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RhOyk0RLKA&feature=youtu.be
2020년1월19일 설교영상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동안 많은 기적과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치유는 어떻게 보면 그 중에 가장 황당한 사건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사람으로 꽉 차 예수님께 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지붕을 뜯어내 병든 친구를 달아 내렸다고 하잖아요?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지지만 한편 그래도 되나 싶죠.
지금도 중풍병은 치료하기가 어려운 병입니다.
작년에 이안순권사님 사돈어른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한 쪽 마비가 왔는데 온갖 치료를 병행하지만 아직 일어나 앉지도 못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주말만 되면 엄마를 집에서 쉬게 한다고 매주말마다 재활병원에서 사돈어른을 모셔온다고 합니다.
사시는 곳이 빌라3층인데 그 가파른 계단을 아들이, 사위가 번갈아 가며 업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합니다.
아무리 자식들이라 해도 회복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옛날 아무 치료약도 없이 꼼짝 못하고 침상에 누워 여생을 보내야 하는 중풍병자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죠.
이들의 믿음이 오늘 어떤 결과를 가져오셨는지를 다 읽으셨습니다.
오늘 이들이 믿었던 예수님을 똑같이 믿고 우리도 믿음의 좋은 결과를 얻으며 살아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는 언제나 갈등 구도가 나타났습니다.
지난 주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예수님은 동네사람들의 격렬한 반대로 낭떠러지에 밀려 떨어질 위기를 당하셨죠.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과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가져다 줄 바로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단지 요셉의 아들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예수님께 화가 나서 절벽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던 것이죠.
우리는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아주 무섭습니다.
사회적으로 불이익은 물론이거니와 테러도 서슴치 않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사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죠.
오늘은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런 갈등을 일으킵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다시 어느 갈릴리 마을의 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수상히 여겨 조사 나온 유대교 지도층들이 거기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하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종말에 도래할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습니다.
당연히 위대한 정치적 인물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강성한 나라로 세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온 인류가 혜택을 얻을 영원한 하나님나라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죠.
예수님이 그것을 고쳐주시는 데 많은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뭐가 어려워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선망하기에 예수님의 복음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서 잘되는 복을 우선적으로 주셨다면 지금도 교회에 사람들이 차고 넘쳐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반대로 주시죠.
예수님이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 좋아했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하다는 걸 그냥 삶의 궁핍으로 알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뭔가 달랐고 치유의 기적도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물밀 듯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2. 그런 가운데서 오늘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중풍병자와 친구들도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꼼짝 못하는 병자를 침상 채 메고 먼 길을 왔다면 대단한 우정이죠.
동물의 세계에서도 병든 개체는 무리에서 소외되고 만만하게 다른 동물의 먹잇감이 됩니다.
병든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래 병석에 있다 보면 간병하는 사람들도 구박을 합니다.
병들어도 인격은 똑같은 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니 속으로 얼마나 상처와 절망이 쌓이겠습니까?병자를 간병하는 보호자들도 어떤 의미에선 비슷합니다.
병원에 있어보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건 둘 중 하나가 됩니다.
환자냐 환자 보호자냐.
세상적인 관심 밖의 인물이 되는 것이죠.
환자가 약자 취급을 당하듯 환자 보호자도 그렇습니다.
오랜 병상 생활에 바짝 마른 친구를 데리고 군중이 밀집한 곳에 오는 친구들은 어땠을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중풍병 친구에 쏠리고, 말도 안되는 병을 고쳐보겠다고 환자를 병상 채 들고 와 민폐를 끼치는 자기들에게 향할 것 아니겠어요?그러니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으로 꽉 찬 현장을 보고 할만큼 했다 위안하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려는 일엔 항상 막아서는 게 있습니다.
무언가 수상한 것이 수시로 방해를 하죠.
건강문제, 직장형편, 믿음에 대한 낙담, 게으름, 시험 들게 하는 사람.
이게 믿음의 길을 방해하는 악한 인격체가 개입해 있다는 걸 간파해야만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굉장히 지혜로워야 합니다.
돌파해야 할 것에 등을 보이면 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기 위해 그 집 천장을 뚫은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는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집주인은 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상식 밖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이것이 바로 믿음을 증명하는 행동이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부끄럽게 감춰 놓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폭발적인 생명력은 불가능에 도전하고 주변에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만일 혹쉬, 예수님이 이 병을 고칠 수 있겠나 생각했다면 이런 몰상식한 일은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난리법석을 일으킨 자신들이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치지 못하는 예수님이나 아주 난처하게 되는 것이죠.
가기만 하면 나을 것을 확신했기에 그런 무리수를 두면서 예수님 앞에 간 것입니다.
우리는 힘든 문제, 근심거리가 생길 때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바로 응답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힘으로 어떻게 해결해 버리는 게 속편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가르쳐 주시길 분명히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직장생활과 일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매일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가 용서 못한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죠.
또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길 기도하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길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문제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즉시 응답이 되던 안되던 우리는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맡겨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이 문제의 책임은 예수님께 돌아갔잖아요?
고치실지 못 고치실지 이젠 예수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지 않고 즉석에서 해치운 문제가 내일 말썽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무사히, 또 원만하게 해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게 그렇게 힘들다는 게 참 이상하죠.
그렇게 생각하면 기도가 참 쉽고 분명한데 왜 그렇게 어려울까요?
그게 바로 방해하는 자, 마귀가 우리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주님이 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매일 나의 삶을 들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3. 이런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지붕이 요란하게 뜯겨져 나가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웅성대고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추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상식적이지만 용기 있고 확신에 찬 이 행동을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탐색하고 간만 보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시원한 믿음입니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너희들,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게 느껴지십니까?예수님은 어떤 문제든 믿고 나오는 성도들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못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말씀을 주셨잖아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까?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믿음으로 나온 우리 모두를 축복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다른 치유자들에게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중풍병자가 병만 낫길 바라고 왔다면 당연히 예수님은 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해 주셔야 맞습니다.
고쳐달란 병은 안 고쳐주고 뜬금없이 네 죄를 사했노라고 하신다면 실망스러운 것이죠.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더 간절히 갈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셨고 먼저 거기에 대한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놀랍게도 죄사함을 더 원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짜 중요한 것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같은 기사를 기록한 마태복음에 보면 이 말씀이 덧붙여 있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병석이나 환란 중에 자기 삶을 돌이켜 보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시련의 값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시편 119장67절에서 믿음의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베드로전서4장1절에서도 말씀하죠.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큰 위기와 어려움 앞에서 성도들은 없는 줄 알았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약점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되죠.
중풍병자에겐 과거에 대한 회오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가족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입에 밥 한술도 넣지 못했을텐데요.
지난 주 뇌졸중에 걸린 딸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14년을 수발들었던 어머니가 딸을 목졸라 죽인 사건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자기가 먼저 죽으면 딸의 앞날이 막막했기에 같이 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했겠습니까?
딸 간병에 우울증까지 앓고 있던 이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는 댓글은 없더군요.
이 어머니의 고통의 14년을 공감한다는 것이죠.
뼈아픈 배신을 당해보고, 중병에 걸리고, 사람들이 나를 찌르고, 자존심 상하며 살게 될 때 세상에 대한 장밋빛 선망을 버리게 됩니다.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잖아요?
돈이 있고, 건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행복하면 왜 주님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는지 잘 모릅니다.
지금처럼도 잘 살 수 있고 큰 죄를 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그게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맘대로 쓰다 거지가 돼서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사는 삶은 모아지는 삶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입니다.
매일 믿음으로 주님께 붙어있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영적인 궁핍에삶은 실타래처럼 뒤엉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낭패를 당한 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죠.
그렇기에 곤란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중풍병자가 그랬던 것이죠.
그런데 죄가 문제잖아요?
구약성경은 메시야의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주고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 13장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중풍병자에게 제일 절박한 것은 당장 병을 고치는 것보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죄사함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과거 전도사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씀하더군요.
당시 교회에 새로 등록하신 한 어르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육개월 정도 교회를 나오시니 이제 학습을 받게 하려는데 담임목사님이 문답을 좀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어르신에게 ‘어르신 예수님이 누구시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르신이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씀하더라고 합니다.
‘예수고 뭐고 내 병이나 고쳐주소’
그 어르신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노년에 얻은 병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전도한 사람이 교회가면 병이 다 낫는다고 했겠죠.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때 내 죄가 사해졌냐 아니냐입니다.
병이야 고쳐도 또 다른 병이 찾아 올 텐데요.
결국 누구나 병들어 죽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나왔다면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그 다음 믿음이 생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질병이든, 미래의 평안이든, 자녀문제든, 물질의 문제든 예수님의 죄사함을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잖아요?이들은 예수님을 탐색하러 왔지 믿으러 온 게 아닙니다.
오늘 결과적으로 눈앞에서 옴짝도 못하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자기 누웠던 침상을 짊어지고 나갔지만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죄를 사하신다는 말을 꼬투리 잡아 신성모독이라는 오명을 덧씌우죠.
처음에 교회에 올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고 탐색하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마음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인자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느니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늘에서 사해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똑바로 알고 믿은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와 친구들 밖에 없습니다.
26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걸 보고 모든 사람이 놀라 두려움에 가득 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중풍병자는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중풍병자는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죄로 인해 인간에게 발생한 모든 고통과 질병을 고쳐주실 분이심을 처음부터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중풍병자의 병상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께 가져나오면 이젠 주님의 문제가 되고 주님은 반드시 해법을 갖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병자와 친구들처럼 끈질기게 돌파하는 믿음을 갖고 낙담하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함께 예수님 앞에 나가 서로의 문제를 기도하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 은혜자매의 병상에 그렇게 다 함께 하셨잖아요?
저는 4인1조가 돼서 한 친구를 살리려는 이 광경을 예수님이 참 흐뭇하게 여기셨을 것 같습니다.
그게 교회 모습이잖아요?
또 우리 가족과 이웃들 중엔 침상채로 데려오기 전엔 불신앙의 자리와 고통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사명이 뭐 거창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탐색하고 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주님을 믿으시길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시는 은혜로 또한 우리도 기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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