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장 큰 관심은 뭐니 뭐니 해도 돈일 것입니다.
돈이 피 같잖아요?
돈줄이 막히면 혈맥이 막힌 것처럼 괴롭죠.
오늘 예수님께 몰려 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님께 열광했던 이유는 신앙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주님이 독립을 이끌 지도자이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내 돈을 로마제국에 세금으로 바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원했던 것이죠.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각자 무슨 목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지를 또렷이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사람의 요청을 듣고, 거기에 맞춰 사람들의 진심을 몇 가지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려는 것을 잘 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어떤 사람이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불치병이나 귀신 들림 같은 절박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죠.
13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말씀을 들었지만 이 사람 머리 속엔 온통 유산 문제만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하신 말씀과 맥락도 없이 황당한 요청을 합니다.
형에게 말해서 유산을 자기와 나누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법정은 있었으니 아마 그쪽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나 봅니다.
법률이 판결한다 해도 돈 문제는 주고받기 전까지는 깨끗이 해결이 안되죠.
당시 유산 상속의 법은 보통 장남이 두 배를 가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재산을 다 관리하던 장남이 막무가내로 유산을 나눠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유산을 못 받은 동생으로서는 화가 나고 속이 타는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주님께 구했다 거절당한 사람이 처음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메시야로서의 기대감으로 사람들에게 인기절정이셨습니다.
유산 문제로 나온 사람은 예수님을 슬쩍 솔로몬왕에 빗대지 않았나 싶습니다.
왕처럼 인정하는 척 판결을 구한 것이죠.
아마도 한 아기를 놓고 다투던 여인들에게 내렸던 그 판결을 듣고 싶었겠죠.
‘유산을 둘로 쪼깨라’
그런데 예수님이 이 문제에 관여하길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정치적 왕도, 재판관도 아니시라는 걸 분명히 밝히십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기보다 그 권위를 사용해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세상 권력자들 주변엔 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예수님 말씀이 탐심으로 이어진 걸 보면 이 사람의 문제는 생계형도 아니고 부자들의 상속 싸움에 지나지 않았던 걸 알 수 있죠.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예수님은 그런 의미의 빵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고, 세상의 분쟁을 처리해 주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열광하는 이유를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신자들은 좀 다를까요?
근본적으로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만일 배우자나 가족이나 지인들이 내게 어떤 후광이나 편의를 제공하기에 필요하다면 그게 바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미묘한 문제지만 사람들의 관계에는 이런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가 그렇게 이용하고 사용하면서 삽니다.
그렇기에 세상 관계는 늘 쓸쓸함이 있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여야 사람은 만족을 얻습니다.
서로 사용하는 사람 관계는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면 결국 금이 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다면 언제든 깨질 수가 있는 것이죠.
주님이 그렇게 따르는 걸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유산을 챙기려는 사람이나 제자들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왕국이 되면 얻게 될 정치적 성공을 기대하고 주님을 따랐기에 서로 자리다툼을 했던 것이죠.
오늘도 사람들이 수만명 모여 서로 밟힐 정도가 되었다고 1절은 기록합니다.
왜 굳이 그런 말을 누가는 기록한 것일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예수님께 모였고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다들 자기 생각, 자기 필요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절친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야망만 커졌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도망했던 것이죠.
우리야 몰라서 속는다지만 예수님은 모든 걸 아시면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으니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지금도 세상 사느라 지친 성도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나를 귀한 자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한주간 소원했던 마음을 예배하는 시간조차도 백 프로 사랑으로 보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형제가 오남매입니다.
오래 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한번은 전화가 왔습니다.
먼저 전화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날 전화를 하신 거예요.
전화를 받자마자 좀 나무라는 말투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데, 왜 이렇게들 전화 한 통이 없어, 다들 별일 없는지 어디 알 수가 있어야지’
저희 어머니가 굉장히 강인해서 힘들 때 자식들에게도 내색한 적이 거의 없고 애정을 잘 표현한 적도 없으십니다.
저는 짧은 순간 두 가지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엄마도 자식들 생각을 하시는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다들 바빠서 전화 못하는 건데, 전화 안 하면 잘 지내는지 알면 되시지 그게 섭섭하신가?’
자식을 멀리 시집 보내놓고 보니 어머니의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부모는 늘 마음이 자식에게 향해 있는 것이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그러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겠지만 사랑하고 경외하기보다는 나를 좀 채워주시길 기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한 목적으로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도 결국 예수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한 목적보다, 상대가 내게 의미가 있고, 중요해지고, 결코 놓을 수 없게 되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시니 사람들과 그런 관계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한밭제일교회를 개척한 이영0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어릴 때 집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공부도 못해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청년이 되어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정식 입학이 안되고 졸업할 때도 수료생으로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학벌도 없고 말도 잘 못하니 낙도 섬에 가서 삼십 명 목회하는 게 자기에게 딱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도시 대전에 개척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목회하던 중 어느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단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생각을 주시는 거예요.
한밭에서 제일 가는 목회를 하라시는 감동이었습니다.
내 주제에 무슨 대전에서 제일 가는 목회를 하겠냐, 내가 이렇게 교만해졌나 화들짝 놀라 지나쳤는 데 며칠 째 그런 감동을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이유만 떠올리다 갑자기 이런 깨달음으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아, 한밭에서 제일가는 목회자가 되려면 대전에 있는 모든 목사들 중에서 제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면 되겠네요. 다른 건 못해도 그건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그렇게 대전에서 주님을 제일 사랑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기도도, 말씀도, 살아가는 하루하루도, 맛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장로 23명, 부목사 18명이 사역하는 대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이목사님에게 대전의 많은 성도들을 맡기셨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이 분이 정식 학위도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왜 굳이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평생 낙도에서 삼십 명 목회를 할 생각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건강한 몸으로 뭐든 해서 가족들 고생시키지 않고 살았겠죠.
예수님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물론 작은 교회를 섬기고 평생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가면 안됩니다.
목사들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 대한 충정으로 시작했지만 자기를 더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용해 자기의 성공을 이루려고 합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가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있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나드 향유 한 병을 예수님 발에 다 부어 드린 마리아입니다.
진짜 사랑하면 남김없이 주고 싶은 마음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의 헌신도 함께 전해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께, 성도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걸 마리아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울사도도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을 전제와 같이 하나님께 다 쏟아서 부어드렸다고 말합니다.
진정성 있는 성도들은 오히려 내가 주님을 과연 사랑하는지 자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유행과 정보들에 대해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가 분명하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할 지 막연한 생각이 들죠.
예배에 힘쓰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내 시간과 물질과 재능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또 사랑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면 감사를 하십시오.
그런 노력 속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하시고 우리도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 없고, 실력 없고, 건강도 없지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 모두의 신앙이 예수님을 사용하려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2. 예수님은 이 유산 문제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탐심으로 주제를 전환하십니다.
1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 이 말씀 중에서 어떤 단어를 강조하신 것 같습니까?
탐심입니까, 생명입니까?
탐심을 경계하시는 것이지만 그 탐심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탐심은 생명에 대한 애착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소유해야 하는 필요성이나 근거나 계획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다 가지려는 게 탐심입니다.
별 필요도 없는 것도 무조건 가지려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많이 가진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 생명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소유해도 여전히 불안하니 부족해서 그런가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죠.
안전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잔뜩 쌓아두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맞는 비유를 한 가지 말씀하십니다.
2)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16절,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 이 부자는 처음부터 부자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 뱃 속에 있을 때 이미, 커서 성인이 되면 월급을 얼마 받을 것인지 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애석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얼마 전 당근마켓에서 아이를 둘 가진 젊은 엄마가 육아를 도와 줄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광고에 떠들썩했습니다.
주 6일간 아홉 시간 정도 와서 작은 아이 위주로 돌봐 주는데 월급을 430만원 주겠다고 냈더군요.
아이를 위해 이 정도 지불할 수 있는 집에서 자란 아이와 가난한 집에서 자라는 아이는 살면서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질 것입니다.
농토가 많은 이 부자는 풍년에 더 많은 소출을 거둘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돈이 돈을 버니까요.
이제 소출이 너무 많아서 기존의 창고로는 감당이 안되게 된 것입니다.
17절,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이 부자의 고민을 사람들은 부러워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돈이 너무 많은데 어디 써야 할지 모르겠다, 명품 신상이 나오는 대로 사고, 슈퍼카를 몇 대씩 사서 주차장에 세워 놓고, 그 다음 또 나를 위해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하겠죠.
내가 즐길 것만 찾는 이런 고민은 사람들에게나 하나님께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내일 끼니를 걱정하는 게 차라리 하나님 앞에 정당한 고민일 것입니다.
(2) 부자는 자기를 위해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쌓아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9절,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사람은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오로지 세상에서 찾았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죠.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안간힘을 쓸 수 밖에 없죠.
우리도 물질을 초월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생계를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과 행복에 돈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생계가 오직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면 더 벌지도 못하면서 염려와 탐심만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경력이 오랜 분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몇 년 치를 미리 쟁여놨기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때그때 필요한 걸 주셔서 살아온 것입니다.
부자는 모아 놓은 돈으로 오래 오래 먹고 마시고 행복을 누릴 줄 알았습니다.
(3) 그러나 자기의 수명이 바로 오늘밤까지인 것을 몰랐습니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부자라고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돈 주고 하루치 목숨도 더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수명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이 다하면 단 하루를 더 살지 못합니다.
백년 살 것을 준비한들 그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서는 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겠지만 죽으면 내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백만장자의 장례식을, 지나가던 노숙자가 불쌍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4) 이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판단하십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리석은 부자가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죠.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마음 씀씀이가 후해지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내가 주님에 대해 후한지 박한지를 보면 알 수 있겠죠.
오늘 유산을 챙기러 나왔던 사람에게서 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결론을 내셨을까요?
공통점은 돈이 하나님께 가는 것을 가렸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돈과 하나님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실제와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돈을 하나님 밑에 두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가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않다고 하신 것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교회에 내는 것은 잘하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데는 박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게 각기 그렇게 다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후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수입은 늘 일정한 데 어떻게 이런 재정관리를 하며 살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3. 그렇기에 오늘 비유는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한 부자가 되라는 뜻이 옳을 것입니다.
부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잘 알려진 션과 정혜영부부의 경우 기부한 누적액이 57억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벌면 부자죠.
공연, 광고, 강연으로 번 돈과 마라톤 대회를 열어 모은 기부금으로 이만큼 기부를 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올림픽공원 안에서 3킬로를 한 바퀴 달리는 기부 마라톤을 개최했더군요.
그런데 이 가정에 아이들이 네 명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해 주고 싶습니까?
그걸 위해 그 돈을 쌓아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 분들이 하나님께 부요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장 끼니를 굶는 아이들을 바라보시는데, 어떻게 나와 내 자녀들의 먼 장래를 위해 쌓아두겠냐는 것입니다.
기부천사란 이름을 달고 사는 게 사실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얼굴에 항상 웃음이 있잖아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 부요한 마음에서 나오는 만족과 감사인 것이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오기까지에 해당됩니다.
예수님 앞에 왔고 천국에 들어갔다면 이젠 좀 부자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복음 선교는 물질 없이는 어렵습니다.
교회가 돈 없이 어떻게 구제 사역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써 가면서 전도도 하는 것이고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교회도 운영됩니다.
기독교인, 기독교 국가가 가난했다면 지금 같이 복음이 확산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경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수입이 많아지면 더 주의 일에 힘쓴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임윤0피아니스트가 악보 두 마디를 치는 데 7시간 연습을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음이 심장을 강타할 때까지 연습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이 젊은 청년이 자기 앞의 삶을 이만큼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데 제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노력에 댓가가 따라오는 게 당연한 것이죠.
우리에게 허락하신 직업과 일터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곳만은 아닙니다.
월급만을 위해 마지못해 일한다면 일도 내게 풍성한 열매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내가 하는 일이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무언가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을 순수하게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탐심은 내 인생을 내가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래봤자 역부족이잖아요?
적게 가져도, 많이 가져도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신다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이어서 바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을 믿을수록 불안도 줄어들고 탐심도 줄어듭니다.
탐한다고 많이 갖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 부요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부요하게 하십니다.
나를 위하는 이기적인 본성과 앞날의 염려를 잘 이기고 하나님과 이웃에 부요한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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