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Kdc8rcHdpjM
<2020년4월12일 설교영상>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영광스러운 결말을 보여주는 가장 기쁜 날이 부활절입니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모여서 함께 이 기쁨을 나누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각처에서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코로나로 인해 피로감이 쌓이고 특히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계시는 성도님들께 오늘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알 때 우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곧 우리 자신의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에서 승리를 줄 뿐 아니라 죽음 같은 현실에서도 승리를 줍니다.
오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코로나 사태도 이기고 이로 인한 심리적, 물질적 두려움도 넉넉히 이기게 되리라 믿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판결 받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망하십니다.
주님의 시신은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죠.
그리고 주님은 제 삼일에 다시 부활하십니다.
사복음서는 제자들의 목격담을 통해 부활하신 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제일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이 누구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시작으로 해서 베드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서가 전해주는 그 날의 모습은 혼란, 당혹, 의심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직접 예수님을 보고도 못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주님의 부활 기사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제자들의 의심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라는 역설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객관적 판단으로도 진실임이 확실합니다.
조금만 따져보면, 부활을 믿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부활을 안 믿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미 부활절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게 옳다는 증거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다른 많은 증거들을 모른다 해도 제자들이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한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 않습니다.
작년 독일의 슈피켈지가 부활절을 기해 기독교신자들의 부활신앙에 대해 특집기사를 냈습니다.
기사를 보면 교인의 55%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답한 절반의 교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일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그 절반의 신자들 중에서 또 절반만 부활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들 네 명중 한명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죠.
한국교회를 조사해 보면 어떨까요?
이성적으로 따지는 서구 기독교에 비해, 종교성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한국 기독교는 더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의 부활에 대해 잘 알고 검토하고 믿는 것일까요?
검토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이성과 지각을 가진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부활하셨을 거라는 맹목적인 부활신앙은 성경의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생애를 바쳤고 목숨도 바쳤기 때문입니다.
증인과 순교자는 어원이 같습니다.
피상적이고 종교적인 부활신앙으로는 그럴 수가 없죠.
우리가 이생의 삶을 다 마치고 죽음 앞에서 그 육중한 커튼을 열려고 할 때 두려움 없이 영화로운 부활을 맞이하려면 주님의 십자가만큼 부활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부활하셨을까요?
도대체 부활이 뭐냐는 거예요.
저는 믿기 전에 신자들이 부활 얘기하는 게 제일 이상했습니다.
십자가를 감정만으로 대하는 게 최선이 아니듯이 부활도 축제같이 들뜬 기분을 앞세우는 게 최선이 아닙니다.
이런 구원의 큰 사건들은 먼저 의미를 알고 지식으로 잘 짜여져야 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언어화 되지 않은 마음은 병이 된다고 하죠.
구원의 전 과정이 조직화되지 않은 믿음도 병약한 믿음입니다.
우리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과 같은 굵직한 교리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발전해 가야 담대 무쌍하고 기개 있는 신앙이 됩니다.
1) 오늘 부활을 잘 이해하려면 그 이전까지 구원을 위한 일련의 사건들을 잘 알아야 연결이 되겠죠.
그래야 구원의 전체 그림이 완성됩니다.
그 그림은 첫 번째 인간인 선조 아담에게서 시작됩니다.
우리 선조 아담은 하나님과 거룩하게 교통하는 살아있는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고자,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파기했을 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육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잖아요?
그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말합니다.
먹는 즉시 영이 죽고 육의 사람이 된 것이죠.
육체의 사망은 범죄 한 뒤에 육체에 부여 된 벌로서 노동, 출산의 고통과 함께 내려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육의 사람인 아담에게서 육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모든 피조물은 절대적으로 창조의 섭리를 따릅니다.
모든 자연만물이 그렇죠.
태양계의 어느 한 별도 자기 궤도를 이탈하거나 좀 더 빨리 돌거나 늦게 돌지 않습니다.
소는 풀을 먹지 스스로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바다는 하나님이 그어 놓은 해안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의 사람만이 거침없이 창조섭리를 파괴하며 죄를 지으며 삽니다.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하고 평생 지은 나쁜 죄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철저히 심판을 받습니다.
죄인이 악화일로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가장 훌륭한 피조물을 만드시려고 가장 골치 아픈 결과를 만나게 된 것이죠.
이 최악의 상황에 놓인 골칫거리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본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의 풍성하고 영화로운 기업을 받아 누리게 될 복된 존재로 구원해 내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설계도가 성경입니다.
그 핵심은 스스로는 돌이키지 못하고 계속 죄와 진노를 쌓는 인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용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대치됩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죄값을 대신 갚게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단, 사람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부모가 자식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도 자기 죄값을 치러야 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죄 없는 동물의 죽음으로 사람의 죄 값을 대신 하는 구약의 제사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동물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죠.
얼마나 많은 동물이 죽어야 인간의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하나님도 그 피의 제사를 받으시는데 지치셨다고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벽한 대속제물의 비밀이 구약성경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냅니다.
동물제사로 시작한 대속의 모티브는 가장 완벽한 한 제물, 단 한번의 제사로 점점 초점이 모아져 갑니다.
율법서에서, 시편에서, 예언서에서 그 대속을 성취 할 한 사람의 종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히브리서10장에서 이렇게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사야서에서 예언하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완전한 제물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본래 사람을 심판하실 주권자이지만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성금요일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깊고 풍성하지만 몇가지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a) 인간으로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부활시키신 것은 먼저 사람은 누구나 다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멸절되어 사라지는 영혼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나간 영혼들이 세상에 다시 오지 못할 뿐이지 사라져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다만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예수님께서만 부활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기에 성부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의 권능으로 스스로 부활하신 게 아닙니다.
b) 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놀라운 영적인 반전이 일어났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같이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영화롭게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똑같이 영화로운 부활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열매라고 하죠.
너무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육체는 완전한 속죄로 드려졌고 다시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신비로운 몸이 되셨잖아요?
닫혀 있는 문을 통과해 들어오셨고, 또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우리 모두도 주님처럼 영화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c) 예수님의 부활의 중요성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죄의 결과로 내린 육체의 사망에서 묶여 있을 수 없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아무 죄가 없으시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기에 또한 우리의 속죄가 완전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죠.
d)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미 선고받은 영적 사망, 즉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게 되어있는 강력한 사망까지 깨뜨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선고받고 태어났던 영원한 심판의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선 제한 된 몸을 지녔기에 사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만 그 뒤엔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의 몸을 다시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이 잘 이해되셨습니까?
이 사실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우리는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저처럼 이렇게 성경공부를 가르치시는 게 44절 부터의 내용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가르치시니라)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예수님을 가르치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이같은 성경을 깨닫게 하시면 믿어지는 것이죠.
믿어지면 옛날과 똑같이 살아지지 않습니다.
3.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47절,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이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한 사람은 이미 증인인 것입니다.
다 봤잖아요?
본 사람은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단 증언을 위해서는 횡설수설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정리해 드린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그림을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점점 깨닫고 견고한 믿음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분명한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고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걸 보여주시면 그만이지 뭐하러 또 성경을 펼쳐 이걸 가르치시겠습니까?
주님께 배운 대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과연 구약성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기가 막히게 골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아는 것만큼 믿을 수 있고 아는 것만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목격했다고 다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재판에서 수많은 목격자들이 부담과 두려움 때문에 증언을 거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몬 유대인 권력자들을 상대로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바로 이 일을 행하실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하나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파격적인 제자들의 변화와 담대한 복음전파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셔서 가능하게 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성령과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하늘로승천하십니다.
50절에 보면 감람산 베다니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그 상태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승천하시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하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승천하신 주님께 경배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52절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단어는 큰 기쁨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들의 권력이 무서워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요?
두렵고, 회피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증인의 사명을 받고 큰 기쁨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기쁨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의 샘이 터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좇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재벌가의 많은 사람들, 인기를 누리던 유명인들, 두뇌로 승부하는 지식인들 다 기쁨으로 살고 있던가요?
세상의 기쁨들은 아주 작은 문제에도 압도당해 맥없이 꼬리를 내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로 얻은 영생과 부활을 믿는 한 이 기쁨은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잊어서 그렇지 우리의 부활을 떠올리는 한 기쁨은 마르지 않습니다.
삶이 우리를 궁지로 몰고 간다 해도 예수님 안에서 얻은 이 영원한 부활을 떠올린다면 어느새 이 기쁨은 곧 죽음 같은 현실에서 우리를 끌어 올려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말할 수 없는 평안과 안정감을 주십니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설령 많은 것을 잃는다 해도 부활의 소망은 우리를 이렇게 위로합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누릴 하나님과 나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것들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복되고 영화롭도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잘 이해가 되고 믿어진다면 우리는 증인입니다.
본 이상 증인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제자들처럼 거리에서 외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까요?
우리 삶이 부활과 영생에 맞춰져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과 확신으로 사는지 보면 압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아까워하는 물질과 시간과 노력과 미래를 적잖이 주님께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십자가와 구원을 알리기 위해 우리 곁의 사람들을 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어느새 섬기고 있는 것이죠.
부활하지 않을 거면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성도들을 볼 때 신앙에 비밀이 있음을 느끼고 교회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또 이 부활신앙을 갖고 믿음으로 바르게 서있기만 해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마귀의 진은 서서히 무너집니다.
마귀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온갖 환경으로 죽일 듯이 협박하지만 부활신앙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주시고 매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삶과 죽음을 다 이기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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