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도 세상 속에서 성도의 이름으로 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 같아요.
믿음이 만족스럽다 싶게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내 원하는 대로 실컷 하지도 못하고.
옆으로 한 발만 뻗으면 세상이란 광활하고 넓은 길이 우리에게 편안하다, 즐겁다, 함께 가자 유혹하잖아요?
주님을 따르는 길은 그 가운데 난 참 좁은 길이 맞는 것이죠.
오늘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일에 믿음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만큼 내 약함을 알고 이해하시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말씀만큼은 언제나 타협이 없이 단호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교훈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의 삶이 엄중한 영적 전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와 죄는 결코 나와의 한평생 싸움을 쉬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이 꾸준히 기도하고 있는 성도님들에게는 더욱 기도할 수 있는 용기와 격려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한 성도들에겐 결심과 행동의 원동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을 보통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먼저 이 비유 속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한 도시에 과부 여인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원통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오늘 말씀은 독립된 설교가 아닙니다.
원문상으로 보면 ‘그리고’라는 단어가 있어서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세상의 종말에 대해, 즉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란 것을 알 수 있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모든 사람들이 점점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마태복음 종말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재지변이 많고 불법이 성해지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져 세상 전체가 말세지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 성도들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마저 당한다고 하셨죠.
우리는 어둠 속에 밝혀 놓으신 빛이기에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잘못도 만 천하에 공개되고 한 사람의 잘못으로 온 교회가 억울하게 지탄을 받게 되잖아요?
이번에 아프리카에서 오미크론변이에 감염 된 목사 부부로 인해 모든 교회가 다시 또 죄인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출장 갔다가 감염되었다면 그 회사 전체를 욕하겠습니까?
의사가 놀러갔다가 감염되어 환자들을 다 감염시켰다고 의사 전체가 욕먹지 않잖아요?
성도 한 사람이 잘못하면 교회 전체가 비난받는 것을 보면 한 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우리나 힘든 마지막 때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성도들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 또한 감수해야 하는 것이죠.
결국은 그게 우리가 얻을 칭찬의 면류관이지만요.
여인도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로마통치 당시에도 변호사 제도가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겐 변호사를 선임한 정식 재판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집무실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재판장을 보면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수밖엔 없었겠죠.
그런데 하필 이 도시의 재판장이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잠언17장5절에서 이미 이런 사람을 이렇게 간파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가난한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재판장이 하필 이런 사람이니 과부의 불행이 설상가상입니다.게다가 4절에 보면 재판장은 자기 입으로도 자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정도면 양심의 가책도 없을 만큼 뻔뻔한 인간인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재판장을 매일 찾아가는 여인을 보고 속으로 참 안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리 찾아다닌다고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아닌데, 시간만 버리고 힘만 빼는구나.
이 사건은 보나마나 여인이 지쳐 떨어지고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에 예수님께서 급반전을 두십니다.
4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5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시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결말에 의아했을 것입니다.
이 뻔뻔하고 불의한 재판장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요.
이 안하무인의 재판장이 매일 찾아와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졸라대는 이 여인에게 두 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에서 ‘괴롭히다’는 것은 눈 밑을 멍들게 하다는 뜻입니다.
여인이 매일 찾아와 애원하는 게 성가시다 못해 매일 주먹으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는 것이죠.
결국 안 들어주는 것보다 들어주는 게 더 낫겠다 생각하고 이 여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배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겠죠.
1) 그 해답은 1절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 아주 많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고,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중언부언하지 말고, 등등 많죠.
오늘 강조하시는 것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이미 몇 가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을 등장시키신 것은 우리의 인생 또한 내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난관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죠.
그러니 항상 기도하라시는 것인데 이어지는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걸리죠.
기도와 낙심이 함께 있을 수 있나요?
항상 기도하고 응답 받는 데 무슨 낙심할 일이 있겠어요?이 말씀은 기도의 장애물이 있음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저절로 되지 않는데다 기도를 한다 해도 즉시 응답이 되지 않아 낙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도하기가 힘들어서 안 하잖아요?
또 기도가 정말 효력이 있던가요?
만일 기도를 조금만 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면 누가 기도를 안 하겠어요, 왠만하면 다 기도하죠.
아니, 좀 많이 해도, 백번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정하셨다면 그 정도는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를 해도 이게 응답이 되고 있는지 감감소식이고 그러다 기도가 흐지부지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불의한 재판장에게도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라고 설정을 하시잖아요?
이미 기도응답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8절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속히’라는 말에는 ‘당장’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아무 소식이 없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란 뜻으로도 쓰입니다.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다가 가벼운 눈송이 하나가 살짝 얹혀지는 순간 가지가 툭 부러지는 것 같은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어느 시점까지는 마치 아무도 안 듣는 것처럼, 아무 효력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 편에서 응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기도에 마음이 움직이고 손이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믿고 우리는 답답해도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오늘 같이 큰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언제나 하나님과의 소통의 창구가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어떤 문제든 하나님과 상의할 만큼 잘 훈련되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고 사람에게서 뭐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훈련되면 나 자신이 그렇게 세상에 대해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삶에 자신감이 떨어지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최근 범죄현장에서 경찰의 대응능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자주 나오죠.
테이저건을 갖고 있지만 일 년에 한번 시연을 해 본다고 하니 위기 때 정확한 조준사격이 되겠습니까?
기도는 강력한 무기지만 매일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어서 필요한 때 효력 있는 기도를 하기 어렵습니다.
급박한 일을 만나면 매일 기도하던 사람들도 당황해서 기도가 허둥지둥대는데요.
기도 안 하던 사람들도 다급하면 하나님을 찾지만 그런 기도로 사태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어렵죠.
이렇게 항상 하는 기도는 앞으로 원수 같이 진행 될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상황들을 미리 막아줍니다.
오늘 말씀대로 다급할 때뿐만이 아니라 ‘항상’ 기도한다면 과부 여인 같은 원통하고 절박한 일들을 어느 정도는 분명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죽게 된 운명도 되돌린 히스기야와 같은 기도도 있잖아요?
매일의 꾸준한 기도는 매일의 걸음을 안전하게 이끌어 줍니다.
기도하고 맞이하는 일터와 그렇지 않은 일터는 다릅니다.
대개 큰 문제가 처음부터 위협적이지는 않습니다.
비유 속의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강도를 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투자든, 위탁이든, 동업이든, 무언가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고 한동안 함께 했을 것입니다.
환경의 덫에 빠질 때는 대개 일이나 사람이나 뭔가 선택이 잘못되며 시작되죠.
그리고 문제는 점진적으로 악화됩니다.
일이 터지면 과부 여인이 스스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듯이 맹렬해지죠.
그래서 매일의 소소한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어떤 분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남편이 아직 50대인데, 뇌경색이 와서 일을 그만두고 한 삼년 간 치료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는데도 여전히 책만 읽고 건강관리만 한다는 거예요.
처음엔 좀 쉬다가 다시 일을 하겠지 했는데, 일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먹을 때건, 가만히 있을 때건 하나 같이 눈에 거슬린다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 놓더군요.
지난 주 올림픽 공원에 같이 운동을 나갔는데 싸웠다는 거예요.
남편이 원래 걸을 때 발을 좀 끄는 습관이 있어서 밑창이 금방 닳는 데, 그날따라 그 끄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신발을 그렇게 끌면서 걷냐고 잔소리를 했다가 결국 나이가 들면 왜 졸혼을 하는지 알겠다는 둥 험악한 말까지 오갔다고 합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더군요.
가족 간에도 이 작은 틈이 생길 때 얼른 메꿔야지 계속 틈을 헤집고 넓히면 어느 순간 무너집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 함께 사는 가족에게 범죄 피해를 당한 사람이 4만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살인 같은 강력범죄 피해자만도 칠백명이 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얼굴을 자주 맞대는 가족일수록 갈등이 누적되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지기 쉽다고 합니다.
사람관계는 작은 틈이 벌어질 때 메워야 하는 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갈라질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 부분이기에 기도의 힘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일도 건강도 사람관계처럼 작은 틈에서부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항상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해도 기도로 모든 것이 방비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문제는 아무리 기도해도 최악의 상황까지 가기도 합니다.
3)그러나 끈질긴 기도는 그런 상황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처럼 생사가 걸린 문제라 해도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상황들이라도 들으시는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단 상황이 정리되고 해결되는 데 긴 시간이 걸릴 뿐이니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면 됩니다.
6절,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장이 뭐라고 말했길래요?5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불의한 재판장도 끈질긴 요구에 결국 반응을 하잖아요?
재판장은 그날도 어김없이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다 자기를 붙잡는 여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낫지 진짜 성가셔서 못 살겠구만. 이 일 해결해 주기 전에는 물러나질 않겠으니 원’
만일 이 말을 과부가 들었다면 어땠겠습니까?
‘이제, 다 되었구나. 내일 다시한번 찾아오자’
그랬을 것이잖아요?
너희가 바로 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우리가 기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얘가 이렇게 기도하니 성가셔서 살 수가 없구나, 얼른 문제를 해결해 줘야지’
과부의 간청이 불의한 재판장을 괴롭힌 것처럼 우리가 징징대며 울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게 하나님께도 괴로우십니다.
자식이 힘들고 괴롭다고 눈물 바람 할 때, 부모에겐 세상에 그 이상의 괴로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일어설 때 이 소리를 들으라시는 거예요.
‘저 녀석이 저렇게 애타게 기도하니 너무 마음이 괴롭고 아프구나. 한시라도 빨리 들어 줘야겠구나’
지난 주 어떤 힘든 문제들이 있으셨습니까?
기도하셨습니까?
자녀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식 키워봐서 알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신경 쓰실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실이 무엇입니까?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 보면 ‘택하신 자들’이라고 하시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녀들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지나가는 말로 뭐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부모들은 절대 그거 가볍게 지나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모들은 내 능력 안에서는 자식이 뭐 해달라는 말이 더 기쁩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목숨과 바꾸고 얻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하나님이 끊임없이 주목하시고 응답하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히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해되면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의논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큰 기도도 작은 기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도가 힘들고 훈련되지 않은 성도님들은 정말 권하는데, 매일 일정한 장소를 정해서 단 십분이라도 꾸준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3.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이렇게 낮게 탄식하십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불의한 재판장도 성가셔서라도 도움을 구하는 간청에 응답해 주지 않니?
불의한 재판장은 사람을 무시하지만 나는 너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냐?
그런 내가 왜 기도응답을 안 해준다고 생각하니?
불의한 재판장같이 매몰차고 무시하는 이 세상에 대고는 그렇게 간절히 얻으려 달라붙어 포기하지 않으면서 왜 내게는 와서 구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니?이런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가까울수록 하나님께 그런 믿음을 갖고 끈질기게 인내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결국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교회 안에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앞 장의 종말에 대한 말씀과 이어진다고 했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지구역사의 종말이 반드시 지구상의 어느날 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을 구하고 부르짖는 기도의 뜨거운 열기가 있을 때 그 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도 식어지고, 기도소리도 사라지고, 점점 그런 가운데서 마지막 날이 온다는 것이죠.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끼리도 편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는 그 때 주님의 날이 임하십니다.
오늘 내게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이 식어지고 기도가 식어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다 믿음의 종말을 맞는 사람들, 많이 보셨잖아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이런 믿음이 없는 것이 곧 신자들의 종말인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다면 내게서 하나님은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기도를 통해 매일 보여지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고통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복된 길로 나아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간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중 단 몇 십 분의 시간도 아버지께 나가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를 보면 비신자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 1위는 건강, 2위는 가정, 3위는 경제문제였습니다.
반면 신자들은 1위가 신앙생활, 2위가 가정생활, 3위가 건강이었습니다.
저는 그 그래프가 이렇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두 비교가 단순히 우선순위의 비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1순위로 놓고 항상 기도하기에 가정생활과 건강, 경제문제가 삶에서 점점 그 비중이 작아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 다시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나가 끈질기게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룻기에서 나오미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기도하면, 내 힘으로 최선을 다해 하는 일의 백배 이상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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