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2_pgmOvzyfo&feature=share
<2020년2월2일 설교영상>
이번에 기윤실에서 우리나라 종교에 대한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예전대로 천주교였습니다.
30%가 천주교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2위는 26.2%가 응답한 불교였고 우리 개신교는 3위로 18.9%가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부끄러운 성적표죠.
사실 어려운 이웃에 좋은 일을 제일 많이 하는 건 우리 개신교입니다.
지난 연말연시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어려운 곳을 찾아가 연탄 나르고, 김장 배달하고, 방한복과 쌀을 전달했습니다.
불치병 치료비 지원부터 장학사업 까지 교회가 하는 일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없다면 국가 복지 체계에 구멍이 뚫린다고 할 정도입니다.
실질적인 봉사는 이렇게 많이 하면서도 평판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조사결과는 교회 자체에 대한 불신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집에 있는 기독교인에 대한 불신이고, 직장에 있는 기독교인에 대한 불신이고, 내가 아는 기독교인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신자들의 인격과 사는 모습에 대한 실망인 것이죠.
많은 헌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한국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분명히 문제가 있죠.
예수님이 살라는 대로 살았다면 적어도 사회가 ‘너희를 못 믿겠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오늘 본문의 결론에서 같이 읽었듯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인생은 결국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몰려 든 수많은 군중들이 가르침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돌아서서 자기 살던 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점점 더 구덩이로 빠져 들었습니다.
결국 주님 이후 40년 만에 나라는 멸망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후 이천년여년 만에 다시 세워진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를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이끌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1. 사람에게는 잘 보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39절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광경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계속 배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형제들에게 배우기 시작하죠.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 직장에서 또 배웁니다.
결혼을 통해 배우고, 자녀 출산을 통해 배우고, 가족과의 사별을 통해 죽음도 배우고, 노년에 혼자되는 것도 배웁니다.
사람 평생에 죽는 순간까지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인격적이고 헌신적인 부모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게 시작이었습니다.얼마전 세상을 떠난 롯데그룹 신회장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하며 발버둥을 쳤지만 자본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잖아요?그때 신회장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한 일본 전당포주인이 꽤 거액의 자본을 대줘서 공장을 시작합니다.
불행히도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었지만 신회장을 믿은 그 전당포 주인이 또 거액의 자금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비누공장, 껌 공장이 큰 성공을 하며 롯데그룹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살면서 좋은 인도자, 조력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청소년들, 청년들이 특히 학교에서 사회에서 좋은 사람 만나는 복을 주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둘 다 앞을 못 봅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다른 맹인을 데리고 길을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숱하게 넘어지고, 부딪치고 결국 위험한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는 기술이나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지도자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능력은 대단하잖아요?백종원씨 같은 요식 전문가에게 솔루션을 받고 장사에 재기하는 사람들이 골목식당에 많이 나옵니다.
실력자의 원 포인트 레슨만 받아도 스포츠에서 경기력이 훌쩍 향상되죠.
예수님의 맹인에 대한 비유는 세속적인 스승에 대한 것이 물론 아닙니다.
자연인으로 출생한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맹인이기에 이 세상의 본질이자 근원인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 뒤에 세상, 이 땅에서 사람이 당하는 고통과 두려움에 대해 본질적인 해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설날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멘토라고 불리는 승려가 나와 즉문즉설이라는 프로를 진행했습니다.
방청객 중에서 질문을 하면 즉석에서 조언을 해 주는 방식입니다.
제가 보았던 것은 한 애기 엄마의 질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일찍 부모와의 결별의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꽤 나이가 들어보이던데 아직 어린 딸을 안고 있었습니다.
늦게 얻은 이 딸이 너무나 소중한데 혹시 자기에게도 무슨 일이 생겨서 딸이 자기 같은 불행을 당할까봐 매일 두렵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이렇게 답변하더군요.
‘엄마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에게도 옮겨가서 아이도 불안해 진다, 아이는 그런 것 모르고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그런 생각 말아라’
당장은 그 말대로 걱정을 접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아기 엄마는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한 것입니다.
미래를 모르고 맹인처럼 내일을 모르기에 오는 불안감을 물은 건데 스님은 마음을 바꿔먹으란 답 밖에 주지 못한 것이죠.
사람의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즉설로 답할 만큼 간단치 않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렇게 간단하네’ 싶지만 본질적인 문제와 남의 아픔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게 좀 아쉬웠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과 고통과 영혼에 대해 알고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죽음 뒤의 삶을 가봐서 알겠습니까?
오직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을 통째로 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말씀이 진실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지도자를 만난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수수께끼 같던 인생의 답을 알고 드디어 눈이 열려 보게 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맹인들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게 된 사람들이 다시 맹인을 인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40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이 길을 눈으로 보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거리낌 없이 ‘이 길이 그 길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 길에 대한 복된 소식이 성경과 믿음의 성도들과 성령님을 통해 맹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도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필요한 학문과 지식과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니라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보여주는 것이 있죠.
다니엘서1장17절,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세상 지식을 더욱 탁월하게 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과 처세술도 하나님을 아는 지혜 안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2. 그렇기에 성경은 구원받는 방법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뒤죽박죽 된 삶을 바르게 정렬하고 다시 행복을 되찾는 방법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6장 전체에 나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세상에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와 원리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맞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나오는 것, 세상에서 터득한 방법들은 다 틀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다 뜯어 고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앞에서도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 꿔줄 때 바라지 말고 꿔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돈을 빌려 줄 땐 이자를 바랍니다.
최소한 원금을 돌려 받아야 하잖아요?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네가 그걸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원금도 바라지 말고 꿔주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 형편이 나아져서 돌려 받으면 좋은 것이죠.
그런데 혹시 떼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그래도 결과적으로 이득이지 절대 손해 안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대로 행한 사람들에게 더 후하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원리를 모르거나 들어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기 이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런 생활방식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는 당장 손에서 계산 된 대로 살아야 안심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안하신 방식이 얼마나 터무니없게 느껴졌겠어요?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내어 주라
듣는 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렴 지금 내가 단벌옷인데 그걸 주라고 그러시겠어요?
네게 줘도 될 만큼 내가 채워주시겠다는 뜻이잖아요?
이걸 이해 못하기에 어린아이가 손에 쥔 과자를 놓지 못해서 더 좋은 것을 줘도 받을 손이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도 영원에 맞춰져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삶은 깨졌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그동안 무관심하고 등을 돌렸던 하나님을 이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창조세계 모두에 내려주시는 은총 이상의 각별한 보호자와 공급자가 되어 주십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람들과 더 행복하게 더불어 사는 길을 안내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에 대해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랴 할 수 있느냐
참 얼마나 예리한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남에게 있는 죄와 단점은 티끌만큼 작아도 잘도 찾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리한 관찰은 변명이나 빠져 나갈 틈을 주지 않으십니다.
만일 내 눈에 누군가의 잘못이 보인다면 내게는 그 이상의 잘못과 단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가 잘 보이는 사람은 나쁜 마음이 들보처럼 들어 앉아 봐야 할 것은 못보고 안 봐도 좋을 것만 본다는 것이죠.
남보다 비범해서 사람들의 결점이 더 잘 보이는 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선 이미 그 죄와 결점을 경험한 사람들이 더 잘 봅니다.
우리는 마약이나 카지노 그런 게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지 않잖아요?
TV에서 새로 나온 게임 광고 같은 것 봐도 그게 뭐하는 건지 전혀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눈에 예민하게 보이는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이미 우리가 경험해서 알게 된 죄라는 것입니다.
‘난 척하면 다 보여’ 하는 게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악행들은 부분별로 개인차가 있지만 본성 안에는 다 똑같이 갖고 있는 죄입니다.
어떤 교장선생님이 한 분 있었는데, 이 분이 참 점잖고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앞머리를 어디에 세게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분이 이전과 다른 이상한 성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평생 부인밖에 모르던 사람이 바람을 피우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긴 부인이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해 본 결과 부딪칠 때 전두엽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전두엽은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절하는 두뇌입니다.
이 전두엽이 파괴되니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편도체의 활성화를 누르지 못해 그 나이에 전에 없던 본능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호르몬 치료를 하며 증상을 완화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임상적으로 있었던 사례입니다.
이걸 보면 사람의 내재 된 본성은 다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심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십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바리새인들은 흠잡을데 없는 예수님도 죄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오만한 태도는 결국 하나님께도 만용을 부리게 됩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전목사의 경우가 그렇잖아요?
모든 사람을 자기 발톱의 때만큼 알더니 결국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데 죽는다’는 망언을 터뜨렸죠.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까부는 사람들을 오래 참고 보시는 게 참 대단하시단 생각만 듭니다.
예수님이 뭘 모르면서 그렇게 주님을 비방하고 대들던 사람들 다 참고 대하신게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오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열매로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창고에 선을 차곡차곡 쌓은 사람은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생각과 행위를 쌓은 사람은 결국 악한 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을 쌓아서, 즉 적선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를 쌓아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냐 악한 것을 쌓아서 나쁜 사람이 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신자들도 여전히 선과 악에 당면해 있잖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결론을 보면 그런 결과가 구원과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왜 내가 한 말은 지키지 않느냐
그리고 이어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은 사람들의 믿음이 결국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들은 말씀을 힘써 지키고 마음에 선을 쌓아가는 것은 구원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라면 미움과 비난을 그치고 허물을 너그럽게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걸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해보려고 신경을 써보면 남의 말 안하고, 남의 탓 안하는 게 참 힘들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서로 대화 할 때도 밍밍하고, 속도 왠지 시원치가 않습니다.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 데 안 하려면 속에서 부글부글거리고, 입이 근질근질 합니다.
우리가 특별히 악한 의도로 남 얘기를 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남의 결점을 끄집어 내는 것은 속에 있는 나쁜 본성을 만족시키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기에 멈춰야 합니다.
이미 그렇게 많은 악을 쌓아왔기에 오늘 말씀에 순종해 보려면 만만치 않게 힘이 들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노력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산다면 마음의 창고엔 점점 나쁜 것이 쌓이고 입만 열면 개구리 같이 와글거리는 험담이 튀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 말의 열매를 보고 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다 평가했습니다.
‘남의 말 좋아하는 저 사람은 좋은 사람 아냐. 어디 가서 내 얘기도 안 좋게 할거야’
‘저 사람은 늘 부정적이라 대화하고 나면 뭔가 찜찜해’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대우하도록 저금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말도 잘하지만 사람들이 공감하는 말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처럼 말 잘못하는 사람들은 참 부럽죠.
저도 말을 잘못해서 이렇게 써서 읽잖아요?
윈프리는 말에 대한 자기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감은 기꺼이 약해지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남 앞에서 약하고 부족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 어물거려서 창피를 당한다 해도 그걸 무서워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고 반복해야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주저하게 합니다.
그렇게 까지 꼭 해야 하나?
정말 저 사람에게만은 절대로 관대하고 싶지 않은 대상도 있습니다.
내가 판단할 때 대단치도 않은데 오만한 사람을 보면 ‘그래, 네가 옳다’ 이렇게 인정해 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살가운 말을 하기가 이젠 어색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를 복되게 바꾸려면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남들에게 친절하면 날 얕잡아 보지 않을까, 너무 위선적이지 않을까, 내 친절이 낯간지럽게 되지 않을까.
말씀대로 나를 바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감정에 끌려 다니다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세상 처세가 더 나을 것 같지만 내 꾀에 내가 넘어가고 마귀가 파 놓은 구덩이에도 빠질 것입니다.
우리 오늘 말씀대로 일주일만 살아봅시다.
남의 단점을 들춰서 흉보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남들의 뒷담화에 동조하지 말고 듣기만 하자구요.
가족의 결점이 눈에 보일 때 즉시 관심을 나에게 돌려 보는 것입니다.
내 단점에 비하면 저 정도는 티끌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면 불쾌한 언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의 결함은 불우한 환경으로부터 악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을 잘 받고 안정적으로 산 사람들은 대개 점잖고 상식적이고 예의바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좀 넓히고 생각해 보면 결함이 많이 보이는 사람은 그만큼 나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처와 나빠진 성품들은 자꾸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감싸줘야지 그 티를 자꾸 지적하면 점점 자기방어로 몸을 도사리게 됩니다.
우리 중 상처받지 않고 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의 두드러지는 약점도 생각해 보면 다 그런 상처와 환경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러니 서로가 잘못을 덮어주고 좋은 말로 위로하는 게 단점을 더 잘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대로 한 주간 잘 지켜볼 때 마음의 창고에 선한 것이 쌓이고 점점 훈훈하고 좋은 말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다 평안하고 우리 믿음은 반석 위에 더 복되게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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