정죄대신 격려를 주고, 미움대신 용서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만큼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해서 안겨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주어가 감춰져 있지만 신적수동태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줄 때,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면 실망만 더해집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을 아직도 믿고 의지할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을 의지할 때 우리는 가장 약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장 강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것도 없어서 못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나눠 줄만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안 주시고 주라고 하실 리가 있습니까?
물질이 없다면 건강이 있습니다.
건강이 없다면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게 돈 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영혼을 전도하는 데 돈을 주면 됩니다.
만나서 밥 사주고, 선물 사주고, 그러면서 전도하는 것이죠.
그게 없다면 지식이 있고, 지식이 없다면 다른 재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죄인이라 내게 덜 중요한 것은 내주지만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잘 주지 않습니다.
내가 울타리를 치고 유독 지키려는게 있다면 그것부터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지 않으면 그 이상은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오늘 말씀에 있잖아요.
아끼는 건강, 아끼는 시간, 아끼는 돈, 아끼는 재능, 아끼는 내 생활.
내 놓아야만 더 주신다는 의미가 분명히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가 움켜쥐고 줄 것을 세고 있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주실 때 똑같이 세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탐심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니 항상 손을 펴서 베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순방 중인 영부인께서 옷이 예쁘다는 말을 듣고 벗어 주었다는 데, 즉석에서 나오는 그런 행동은 그동안 베푸는 습관이 없다면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성적으로 비난하길 좋아하고, 조그만 허물에도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도록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내가 행하는 대로 주신다는 말씀이 두렵잖습니까?
예수님이 그냥 엄포만 놓으신 것이겠습니까?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그대로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저절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죄가 얼마나 끈질긴지 깨달았어도 그 은혜를 뭉개버리고 본능대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깨달은 것을 행하려고 하는 성령님의 감동과 내 본성과의 싸움을 매일, 그리고 평생 해야 합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한 것은 죄의 본성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다음 용서하지 못한 사람 용서하려고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비난하기를 즐기던 입을 틀어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돈벌고, 성공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고 쫒아가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는 나는 무능해서 못한다 그럽니까?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 것이 진짜 내게 더 유익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쓰레기 되고 말 것은 그렇게 해내려고 하면서 정작 보석 같은 이 일은 왜 할 생각조차 않하냐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감정도 없고 화도 못내고 늘 당하기만하고 살아야 하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재미는커녕 속 시원히 말한마디 못하고 살아가면 우리는 목석이 되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1문에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돌보신다는 것에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자체가 우리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또 자신의 즐거움이 됩니다.
천국의 삶이 무엇입니까?
고래등 같은 집에서 이 땅에선 없어서 못 누리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예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천국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천국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티끌만한 근심과 걸리는 것이 하나 없이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즐거워하며 사는 것처럼 천국에서는 더 완벽한 기쁨 속에서 산다는 것이죠.
지금부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즐거이 살지 못한다면 천국에서인들 즐겁겠습니까?
죄에 속한 본성을 이기고 비난보다 복을 빌고, 원망보다 용서를, 그리고 베푸는 삶을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점점 더 누리며 복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7월2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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