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경향신문에 ‘재벌부터 알바까지 모두가 위기인 한국경제’란 기사가 났습니다.
우리나라 기업 중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실기업이 36%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청년실업률은 또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하죠.
그런가 하면 75세 이상 일하는 인구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노년이 되어도 여전히 생활비를 벌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꽃 같은 젊은 생명들의 죽음까지 우리 사회를 더욱 침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비유설교입니다.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아서 다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이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끈질기게 탄원한 결과 소원을 이루었다는 내용이죠.
본문을 읽는 중에 하나님께서 벌써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기도가 부족했구나’
‘기도응답이 없어 낙심했는 데 좀 더 기도해야겠구나’
하나님은 그렇게도 언제든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 삶과 신앙의 교과서로 삼을 때는 정확하게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본문 같은 경우 ‘이 여인처럼 떼를 쓰며 매달리면 하나님도 못 이기고 들어주신다’라는 식의 잘못 된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설교의 의도가 아주 분명하죠.
1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누가가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예 친절하게 밝혀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끈기있게 기도해야 할 이유가 우리의 지구력 테스트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핵심인 기도생활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르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생활은 기름이 떨어지고 엔진이 멎은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몸도 마음도 무겁고, 잘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누가봐도 믿음이 견고하고 은혜가 넘치는 복된 신앙적 삶은 기도 없이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그게 성경이 가르치시는 사실입니다.
신자들의 생활을 이끄는 두 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올바르게 되면 삶은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리스도의 향기와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 성도라면 말씀과 기도에서 올바르지 않거나 꾸준한 훈련이 되지 않아 인격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호소와 탄원의 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받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복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대변하는 것이 본문 속 여인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이 여인처럼 억울한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유대사회를 사는 제자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가여운 여인으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멀쩡하게 차리고 다니고 잘 들 사는 것 같지만 그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가엽습니다.
유대인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배려하고 돌보라는 율법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인격이 경시되던 고대사회에서 보호해줄 가장마저 없는 이들은 궁핍할 수밖에 없고 차별당하기가 쉬운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약자들은 공동체 마을에서 각별히 돌보도록 율법을 통해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아무 힘이 없는 여인이 법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억울한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재산상의 손해를 보거나 그런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 줄 사람이 없기에, 여자가 무시당하던 그 시대에 혼자 관원에 나가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소송에 휘말리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원고가 되었든 피고가 되었든 일단 범죄자 취급을 받고 의심을 당하면 인격적 모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와 줄 가족도 없는 여인이 이런 소송을 감당하려니 얼마나 심신이 고달팠겠습니까?
어려운 일 당할 때 곁에 사람이 없으면 더 서글프죠.
그런데 하필 그 도시의 법관이란 자가 자타가 공인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뒤집어 놓는다거나, 처음부터 가난한 여인의 호소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재판관이 자기 스스로 대놓고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에서 파견한 행정관료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제자들은 속으로 ‘쯧쯧, 그 여자 참 안됐군, 원한 풀기는 틀렸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가난한 유대백성들에게는 흔해빠진 억울한 재판 광경이었을테니까요.
요즘 같은 시대에도 돈이 재판의 판결을 움직이는데 당시야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4절에 보면 이 재판관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괴롭게 한다’로 번역한 원문의 단어는 복싱 용어로 눈 밑에 멍이 들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말합니다.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 여자가 내게 한방 먹였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찾아오고, 간청하고, 호소하는 여인으로 인해 성가시고 지쳤을 뿐 아니라 자기 얼굴에 먹칠하게 생겼다는 것이죠.
그래서 두 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결말은 억울한 여인이 예상을 뒤엎고 원한을 풀게 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비유를 하신 예수님은 성도들이 여인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을 넘겨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종종 원수를 만나 억울한 삶을 살 것이기에 우리 또한 이 여인과 같이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죠.
지난 한주간 억울한 일, 원한이 될 만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여기저기 아파 왠지 억울하진 않으셨습니까?
괜한 사람 때문에 힘든 일이 있었고 속을 뒤집어 놓지는 않았습니까?
남들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만 억울하게 낙오되는 느낌 받지 않았습니까?
지난 주 설교대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착한 양으로 살려고 했는데 옛날 버릇이 올라와 또 실패하고 한탄스럽지는 않았습니까?
매일 심신을 괴롭히는 이런 일들은 우리 안과 밖의 원수로 인한 것들입니다.
이것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나약함 속에서 믿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자식들이 진창에서 허우적대고, 인생에 실패하고, 오명을 쓰고 살아가도록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의 목숨을 내놓고 우리를 방탕하고 추하고 포악한 죄에서 건져 내셨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행복하라고 하신 줄 믿습니다.
여전히 과거와 똑같이 몸에 더러운 걸 묻히고 한숨과 낙망 속에서 살라고 우리를 구원해 내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살라고 하셨지 거지 같이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렴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맛도 못 보며 살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7:38)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0:10)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준비하고 기대에 부풀어 계시는 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런 은혜와 혜택을 누리며 거룩하고 영광스런 삶을 살게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된 삶을 방해하고 갈취해 가는 원수가 있으니 그것을 뺏기지 않으려면 항상 기도해야 하고, 이미 뺏긴 것을 찾아오려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고통은 대부분 악의 세력과 악이 구축한 사회 구조와 악인들에 의해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다만 악에게서 구하시옵소서’
매일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넘보는 악의 세력은 오늘 여인이 만났던 원수만큼 교묘히 다가와 우리의 좋은 것들을 털어갑니다.
지난 주에 교회컴퓨터가 랜섬웨어라는 바이러스에 해킹을 당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 모든 파일에 저도 모르는 암호를 걸어놓고 파일을 살리려면 돈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파일을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회사 일이라 할 수 없이 50만원을 보내고 파일을 구출했다더군요.
저는 천만 다행으로 몇 주 전 대용량USB를 사서 자료들을 복사해 놓았기에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됐습니다.
BBC와 뉴욕타임즈도 똑같은 바이러스에 의해 해킹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커들이 인터넷망을 통해 교묘히 침입해 중요한 정보를 빼가고 망쳐놓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 삶에 잠입해 들어오는 데 어떻게 악에게서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을 어떻게 상대하겠어요?
우리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이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악령이나 악한 사람들이나 악한 구조들로 인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이 피할 길을 이번처럼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셔서 원수가 우리를 파탄시키려고 쳐놓은 함정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런 사실을 대수롭지 생각하지 않기에 용감하게 맨 정신으로 대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원수의 덫에 걸려 심령이 상하고 문제와 환경과 관계가 악화되고 낙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부에 있는 우리의 타고난 본성인 죄와 탐욕과 이기적인 마음이 행복하고 복된 삶을 갈취해가는 내 안의 적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볼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성경을 통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이 인이 박힌 죄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한 것을 깨닫고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는 데, 전에는 죄인 줄 모르던 것들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뻔뻔하게 죄를 지었는데, 이젠 눈치를 보며 죄를 짓는 게 달라집니다.
죄인 줄 알았다고 해도 죄를 안 짓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두뇌의 유전자와 메카니즘이 자동으로 죄를 선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불행의 원흉이 또 내 안의 죄라는 것입니다.
밖의 원수는 유혹하고 내 안의 죄는 거기에 화답하며 서로 내통을 하며 우리를 죄악으로 끌고 가는 것이죠.
죄를 짓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도 뺏기고, 평안도 잃어버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나 스스로도 그런 내가 싫어지기에 만사가 심드렁해집니다.
거듭되는 죄로 신앙의 아름다운 빛과 탁월함도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죄가 자연스럽고, 죄가 좀 있어야 인생에 멋이 좀 나는 것 같았는데 점점 죄가 원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내 안의 옛사람인 원수가 하나님을 향한 새사람의 선한 의욕을 다 집어 삼키는 이 억울함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단지 신체의 허약만이 아니라 죄의 육신으로 인한 영적 무기력함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강한지 이 정도 설교로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이성과 지각과 몸의 세포들이 다 죄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거듭났지만 아직 연약한 새생명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불신앙과 세속에 대한 애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께서 새생명을 강하게 하셔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조목조목 매일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의 결과 죄의 갈등을 조금씩 이겨내며 신앙과 인격이 아름답게 조화 된 성도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사는 것과 생활에 떠밀려 성도의 이름만 걸고 사는 것은 다릅니다.
당장은 비슷할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신앙의 풍성함과 축복은 비교할 수 없이 점점 벌어집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추월하고 앞서가잖아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기도 중에도 낙심할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고 순종해서 기도하는 데 무슨 낙심할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오늘 비유에서 힌트를 주시죠?
4절에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매일 찾아가서 탄원하고 호소를 했지만 재판관은 얼마동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매일 계속 되도 여전히 변화가 없고 환경도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은 기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중보기도 제목으로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한 동안은 기도해도 응답의 조짐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건 안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덜컥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기도를 계속하다보면 뜻하지 않은 시간에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주보에 있던 중보기도의 제목들이 하나씩 삭제되어 가지 않습니까?
오늘 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낙심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란 말은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입니다.
속히 응답하신다면야 낙심될 까닭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속히’라고 번역 한 원문의 단어는 ‘즉시’라는 뜻보다 ‘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낙심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하는 지 이해가 되시죠?
아무 소식이 없는 것 같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갑자기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물이 끓기 위해서는 99도여도 안되고 100도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고 계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수로 인한 우리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본문의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와 신자들의 부르짖는 원한을 속히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조합하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아무 소망을 둘 수 없는 무자비한 자에게도 계속 간청한 결과 성과를 얻어냈다.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녀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런 결론은 뭔가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이 비유의 마지막 포인트는 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물론 종말적인 배경을 갖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종말의 신앙인들에게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거라는 안타까움이시죠.
그게 우리 세대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와 이 말씀을 또 조합하면 이런 메시지의 결론이 나옵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끈질기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매달리는 여인처럼 세상에는 매달리고 집착하면서, 하나님께는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걸었던 그 눈꼽 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는구나.
하나님 앞에 응답을 기대하며 끈기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 없구나.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뭘 얻으려고 죽을 힘을 다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는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상에서 아무리 삽질해도 절대 좋은 것을 거기서 얻지 못합니다.
진짜 좋은 것은 세상이 주지 않고 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 정확한 의도로 말하자면 종말적인 신앙과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앞의 내용을 보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설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원수의 억울한 압제에 대해 탄원하는 기도는 종말시대에 성도들과 하나님나라를 박해하는 사탄의 세력의 심판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다 넓은 의미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완성되고 최후의 심판까지 우리는 종말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지구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는 데,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가 안팎의 원수를 이기고 복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을 어렵게 하고, 가족들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세력을 제거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본문을 통해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 나라를 세우는 일이 곧 우리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과 안정된 삶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인 교회, 지역적인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또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저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평범한 하루가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점점 시대는 하루의 평안을 누리며 살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고 하셨겠어요?
어제의 은혜와 어제의 기도로 오늘을 살 수 없을 만큼 점점 힘들어지고 원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음에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절실히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불신앙으로 보십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영적인 원리를 들은 우리는 오늘부터 더 힘써 기도하길 원합니다.
시간이 날 때 기도하려고 하면 바쁜 세상이 절대 기도할 시간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힘써 지키면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깊어지고 모든 것을 기도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원수에게 한방 먹이는 것입니다.
어느 시간, 얼마 만큼의 시간을 건강하고 복된 이 땅의 삶을 위해 기도할지 꼭 결정하고 행하는 모두를 하나님이 축복하리라 믿습니다. 아멘.
2016년6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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