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23장26절-31절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구레네 시몬, 고난주간

남수연 2024. 3. 25. 22:35

https://www.youtube.com/watch?v=8DiEnn8eBBc

 

이번 주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를 묵상하며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옛날엔 고난주간에 금식하지 않으면 좀 부끄러웠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작게라도 참여하고 싶은 그런 순수한 마음들이 있었죠.

우리가 이번 주는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삼 년 남짓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내세와 천국이 어떨지는 예수님에게서만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궁금하면 성경을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은 천국으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죽음의 행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생로병사는 사람들의 숙명이기에 누가 어떻게 죽었다 해도 특별히 이해가 안되는 죽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만이 인간 역사의 모든 죽음과 근본이 다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오늘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간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셨습니다.

그곳을 잘 알던 가룟유다가 주님을 잡아 갈 사람들을 몰고 온 것이죠.

밤사이에 먼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십니다.

새벽녘에 긴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에서 다시 취조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습니다.

사실 영리한 빌라도는 당시 유대인 사회를 들끓게 하던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뒷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도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죠.

예수님이 무해하다고 판단했기에 민란이 일어나기 다반사인 유월절 명절에도 예수님을 감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층이 잡아서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직접 주님을 심문해 보고도 역시 주님은 죄가 없으시단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풀어 주면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하는 유대인들에 굴복해 결국 사형언도를 내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판결 받고 형장으로 가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을 끌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와 십자가가 세워질 갈보리 언덕으로 향합니다.

예루살렘 성문에서 갈보리 언덕까지는 약 8백미터 정도의 오르막길입니다.

저도 이 길을 걸어서 가 보았습니다.

길 안내판에는 비아 돌로로사라고 써 있습니다.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좌우에 상점들이 빼곡이 늘어선 좁다란 길엔 성지순례객들이 너무 많아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천년 전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었던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던 길에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특별한 두 가지 사건을 전해 줍니다.

 

2. 첫 번째 동행자는 구레네 시몬입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문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니라

밤새 여러 장소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다닌 예수님은 이미 악명 높은 로마의 채찍질형을 당하고 걷기도 힘든 상태이셨습니다.

주님이 자꾸 넘어지시고 걸음이 늦어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형 집행이 늦지 않도록 로마군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메고 갈 사람을 물색합니다.

마침 한 건장한 남자가 눈에 띕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예루살렘성으로 막 들어가려던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시몬이 마침그 앞을 지났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에서 마침이라는 단어는 우연을 강조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시몬이 단 몇 분만 늦었거나 빨랐어도 그날 주님의 십자가 행렬과 마주치진 않았을 것입니다.

시몬이 이 날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와 모든 가족들의 인생이 백팔십도 바뀌게 된 운명적인 사건입니다.

1) 시몬은 구레네에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예배를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중이었습니다.

구레네는 현재 이집트와 붙어 있는 나라 리비아입니다.

거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왔다면 1400킬로의 먼 순례길을 찾아온 것이죠.

2)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군인들이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웠다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다 해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든 주님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26절에 시몬이 굳이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죠.

그랬던 시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시몬에게 있었을 법한, 타당한 상상을 하며 그 뒤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3) 시몬은 로마군인들에게 찍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로마군인에게 붙잡혔을 때 시몬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하필 죄수의 피가 묻은 십자가를 지고 그 행렬에 끼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자기도 범죄에 관련된 사람처럼 보일 게 틀림없잖아요?

시몬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만난 것이죠.

4)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시간은 한 두 시간 정도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간신히 걸음을 떼시며 앞장서서 힘겹게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시몬의 마음에 점점 궁금증이 들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필 이 명절날 사형을 당할까?’

한 죄수가 형장으로 가는데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왜 구경을 나온 것일까?’

저 많은 여인들은 왜 울면서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시몬은 점점 기이한 분위기에 압도 돼 주님을 살펴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혹시 죄가 없는 사람, 죄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 본 적 있으신가요?

사람은 멀리서는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사귀다 보면 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되죠.

내가 죄인인 걸 잘 모르겠으면 다른 사람을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셨지만 유일하게 죄가 없는 분입니다.

세상엔 아우라가 있는 사람도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도 있죠.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보지 못한 어떤 거룩한 신비와 경이로움이 느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안드레가 예수님과 단 한나절을 지내보고 나서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예수님은 동네 목수 청년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고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만한 권력과 경험과 그만한 신앙과 재력을 다 가진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선지자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주님의 인격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없는 천국을 있는 것처럼 말하실 분이 아닙니다.

아니면서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시몬은 비틀거리며 결연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무언가를 느낀 것이죠.

사람이 좀 참을성이 있고, 인자해 보여도 불편하면 여지없이 죄의 본성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작은 일에도 속에서 얼마나 자주 발끈합니까?

로마의 채찍형을 받고 터지고 찢긴 피부에서 파고드는 고통이 얼마 정도일까요?

살인적인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 몸으로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고통으로 괴로워는 하셨지만, 우리 인간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원망, 푸념, 절망, 미움에서 나오는 욕 한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지로 참으신 게 아니라 그런 죄의 본성이 주님은 아예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이 끊어지기 까지 주님의 품격이 한번도 달라지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곁에서 시몬이 알게 된 것이죠.

이분은 의인이시구나, 길가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맞구나

형집행을 했던 백부장도 주님이 운명하실 때 역시 그 말을 했잖아요?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제 시몬은 주님이 넘어지실 때마다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걸친 채 주님을 일으켜 세웠을 것입니다.

주님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정없이 로마 군인의 채찍이 떨어졌을테니까요.

한쪽 어깨엔 십가가를 걸치고 한 쪽 팔로는 예수님을 부축하며 골고다 언덕을 같이 올라갔을 것입니다.

시몬의 눈에서 눈물이 났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현장에서 시몬은 십자가 짐을 벗고 툴툴 털며 돌아갔을까요?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서 형이 집행되는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몸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주님의 모습, 주님의 기도, 온 도시를 덮친 흑암, 이 모든 것을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수소문해 찾아갔겠죠.

그렇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시몬의 경우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데, 믿는다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신뢰하게 될 때 주님이 말씀하고 행하신 모든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처럼 실제로 주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 주님에 대한 증언을 통해 성령께서 그 주님을 우리도 경험되고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인격과 매일 마주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시몬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남자가 구레네 시몬이라고 밝히죠.

그냥 십자가만 나르고 황급히 사라졌다면 누가 그 이름을 알고 기록을 남겼겠습니까?

마가복음에서는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까지 밝힙니다.

복음서를 읽을 성도들이라면 그 이름을 알만한 교회 일군이었다는 것이죠.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편지에 당부합니다.

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사도가 편지를 쓰던 당시는 십자가를 지시고 30여 년 뒤입니다.

시몬의 아내까지도 바울사도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성경에 모두 기록되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그날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습니다.

우리도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억지로 나왔을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은 환경이 나를 주님의 십자가쪽으로 억지로 밀었을지 모릅니다.

부모나 배우자나 친구가 억지로 끌고 왔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섬긴다면 반드시 시몬과 같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3.구레네 시몬 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시몬이 억지로 예수님을 따랐다면, 이 유대인 무리는 스스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바로 며칠 전에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주님을 환영했던 그 사람들입니다.

왕이 될 메시야가 예수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단 하루 만에 뒤집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수가 되어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형장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실감과 충격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 주변에서 괜찮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다 해도 그 충격이 상당하죠.

아마도 얼마전 러시아 감옥에서 의문사한 야당지도자 나발니를 생각하는 그 나라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저는 나발니에 대해 뉴스에 나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2020년 법정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는 뉴스에 나올 때마다 관심을 갖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의문의 사망 소식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유명인들 중에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경우가 많죠.

예수님이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기대감을 주셨습니까?

주님이 베푼 기적, 지혜의 말씀, 자비,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라를 다스려 주길 대중이 열망했습니다.

미국도 우리나라도 선거로 뜨거운데, 사람들도 다 바라는 지도자가 있잖아요?

지난 주 고척돔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월드투어 개막전에서 박정현가수가 우리나라와 미국 국가를 불렀죠.

애국가 듣다 눈물날 뻔 했다는 댓글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잘 되길 다들 바라는 마음인 것이죠.

그런 기대감이 무너지고 비참하게 매맞은 주님을 볼 때 애통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지도자의 장례 행렬에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이 애통하며 따르는 모습을 뉴스에서 가끔 볼 수 있죠.

사람이라면 그래도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구나, 내 죽음이 헛되지만은 않구나,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겹게 가시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울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숨을 몰아 쉬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울고 있는 예루살렘이 딸들을 사랑하셨다는 게 느껴지죠.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까?

1) 지금 이들의 눈물은 그냥 민족의 지도자를 잃은 눈물입니다.

그 눈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메시야가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을 계시했잖아요?

그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냥 따라 다니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을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지 못한다면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충격적인 예언을 하십니다.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엄청난 환난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재난 때 자식까지 챙기고, 자식의 죽음과 고통을 보는 건 최악이죠.

이 환난이 이미 정해졌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이 결국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 거의 전부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때로부터 40년 뒤 로마제국의 디도장군이 대군을 몰고 와 이스라엘이 완전히 공중분해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2천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잖아요?

디도장군의 이스라엘 정벌로 백십만 명이 잔인하게 도륙되었다고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합니다.

남은 장정들은 끌고가 검투사를 만들어 죽이고, 어린 아이들은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어 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2)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일까요?

하나님의 보호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가 없다면 위험이 덮칠 때 내 스스로가 방어해야 합니다.

방어할 힘이 없으면 당하는 것이죠.

강대국의 침략으로 지구에서 사라진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돌아오도록 선지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내셨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은 선지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후손이 이번엔 친히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원치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내셨었나요?

버티고 버티다 겨우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오게 되었죠.

결국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주님이 우셨다고 누가복음1941절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은 평생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죄인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사망에 이르는 죄를 청산해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영상을 보면 너무 참혹해서 눈길을 피하게 되죠.

왜 예수님이 저렇게까지 무서운 형벌을 받으셔야만 합니까?

하다못해 제물이 되는 양을 도살할 때도 단숨에 숨을 끊어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잖아요?

어떻게 죽으셔도 대속하시는 것은 똑같을 텐데, 덜 고통스러운 죽음은 왜 안되는 것일까요?

형벌과 형량은 죄와 비례합니다.

죄는 큰 데 형벌은 쥐꼬리만하다면 공의가 무너진 것이죠.

바라보기조차 힘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평생 짓는 내 죄가 그만큼 무섭고 크다는 걸 보여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그 벌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날은 단지 예루살렘 최후의 날만이 아닙니다.

29, 보라 날이 이르면

여기서 원문은 날들이 이르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괴로운 날,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날은 예루살렘 최후의 날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종말의 날을 맞이 합니다.

그리고 살면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위기의 날들도 만납니다.

성인 만화를 그려서 돈을 벌던 최0규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한창 잘 나가던 청년 때에 폐가 석회화되는 중병에 걸립니다.

수술로 폐를 잘라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간은 잘라내면 다시 본래 크기로 자란다고 하지만 폐는 그런 재생 능력이 없죠.

수술을 해도 생존하기 힘들 거라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수술 전날 최작가는 병원 기도실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 제발 나를 좀 고쳐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몇 시간을 눈물로 매달리고 돌아온 아침, 수술 전 마지막으로 검사를 하고는 의사가 사진 두 개를 보며 갸웃거립니다.

분명히 하얗게 죽어있던 폐가 밤새 정상 폐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미루고 지켜보자고 말했고 며칠 뒤 퇴원하라고 하며 말합니다.

이런 기적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최작가는 지금은 성인만화가 아닌 기독교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의 명작인 존번연의 천로역정을 애니메이션으로 출판했습니다.

인생에 이런 절체절명의 날이 온다면 도와주실 분이 있으십니까?

물론 최작가와 같은 드라마틱한 응답을 누구나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수술을 통해서라도, 치료 약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의 때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반드시 건져내 주십니다.

오늘 울며 주님을 따르던 예루살렘의 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주님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끝까지 주님을 믿고 예루살렘교회의 성도가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생긴 뒤 몇 년 뒤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죠.

그래서 성도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멀리 로마까지 흩어집니다.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의 대환난을 미리 피한 것이라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억지로 진 십자가가 구원과 축복이 되었듯이, 삶의 어려움이 때로 더 큰 환난을 피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환난은 예수님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련들은 바로 그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좀 편해져서 믿음의 길에서 미적거리면 또 시련이 오고, 좀 교만해 질만하면 또 시련이 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을 우리 심령에 선명히 각인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어떤 우연이나 고난으로 인해 억지로라도 우리가 예수님께로 온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십자가를 지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점점 가벼워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감당치 못할 날들이 인생에 다가올 때 나와 자녀들이 고난을 피할 수 있길 하나님 앞에서 미리 눈물로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