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tdMO3rqDtw
요즘 아름다운 계절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 주십니다.
지난 주 부활절이 지나며 갑자기 모든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죠.
꽃은 다시 지겠지만, 우리 안에 부활의 소망이 항상 아름답게 피어있길 축복합니다.
오늘부터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들을 함께 배우고 또 지켜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이죠.
사람이 모든 게 만족스럽게 살기는 힘듭니다.
부자나 성공한 사람이나 그 누구라도 어떤 면에서건 결핍을 느낍니다.
전에 배우 장동0씨가 TV프로그램에서 자기 얼굴에 불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쌍꺼풀이 너무 큰 게 불만이라 아예 쌍꺼풀이 없으면 좋겠다고 했더군요.
요즘 사는 데 어떤 부족함 때문에 힘드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선 결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네 인생에 분명히 부족함이 있을 거라’는 뜻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기도를 잘 깨닫고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게 되시길 빕니다.
1.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원했던 게 아닌 걸 보면 알 수 있죠.
1) 왜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없는지 혹시 생각해 보셨나요?
사람들은 다들 잘 살기를 계획하고, 자기 방식대로 열심히들 살아가죠.
그런데 왜 원하는 대로 해 내지 못하고 늘 잘 안되는 인생을 살까요?
사람이 원하는 걸 해 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그런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분은 신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자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끊으시면 살아있을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지만 신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께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다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해서 복되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문제죠.
애당초 신도 아니면서 하나님을 떠나 자존하려고 했던 최초의 조상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지금 선진국들이 AI 개발에 뛰어들어 인간의 새로운 미래에 열을 올리고 있죠.
AI를 제2의 두뇌라고 부르잖아요?
앞으로는 AI를 잘 다루는 사람이 미래를 선점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대재앙이 될 거라는 과학자들의 경고도 잇따르고 있죠.
엄청난 두뇌를 탑재한 고성능의 AI가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과는 끔찍하죠.
하나님도 아니면서 스스로가 자기 인생과 세상을 다스리며 살려는 사람의 시도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설계를 갖고 초정밀로 짜 맞추어 놓으신 이 창조 세계는 지금도 하나님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인 양 살아 가지만, 사실은 자기 사용설명서를 벗어난 고장난 피조물일 뿐입니다.
행복할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이룰 수도 없는 것이죠.
사람들이 남달리 뭔가 이뤘다고 하면 크고 화려할수록 그 안에 온갖 부패와 남의 피땀이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도 나대로 행복해 보려고 세상을 좇아 살았습니다.
얻은 것은 초라했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자리를 돌려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렇기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고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나님께 의존하고 나를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지만 오히려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시작되면 비로서 기도도 시작됩니다.
기도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면 아직 그 출발점을 향해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알고 기도로 교제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은 1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기 전에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라는 종교에서 하던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에 대해 대부분 어려움을 느낍니다.
기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기도하고 싶은 데, 실제로는 잘 안되죠.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배워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유대교에서 배운 대로 기도했지만 뭔가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그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유대교에서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도죠.
오늘 주기도문은 빼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 살펴 볼 것입니다.
1) 1절을 보면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라시며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을 가르쳐 주십니다.
비신자들도 큰 환난을 만나면 막연하게 신을 향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대상은 정확히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이 관계성이 확실해야 하는 것이죠.
누군가에게 뭔가를 구하고 받으려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확실하면 기도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5절부터 8절까지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을 달라고 간청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설정하신 것입니다.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친한 친구 관계이기 때문이죠.
여행을 하다 한밤중 남의 집에 들이닥친 사람은 집주인의 친구입니다.
그 밤에 저녁을 못 먹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집에 먹을 게 똑 떨어진 집주인은 배고픈 친구를 대접하려고 이웃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 떡을 좀 빌려달라고 문을 두드립니다.
집에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은 이런 일이 거의 없죠.
우리 옛날에는 한 대문 안에 몇 가구가 사는 집이 많았습니다.
갑자기 손님이 오면 옆 방 사람에게 밥 한 공기를 빌려 오기도 했습니다.
옛날 유대인 문화에도 먹을 것을 빌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민폐인지 본문에서 설명하죠.
이미 가족들이 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든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호롱불도 다시 켜고 부엌에서 떡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친구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비록 친구로서가 아니라도’ 라는 부분은 잠시 뒤에 살펴 볼 것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에서 주고 받는 사람이 서로 친한 관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뒤에 가서는 거의 무한정 주고 받을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오잖아요?
우리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성경에서 보증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장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영접했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아버지를 떠올릴 때 육신의 아버지의 개념이 섞일 수 밖에 없죠.
우리 나이대,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매일 술에, 폭력에, 도박에, 자식들이 의지하고 기댈 게 전혀 없는 아버지들도 참 많았습니다.
물론 술로 인생의 짐을 잊고 싶었던 그 시대 아버지들의 애환이 있었죠.
그런 아픈 가족사가 우리 나이 때만 해도 수두룩했습니다.
육신의 부모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하나님아버지를 연상할 때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전에 어느 단체에서 실시한 한 프로그램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 이런 걸 아셔야 하겠더군요.
어머니에게 상처받고 자란 딸들이 성인이 되어 자식을 낳으면 그 나쁜 관계가 그대로 대물림 된다는 다큐 영상입니다.
친정어머니와의 나쁜 관계가 자기 자식들을 키울 때 그대로 대물림 될 확률이 75%나 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거기 나온 아이 엄마들의 생활 영상을 보니 정말 어릴 때 부모에게 당한 그대로 자식을 대하더군요.
엄마가 한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던 딸은, 자기 자식과의 스킨십이 너무 싫다고 합니다.
팔베개를 해달라고 우는 아이 얼굴이 괴물 같다고 끝내 팔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매를 많이 맞고 자랐던 한 아이 엄마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의무감이라고 합니다.
섬뜩한 것은 ‘얘를 때리면 얘가 어떻게 할까, 한번 때려볼까’, 그런 묘한 충동이 가끔씩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딸에 대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아버지와 아들도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육신의 부모에 대해 우리는 이런저런 실망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아버지를 상상하면 안됩니다.
우리 머리 속에는 부모에 대한 기억과 여러 종교에서 받은 신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아주 믿음이 좋은 권사님께 하나님아버지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냐고 물었더니 묘사를 하는 데 거의 산신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이신지는 정확히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잖아요?
요한복음1장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행하신 것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지나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모습도 살펴보았습니다.
내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 주님은 정말 어른스러운 모습이셨고,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죠.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그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예수님을 배워가고 하나님아버지를 알아갈 것입니다.
알아가기 위해서는 역시 자주 만나는 방법 밖에 없죠.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사귀는 것 아시죠?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그런 것입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인격 대 인격으로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방편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고, 하나님을 사귐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기도를 작정하고 하나님을 사귐으로 아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본문 이야기에서 기도에서 중요한 점 두 번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친구라면 그 정도의 청은 서로 들어준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그런데 혹 친구 관계라 해도 안 들어 줄 수가 있는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죠.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가 있다면 빌려줄지 말지는 좀 따져보고 결정하지 않습니까?
본문 이야기에서 친한 친구기에 오히려 화를 내고 지금이 몇 신 데 와서 떡을 내놓으라하냐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친구가 일어나 떡을 내 준 이유는 관계 플러스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은 유일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운동선수들이 간절함이 없으면 비난받죠.
사람관계에서도 유일하다고 생각하면 간절하고, 간절하면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가 가족들도 식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좀 간절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도 과거엔 얼마나 하나님께 간절했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그런 간절함이 없어지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간절함을 친구가 눈치챘고, 떡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방송인 김용0씨가 그런 경험을 이야기 하더군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스라엘에 꼬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 한 모임에서 단체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왔습니다.
문제는 당시 재정 상태가 제일 좋지 않은 때였다는 것입니다.
팔백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데 통장에는 잔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신청을 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은 믿음이 들어서 진심을 갖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여기 꼭 가고 싶은데 창피하게 누구한테 손 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신경 쓰며 기다렸습니다.
며칠 뒤 건강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뜬금없이 보험료에서 환급금이 나왔다는 전화였습니다.
금액이 얼마였을까요?
팔백만원 가까이가 통장에 입금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우리가 간절하고 긴급하다면 하나님이 괜히 오래 기도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다급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부모가 뜸을 들이다 돌아보겠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그런 간절함이 없기에 응답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3) 기도에 대해 또 가르쳐 주시는 것은 끈기 있게 해야 하는 기도도 있다는 것입니다.
9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동사는 모두 다 계속한다는 진행형입니다.
어떤 문제는 계속해서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죠.
오랜 기도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어지게 합니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기도하지 않는다고 당장 큰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월급이 매달 들어오니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낸 통계인지 모르겠지만 2022년도 일 년 간 사람들이 평균 68회 자기 옷을 샀다고 합니다.
보통 한 달에 다섯 번 정도 의류 쇼핑을 한 것이죠.
1980년대만 해도 한 달에 옷을 한 번 정도 샀다고 합니다.
요즘은 아무리 사는 게 힘들다 해도 맛집이면 한 시간 씩 기다릴 만큼 사람들이 몰리고, 신상품이 나오면 오픈 런이라고 밤을 새워서 기다리기도 합니다.
물질이 풍요로우니 기도할 게 점점 없어지는 것이죠.
사소한 것은 내 힘으로 꾸려가고, 큰 일이 생기면 이런 일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안 생기니 현실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잠언의 기도가 사람의 심리를 꿰뚫은 것입니다.
잠언 30장8절,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배불러서 기도를 안 하는 데, 그나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척척 응답해 주시면 절대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날 때 하나님은 오래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 기간 동안 문제도 풀리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깊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저도 어려운 문제를 넘어가는 데 육 년 정도의 시간을 계속 기도했던 때가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게 되는 문제가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한 문제인 것이고, 그동안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큰 유익도 얻게 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면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시고 절실한 문제라면 꾸준히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 받기를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앞에서 성령을 구하라는 말씀이 없었는데, 갑자기 성령을 주시겠다고 마무리를 하셔서 좀 어색하죠.
생활의 필요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완결하신 것이죠.
우리의 관심이 우선 먹고 사는 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성령이 신앙에만 관련 있으신 게 아니라 생활에도 필요하시다는 것으로 연결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일찍이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36장27절,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우리가 기도한다면 건강문제, 직장문제, 자식문제, 결정과 선택의 문제 같은 다급한 것을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가장 좋은 응답은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들은 당장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이죠.
성령님이 없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확신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낙담하지 않도록 모든 기도를 도와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죠?
무엇을 구해야 할지, 무엇을 찾아야 할지,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를 성령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열리지도 않을 문 앞에서 계속 두드리면 안되잖아요?
그렇기에 성령께서 내게 오시길 기도해야 하고, 매일 나를 감화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믿음이 있어도 성령충만을 매일 받지 못하면 안 믿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세상에 관심이 많아지고 세상을 따라갑니다.
아직 성령이 안 계신 신자들이나 성령충만이 소멸 된 경우나 다 기도로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 항상 좋으신 성령님을 먼저 구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치명적입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도 되지 않습니다.
정말 안 좋은 인생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기도로 사귐을 갖고 내 뜻을 하나님께 조율하며 살면, 내 소원을 이루진 못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집니다.
우리에게도 더 좋은 것이죠.
살다 보면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 친구처럼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불현듯 찾아옵니다.
거절할 수 없이 어느새 우리 안방에 들어와 앉아있는 것이죠.
오늘 주님께서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인데, 왜 하나님께 구하지 않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힘들고, 바쁘고, 혼자 기도할 장소도 마땅치 않으시죠?
그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기도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도만큼 유익한 게 없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충만한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본문에 등장하십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가장 만족하고 행복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귐을 누릴 때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도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배웠으니 순종하고 기도하셔서 응답도 받으시고 사귐의 복도 풍성히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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