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zHJBjfwDKI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몰랐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알았던 민족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질 않았습니다.
선조들이 받은 하나님의 율법도 오랜 세월 동안 변질되고 왜곡시켰습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잘못 아는 사람을 가르치는 게 더 힘든 것 아시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잘못 된 생각들을 일일이 고쳐가며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술칼을 드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결국 그 기세로 예수님을 몰아 십자가에 못박기 까지 간 것이죠.
오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겠죠.
제대로 알아야 복된 하나님나라를 지금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오늘도 영의 시야를 더 환하게 열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데 12장을 보면 수만 명이 모여서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율법학자들도 점점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함정으로 몰고 있었습니다.
그 노정에 오늘 예수님이 한 마을로 들어가십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서 마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의식 때 마을을 방문한 랍비에게 말씀을 청해 듣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마치고 예수님은 그 동네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십니다.
주일에 외부 목사님이 와서 설교하면 점심 대접을 하는 식이죠.
오늘 본문은 그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절을 보면 이 식사 모임이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다고 하죠.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 맹신자입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쿠란을 절대시하는 것만큼 율법을 추종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은 쿠란을 모독하면 죽음으로 응징하잖아요?
오늘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모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죠.
수종병은 몸에 수분이 모여 심하게 붓고 장기가 손상되는 불치병입니다.
의사인 누가는 후일, 이 사건에 대해 들을 때 병명을 정확히 진단해서 수종병이라는 헬라어 병명을 기록했습니다.
성경에는 여기서 딱 한번 나오는 의학용어입니다.
수종병 든 사람이 왜 지역 유지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 오게 되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지 확인하려고 마을에 사는 이 사람을 데려왔을 것입니다.
아니면 병을 좀 고침 받으려고 멀리서 온 환자를 주님 앞으로 데려다 놓았을 수도 있죠.
어쨌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묻지도 않았는데, 3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바리새인들의 무언의 질문에 주님도 질문으로 응수하신 것이죠.
그들이 잠잠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율법조항에는 의사는 생명이 위급할 때 외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을 쉬라고 하셨지 병을 고치지 말라고 하시진 않았죠.의사의 의술 행위를 단지 일로 보았기에 의료행위도 금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을 때 두 가지 이유를 대십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에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라고 합니다.
또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에 억압당했고, 예수님 당시도 로마식민지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안식과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죠.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이 장차 너희에게 완전한 안식과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이 너희를 구원한다는 것과는 다르죠.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가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믿었습니다.
더 잘 지키려고 안식일의 금지조항을 39가지나 덧붙였고 이걸 어길 시에는 종교법으로 처벌했던 것입니다.
신자들도 예수님과 주님의 말씀에 의미를 두지 않고 신앙 형식만 지킬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아야 합니다.
드디어 참 안식과 완전한 구원을 주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안식일이 가리키던 실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안식일에 귀신과 질병에 억눌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안식과 구원이 임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질병과 고통, 사망의 짐을 벗기고 영원한 안식을 주실 메시야임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결국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선택하고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버립니다.
사람은 지독히 자기와 자기가 태어난 세계를 사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치신 뒤, 사람의 생명보다 자기들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을 하십니다.
5절,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복수가 차고 팔다리가 퉁퉁 부었던 사람이 건강하게 치유되는 게 얼마나 놀라고 경탄할 일입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 눈엔 그들의 치료가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이죠.
자기들의 세계에 도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만 더 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종병자만이 아니라 이 바리새인들도 죄와 사망의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도 건져내길 바라시는 것이죠.
우리도 역시 그 깊은 우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식, 내 가족이 지금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도록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이 초대 된 식사자리에서 이와 관련 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자리에서 좌석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시고 그 문제점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집주인 바리새인은 그날 유대교의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식사에 초대 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연회일수록 누가 어디에 앉을까 신중하게 좌석을 배치하죠.
교단 행사에서도 큰 교회 목사부터 순서대로 자리가 죽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작은 모임에서도 대개 알아서 서열대로 자리를 찾아 앉죠.
그런 사회 풍토를 이상하다고 꼬집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런 모습을 문제 삼으신 것일까요?
우선 비유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초대를 받으면 처음부터 상석에 앉지 말아라. 그랬다가 주인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 오면 자리를 좀 비켜달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말석을 택하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 왜 거기 앉았냐, 이리 올라와 앉으라고 할 것이고 그때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항상 말석에 앉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비유입니다.
또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한 처세술을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겸손하라는 도덕을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겸손하려 한다고 겸손해질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은 그렇게 진리나 본질을 벗어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 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예수님의 뜻에서 아주 멀어집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는 힌트는 8절에 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서 혼인 잔치하면 남녀 간의 결혼이 아니라 종말적인 하나님나라 잔치,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도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이해해야 앞뒤가 잘 맞습니다.
1) 이 비유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교만을 스캔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은 죽어라고 스스로 가장 높은 자리로 기어 올라갑니다.
지금 앉을 자리를 놓고 서로 재고 신경을 쓰는 이유도 같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며 이 문제로 계속 서로 신경전을 벌였잖아요?
누가 서열이 더 높으냐로 제자들 간에도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고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본심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월하다 생각합니다.
자신을 높게 생각하기에 무시당한다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잘난 게 없고 못난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나 자신과, 현실적인 내가 다른 걸 못 견디겠는 데서 나오는 게 열등감입니다.
그런 내가 미워 죽겠는 것이죠.
그러니까 열등감도 교만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본심은 다 남보다 자기를 우월하게 생각하고, 교만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놓고 생각해 보시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내가 속으로 비판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 있나요?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 부분은 내가 더 낫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갖 사람들을 모조리 비판하는 나는 종합적으로 제일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교만입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람의 교만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죠.
우리 본심 속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내게 더 절실히 원하는 게 생기면 당장 하나님이 귀찮아지고 하나님의 뜻은 완전 무시하기도 하잖아요?
지금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교만이 사람 위에 군림하다 못해, 자기들 인간적인 눈에도 가장 하나님스러우신 예수님을 깎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흠잡을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명백하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져 있는 것이죠.
주님은 그들이 그런 자기 교만을 끝까지 알지 못한다면 지금 자랑스럽게 차지한 그 자리에서 영원히 밀려날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도 저들과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교만한 내 죄의 본성을 알게 되었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는 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온전히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에 대한 깨달음은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의 감화로 서서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란다고 하셨죠.
내 안에 있는 죄의 교만한 실체를 알면 터무니없이 자기를 높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본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교만하게 구는 나를 깨닫는 순간 또 회개하고 낮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높은 자리에 나를 두는 순간, 하나님은 나를 낮추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낮아져야 하나님이 우리를 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높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낮추실 수 밖에 없습니다.
낮아지게 하시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죠.
우리가 소유하면 교만해질 것을 안 주시면 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천 가지 장점이 있어도 사람들이 속으로 대단치 않게 여깁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죠.
3)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물론 오늘 말씀이 항상 겸손하게 행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행할 수가 있냐가 어려운 문제죠.
겸손이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의 본성에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본성에 있는 걸 하는 게 제일 쉽습니다.
우리 본성엔 겸손이 없기에 어려운 것이고 교만은 있기에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겸손입니다.
오늘 예수님에게서 자기 주제를 모르고 우쭐대는 이 바리새인들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을 꾸짖을지언정 사람을 하찮게 보신 적은 없으십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굽신거려도 속으로는 무시하는 것과 완전 다르시죠.
예수님이 지독한 죄인들까지도 하찮게 보지 않으시는 열쇠는 주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절대로 하찮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공부 못한다고 하찮게 봅니까?
자식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고 우쭐대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병든 부모죠.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랑이 있어야 서로 낮추고, 서로 하찮게 대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주님의 사랑과 겸손이 새마음 속에 심어집니다.
그러나 교만한 본성이 강하기에 겸손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이 안 생깁니다.
교만한 줄 알면서도 그걸 다루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만 겸손하게 행동할수록 속으로는 더 교만해지는 부작용도 생깁니다.
우리가 죄인의 본색대로가 아니라 성도답게 살도록 주님이 가르치고 명령하시잖아요?
그렇게 실제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시작되면 바이올린 연주자가 풀어진 줄을 조정하듯이 우리 마음을 다시 예수님에게 향하여 마음을 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우리 마음이 바르게 조정됩니다.
기도를 많이 못하면 예수님을 생각이라도 자주 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서 시작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더욱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내 생각과 계획을 바르게 정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르쳐 주신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 땅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매일 주님의 도우심과 내 의지를 다해서 그렇게 사랑하고 겸손하게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크게 넘어지지 않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도록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3. 하나님나라 잔치에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점심자리로 초대한 주인에게 이런 조언을 하십니다.
13절,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절,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 이것이 하나님나라 잔치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원리입니다.
교만하고 가진 것이 많고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비유에서도 그들이 한결 같이 왕의 잔치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렇기에 잔치를 베푼 사람이 종들에게 명령하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 이것은 그 잔치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우리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모임에는 당연히 내가 좋아하고 편한 사람들을 초대하죠.
누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내 식탁에 초대할 수 있겠어요?
또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하죠.
사람들이 얼마나 속으로 우열을 가리고 차별합니까?
자기하고 수준이 좀 다르면 서로 섞일 생각도 안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잘 통하고 편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가깝게 지내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서로 대접하고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끼리 섬기고 서로 칭찬하고 즐긴 것은 천국에서 잘했다고 되갚음 받을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의 영원한 내세에서 복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밥 먹는 일상조차도 영원히 복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죠.
그것은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중요한 날에 우리가 호텔 뷔페에서 먹으려면 요즘은 인당 이십만 원은 나갈 것입니다.
그냥 돼지갈비 정도로 먹고,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의 식탁에 음식을 주면 어떻겠습니까?
한 유명한 패션 모델이 친한 선배에게 천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천만 원짜리 시계가 그들의 깊은 애정의 표현이겠지만, 서로 비싼 물건을 주고 받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지 않겠나 생각해 보자는 것이죠.
배우 소지0 씨는 삼 년 전 결혼할 때 신혼여행을 생략하고 5천만원을 굿네이버스에 기부했다고 하더군요.
야구여신으로 불리는 아나운서 최0 씨도 신혼여행을 생략하고 삼천만 원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국제어린이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는 이 돈을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생계비로 지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고맙다고 최0 씨를 다시 초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되돌려 받지 못할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라시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돈을 절약해서 기부하라고 한정된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를 내가 좋아하는 일에 소비하고 즐기다가 무의미하게 낭비되지 않게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울타리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두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생각과 거동이 불편한 자, 이런 분들도 기꺼이 용납하고 사귀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초라한 나를, 아무 갚을 것이 없는 나를 사랑해서 주님의 복된 식탁에 초대해 주셨잖아요?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다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스라엘이 천오백년 간 지켜왔던 안식일의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
안식일이 구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하고 안식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죄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근원적인 안식을 주셨습니다.
죄를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 죄인됨을 깨닫고 회개하면 천국에서 기쁨의 잔치가 열린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 그렇게 큰 은혜입니다.
이제는 교만한 나의 삶의 울타리를 낮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나를 즐겁게 하기보다 힘든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면 그로 인해 나도 더욱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복된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식탁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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