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누가복음1장1절-4절)

남수연 2016. 7. 7. 00:52

성경을 볼 때, 이걸 누가 어떻게 해서 쓰게 되었을까, 이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오직 이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이 성경에 대해 전체적인 지식을 알고 믿는 것과 그냥 믿는 것은 차이가 많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알지 못하는 것은 믿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성 없이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고,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믿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우리가 작은 돈이라도 불리고 투자하려면 이것저것 따지고 0.1프로의 이자를 계산하고 골치가 아플 정도로 머리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과 영혼의 결말을 가르치는 성경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믿으며 그걸 믿음이 좋다고 할 게 아닙니다.

그 어떤 지식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아는 것만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 각 권은 기록자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쓰게 된 배경도 다릅니다.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 성경이 생긴 내력과 진정성을 살짝 맛보려고 합니다.

누가는 바울사도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라고 소개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는 신체적인 질병을 갖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었던 바울을 돌보기 위해 험난한 선교여행 중에 주치의로 항상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보면 모두가 바울을 떠나고 누가만 곁에 있다고 썼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죽은 뒤에도 20여년을 생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사후에, 누가는 바울이 그의 생애와 몸이 다 산화되고 부서지도록 전했던 그 복음을 글로 남기기 위해 붓을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일대기인 전기문 형식의 누가복음과 사도들의 치열한 복음전파의 현장을 생생하게 다룬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성경은 서두에서 공통적으로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기 위해 썼다고 밝힙니다.

각하로 불리 운 이 데오빌로는 아마도 로마제국의 고위 관료였겠죠.

또 예수님을 믿고 더 알고 싶은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가진 데오빌로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진실을 파헤쳐 방대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의 기반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지식이 부족했을 로마사람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는 예수님과 관련 된 구약성경의 핵심들을 아주 쉽게 전달하려고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최초로 번역 된 우리말 성경이 그래서 이 누가복음입니다.

중국 심양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로스선교사가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영어성경을 번역한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왜 누가복음을 제일 먼저 번역했는지 아시겠죠?

구약성경을 잘 모르는 조선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신자들이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마태복음부터 읽는 것 보다 누가복음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서론에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어떤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이 말은 이제부터 내가 쓰는 내용들은 전부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이란 말 속에는 아주 깊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건은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고되었던 것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당대에 갑자기 발생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준비되고 예고되었던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수천년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이루셨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제자들 사이에서 은밀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기적들은 수천명 수만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뤄진 일입니다.

십자가형은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사형장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고, 부활사건은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팩트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사실이 퇴색되어 신화처럼 혼미해지지 않도록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건들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 라며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을 기술합니다.

복음의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죠.

헤롯왕은 당대 역사서에 기록이 남은 인물입니다.

21절에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

이 내용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식민지에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대대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로마당국의 정책이 엄중하고 긴박했기에 해산할 때가 다 된 마리아도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호적자가 몰려오는 바람에 여관이 없어서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이죠.

세계사와 성경의 기술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3장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있을 때.

우리에겐 이름도 어려운 인물들이지만 로마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이 남은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역사적인 배경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가 신화나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격자들이 전수해 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을 믿습니다.

이것이 철학이나 명상이나 이상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은 다 역사적으로 진짜 일어났던 사실입니다.

홍해바다는 진짜 갈라졌고, 하늘에서는 진짜 양식이 쏟아졌습니다.

바다를 건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만나를 받아먹은 사람들이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잖아요.

모세가 이것을 기록한 성경은 숨겨 놓았다가 천년이 지나서 발견된 게 아닙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자식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교육했던 교과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데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로 이천년 전 이 땅에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세계사에도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탐구해서 만들어낸 종교가 아닙니다.

실재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존재하는 세상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불교의 경전에 대해 이런 말씀하시더군요.

불교의 경전이 여러 종류가 있는 데 그 중 심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불경을 아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법화경에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경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들은 방편이다.

, 이 내용들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편리하게 만들어낸 묘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편이란 말이 불교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불경의 내용들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교훈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말하면 불교인들은 우리는 극락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게 사실인 줄 아는 데 사실은 방편, 착하게 살라고 교훈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스님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중생들에게 알려주지를 않으니 진짜 극락이 있는 것인 줄 안다는 것이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에서 섬기는 조상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조상신을 섬기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이 유교를 우리나라에 수출한 중국에서도 지키지 않습니다.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는 공자가 유교의 충과 효를 통해 나라를 결속하기 위해 방편으로 만들어낸 것이지 조상신을 알고 만든게 아닙니다.

조상신이 있다면 다 우리를 도와주셨겠지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든데 그냥 있겠습니까?

그냥 제사밥만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께서 신이 되셨다면 우리가 고생하는 것 보고만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다 지어낸 이야기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의 경전들이 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추측하고 종교를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는 자신의 기록인 누가복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말에서, 누가가 이 사실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속의 행적에 대해 누가는 자신이 마치 증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당당한 고백입니다.

제가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본 사람처럼 자신 있게 주장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진리를 듣고,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깜짝 놀라 이것이 진리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구나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때 과거의 십자가 사건은 놀랍게도 오늘 내게서 이루어진 사실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단지 과거에 역사하셨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에서 오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현재적입니다.

장차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현재 이 세상에서도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멋지게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약자와 가난한 자, 억눌리고 억울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고통으로 가득 찬 게 세상입니다.

가진 자, 기득권자, 권력자들이 탐욕과 포악한 죄성으로 세상은 일그러져 있습니다.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것들을 보십시오.

재벌가의 맏딸이 뭐가 부족해서 부당하게 비리를 저지르고 40억을 챙깁니까?

그 분이 가진 그 많은 재산에 40억이 무슨 그렇게 큰 의미나 있겠습니까?

결국 그 돈은 다 없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져간 거고, 누구에게는 피눈물이 나는 돈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악한 세력과 이런 물질세계에서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데서도 구원하십니다.

빚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면 분명히 거기서도 구원해 주십니다.

저도 한 때 산더미 같던 빚에 허덕였지만 분명히 거기서도 구원받았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면 그 고통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길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내게서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 안의 포악자인 죄성이 있잖아요?

이런 우리 안의 죄로 인한 탐욕과 불평과 분노와 나쁜 인간성에서도 우리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매일이 근심에 짓눌리고 환경에 우겨 싸여서 염려 속에 산다면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여전히 죄에 질질 끌려다니면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운동에 목을 매고, 음악을 귀에 꽂고 살고, 술자리를 쫒아 다니고, 새로운 동호회를 찾아 다닙니까?

삶이 괴롭고, 의미가 없고, 힘들기만 한 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하는 동안에 현실을 잊게 되고 그렇게 어울리고 땀흘려 운동을 하는 나는 잠시 멋있어 보이거든요.

현실은 도피해서 되는 게 아니고 현실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일상이 지루하고 허무가 몰려오고, 두려움과 걱정이 슬며시 다가오면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갈망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세상에 접촉해야 만족하게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며 주님을 묵상하며 이 세상을 더 크고 영원한 세계 아래에 놓으면 분명히 그 답답한 현실에서 확 구원을 받습니다.

비로서 삶의 의미가 보이고, 현재가 보배롭고, 자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내 영원한 존재가 감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현재의 환경을 높은 차원에서 보게 되면 헤쳐 나갈 길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다면 분명히 현실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누가에게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 자기 안에 이루어지고 성취되었듯이 우리 안에도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현재 우리 삶에서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현실에서 이런 구원을 실감하지 못하고, 구원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4절에서 이 성경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죠?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데오빌로가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신앙과 지식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성경이 약속하신 평강과 축복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들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을 믿게 되었지만 더 확실하게 알아야 했습니다.

믿음의 대상과 근거에 대해 근원부터 자세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 당시엔 로마황제만이 유일한 신이고, 왕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 왕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로마 관료가 가진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믿음을 지켜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위험한 때가 올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방글라데시에서 테러범들이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코란의 경구를 외우는 사람은 내 보내고 못 외우는 사람은 고문하고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에게도 성경을 믿을래, 코란을 믿을래?예수그리스도를 믿을래, 마호메트를 믿을래?

이런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좀 더 확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가 자신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지만 또 살펴보았다고 하잖아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하게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여기서 미루어 살핀 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의사가 환자의 병력을 알아내기 위해서 면밀히 살핀다는 단어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진찰했다 그런 의미겠죠.

누가는 의사로서의 치밀한 관찰력과 판단력으로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사실들의 진정성을 또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있게 이것은 진실이고, 진리다라며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합니다.

막연한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보다 더 실질적이고, 보다 더 이익이 있고, 보다 더 위중한 일이 생기면 막연한 하나님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환난이 없을 때 우리는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다들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련이 오면 분명히 진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시련을 이기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놓아 버리죠.

우리 믿음은 항상 충분치가 않습니다.

예배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나면 뭔가 믿음이 생긴 것 같지만 걱정스런 전화 한통에 마음과 함께 하나님도 무너지는 게 우리입니다.

우리 믿음이 더 확실해서 장래에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이 세상 삶에서도 매일 구원받으려면 누가가 전해주는 이 복음서를 읽고 더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 기록해 놓으신 이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두워졌다고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 청년 때 교회에는 팔십 되고 구십 되신 권사님들이 얼마나 교회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셨나 모릅니다.

성경에 온통 빨간 줄 투성이였어요.

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 하면 우승은 권사님들 차지였습니다.

그때 믿음의 성도님들이 참 그립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만큼 믿음이 성숙하다고 볼 수 없지만 성경을 아예 읽지 않는 성숙한 믿음도 없습니다.

성경을 열어 오늘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지 기대하며 말씀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의 하루는 달라집니다.

실제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경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어 우리 심령을 쪼개고 변화시킵니다.

요즘 오후예배에서 출애굽기를 보고 있는 데,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신 그 십계명과 율법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의 깊이가 한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삼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알고 하나님의 그 깊은 인품과 사랑을 누리려면 당장 성경을 펴시기 바랍니다.

 

이 누가복음을 처음 받아 들고 감격에 빠졌을 데오빌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밤새워 이 성경을 읽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가진 큰 권세와 부와 그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더 하나님을 간절히 알기를 원하는 사랑받는 자 데오빌로를 위해 누가를 감동하셔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 데오빌로에게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현세를 가장 복되고 만족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성경이 오늘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대해 전체를 이해를 하셨으니 이제 읽으시기만 하면 되겠죠?

우리는 잘되고 복 받을 일을 왜 이렇게 등한시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행복한 길을 보여주신 이 성경을 항상 읽고 지키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또 다른 사랑받는 자, 다른 데오빌로에게 이 성경을 전해주고 구원을 받게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6년7월3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