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jC2IISIiP4M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봤다면 도와주는 게 마땅한 일이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작년 11월에 진주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여성을 28세 남성이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평생 보청기를 끼고 살아야 하는 청각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도와주려던 50대 남성도 범인이 휘두른 의자에 맞아 큰 상해를 입었습니다.
남을 도우려다 얼굴에 큰 상처가 나고 일자리까지 잃고 지금도 그 고통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용기도 부족하고 겁도 많고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마음 같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와 가족을 챙기기도 버거운 게 우리 현실이죠.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율법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결론을 내십니다.
구원과 이웃 사랑을 별개로 놓을 수는 없다는 말씀이죠.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실천의 측면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 실천적인 이웃 사랑에 세상은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오늘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 부분입니다.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 율법사의 질문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찾을 수가 있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질문은 하지만 실은 자기 나름의 답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전공이 율법이고 가장 자신 있는 것도 율법이고 율법에 대해서는 나를 능가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전공이 목수이십니다.
율법사는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 말씀을 듣겠다고 몰려다니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성직자와 율법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신 것에 대해 감정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회가 왔다, 내가 저 사람이 누군지 탈탈 털어버리겠다’
이렇게 벼르고 논쟁을 준비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2) 율법사만이 아니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판하고 판단했습니다.
결국은 십자가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단죄한 것이잖아요?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죠.
하나님이 눈 앞에 계신데, 그 정도로 못 알아 보았다는 것이잖아요?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을 당시 사람들이 그 정도로 몰랐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을 잘 모르는가는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삼 년을 같이 다녔지만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었지만 실은 주님의 속을 몰랐기에 대화를 들어보면 주님과 제자들의 핀트가 항상 안 맞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속이 뻔하잖아요?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몇 번만 들어도 대충은 그 사람 속이 좀 보이죠.
사람끼리는 생각이나 말이나 감정을 파악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간디가 무슨 말을 했든, 공자가 무슨 말을 했든, 이해 못 할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처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심중이 파악이 안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물이 담긴 대접처럼 속이 들여다 보인다면, 주님은 깊은 심연과도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 관계처럼 알아 간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다만 예수님을 알기 위해 배우다 보면 점점 믿음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은 데, 믿어지고 신뢰하게 된다는 게 신비죠.
오늘 율법사는 예수님을 자기가 가진 짧은 잣대로 재보고 시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내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짧은지 긴지를 재보기 때문에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깊은 지혜를 잠잠히 믿고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율법사의 의도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응대하십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가 확신하는 답을 스스로 말하게 하시는 것이죠.
과연 율법사는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주신 율법을 두 가지로 잘 요약해 대답합니다.
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에 대답을 듣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주님의 답변은 그동안 가르치시던 것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진짜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습니까?
주님은 율법을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 적은 없었잖아요?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부자관원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잖아요?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사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환영하시죠.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걸 구약성경 이천 년 역사가 처절하게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율법사는 정답은 알지만,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의 독소조항 중 하나는 사랑을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로는 누구나 박애주의자가 될 수 있죠.
만일 율법사가 사랑을 실천으로 알고 행하려고 했다면 자신의 한계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어야죠.
‘그것을 알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으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상태가 니고데모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자기의 한계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는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 율법사에겐 알고 있는 율법대로 지키라는 처방을 내리신 것이죠.
네가 아는 대로 과연 실천할 수 있는지, 네 한계를 정직하게 파악하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던가요?
감정으로도 사랑이 안되고, 내 것을 갖다 주는 것은 더 안되죠.
주님의 계명과 내 속마음은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다는 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게 안 되는 나 자신에게 좌절해 봐야, 왜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지,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점점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율법사가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계획했던 함정에 걸리시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자기가 예수님께 설복당한 것처럼 되어버렸잖아요?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사가 두 번째 질문으로 만회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도 ‘네 생각은 어떠냐’고 되물으셨다면 율법사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당연히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과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이 나의 이웃이라고 대답하겠죠.
그 질문 속에는 죄인과 세리를 친구로 사귀시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가 담긴 것입니다.
그 문제로 주님은 비난을 많이 받으셨잖아요?
이런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주님은 어떻게 사람들에 대해 이런 인내심을 가질 수 있으실까?
지금도 속을 다 아시면서 주님은 율법사를 쫒아버리지도,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에 대해 정말 잘 참으십니다.
오죽하면 ‘내가 얼마나 더 너희를 참으리요’ 그러셨잖아요?
우리는 상대가 조금만 맘에 안 드는 언행을 하면 불끈 화가 나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하려고 노력하다가도 한순간 무너지는 것은 우리 안에 사랑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은 정말 진실입니다.
주님이 율법사만 참으셨겠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도 사랑하시기에 용납이 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잘못을 볼 때마다 화가 나신다면 아마 우주에서 가장 불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불순한 율법사를 참으시며 잘못을 고쳐보려고 하십니다.
3. 그래서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다 강도를 만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골짜기처럼 깊어서 강도들이 숨었다가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그만 강도떼의 습격을 받고 가진 것을 다 뺏기고 옷도 벗겨진 채 죽을 만큼 맞고 버려집니다.
얼마 후 그 길에 한 제사장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갑니다.
잠시 후 한 레위인도 그 현장을 보고는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상종도 안 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 밤새 돌봐줍니다.
그리고 아침에 떠나며 미리 숙박비를 주고 주인에게 이 사람을 맡깁니다.
비용이 더 나오면 돌아와서 계산해 주겠다고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이웃입니까?
사마리아인이죠.
율법사는 자존심이 상해서 사마리아인이라 안 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합니다.
유대인들이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2) 이 비유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는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이번 비유에도 뭔가 걸리는 것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비유를 만들었다면 백 프로 이렇게 등장인물을 설정했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사마리아인, 지나가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유대인’
‘예수님은, 관계가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도 도와줘야 할 이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렇게 이야기가 설정되었다면 걸리는 것 없이 뜻이 분명하죠.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는 평상적인 것을 살짝 비틀어 놓으시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역할을 바꿔놓으신 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뻔한 비유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한참 인기였던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죠.
보통은 여자가 신데렐라가 되고 재벌 시댁에 들어가서 고초를 겪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선 평범한 변호사가 재벌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처가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며 혹독한 처가살이를 합니다.
제사상에 올릴 전까지 사위 김수현씨에게 부치게 하죠.
전형적인 재벌가 아들과 흙수저 여자의 역할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뻔한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이 신선하게 느끼고 극에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쉽게 들리다 딱 걸리는 반전의 부분에 정확히 그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바꾸셨을까요?
율법사는 듣는 내내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악감정은 우리나라 지역감정이나 일본과의 감정 이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외국인 혼혈족인 사마리아인을 돼지고기보다 더 혐오했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율법사는 끔찍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치 비참한 몰골로 원수진 사람을 찾아가 구걸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인 것이죠.
예수님은 율법사를 불편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평범하게 유대인이 사마리아사람을 도와주는 비유로 말씀했다면 어땠을까요?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로 비웃으며 넘어갔을 것입니다.
주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너무 불쾌해서 계속 머리 속에 남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용기를 주고, 은혜를 주시지만 때로 잘못을 드러내 불편하게 합니다.
말씀이 나를 찌르고 불편하게 해야 내 잘못된 본색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웃을 선택합니다.
유대인끼리만 이웃이고, 율법사끼리만 이웃이고, 학력이 같은 사람끼리만 이웃이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끼리만 이웃이고, 강남에 사는 사람끼리만 이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설령 나를 사마리아 사람처럼 멸시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며 멸시했지만, 주님은 그들 모두를 위해서 사랑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사실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우리가 바로 인생에서 강도를 만났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살려주셨기에 우리도 강도 만난 이웃들을 위해서 주님을 전하고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이죠.
주님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한 사람들에게 내가 선을 긋지 않기를 축복드립니다.
4.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 비유의 의미가 명료합니다.
평소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되 특히 인생에서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웃이 없어도 잘 삽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은 도와주는 이웃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힘들게 도와주고 오히려 곤욕을 치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운전하며 골목길을 지나가는 데,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지나가며 보니까 두세 살 난 작은 아이가 넘어져서 크게 다친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다친 아이를 데리고 인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아가 보았더니 부모와 친척들이 모여서 뜻밖의 스토리를 짜 놓았더랍니다.
전도사가 아이를 차로 치고 병원에 데려왔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어려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목격자도 없고 전도사가 결국 덤탱이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오십만 원인가로 합의를 보았다고 하더군요.
이런 일도 당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선교사들은 복음 전하고, 병원 세우고, 학교 짓고, 죽임 당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이 도적의 출몰을 두려워 피했지만 사마리아사람은 똑같은 위험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죠.
불이익이 두렵더라도 원칙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선행으로 끝난 것은 선행의 습관이 우리 구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이 법을 새겨주시기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뭔가 내가 잘못한다는 걸 느낍니다.
또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지 않아도 왠지 떳떳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기쁜 것이죠.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서글프고 공허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절대로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옹졸한 나를 보면 추하고 보기 싫잖아요?
장애인인권법센터 대표인 김예0 변호사의 이야기가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변호사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유명한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보장된 부와 미래를 버리고 태평양을 나와서 비영리 공익변호사가 됩니다.
의뢰인에게 단 한 푼의 수임료도 받지 않는 0원짜리 변호사입니다.
김변호사가 변호하는 사람들은 중증 인지장애와 복합 장애로 자기가 피해당하고도 법에 호소할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김변호사의 남편은 같은 사법연수원 동기이고 현재 판사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결혼하고 바로 군대에 가는 바람에 아이를 혼자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어느 때는 재판날짜가 잡혔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젖먹이 아이를 안고 법원에서 변론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가 울면 안되니까 망토 같은 것으로 아이를 덮고 젖을 물린 채로 변론을 했다고 합니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누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겠습니까?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그런 일을 스스로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칭찬해 주기나 합니까?
게다가 때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나를 하나님이 아시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김변호사가 그렇게 분주히 살아가던 어느 날, 첫째 아이가 목이 아프다더니 말소리도 아예 나오질 않았습니다.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했는데, 백혈병의 일종으로 암세포가 목에 발생해 뼈를 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까지 손상되면 전신마비가 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라 서둘러 수술을 결정하게 됩니다.
어린 딸의 목을 절개하고 뒤로 꺾어 병변을 제거해야 하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수술일이 재판일과 겹쳐 아이 곁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달려가 아이를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목에 깁스를 한 다섯 살 아이를 병원에 둔 채 빨래감을 들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목길 좌우에 늘어선 음식점과 술집에서 사람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들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웃고 사는구나 생각되는 순간,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제가 큰 걸 바라지도 않았잖아요?’
그렇게 울면서 골목길을 걸어가며 물었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다음날 병원으로 아이를 보러 갔을 때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어제는 왜 나 수술하는 데 안 왔어?’
‘응,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아픈 언니가 있어서 거기 가느라고 못 왔어, 미안해.’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잘했어’
아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말이 딱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예원아, 잘했다’
김변호사는 끝까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0원짜리 변호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다 똑같이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씩 행하는 훈련과 습관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대로 내 것을 덜어 내어 돕는 사랑을 조금씩, 함께 실천해 가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와 내 가족이 겨우 살아가기도 버거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셨고, 이 땅의 삶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맞춰서 살도록 격려하고 계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만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몸처럼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할 때 그 주님의 사랑이 점차 우리를 주님 닮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힘으로 이웃도 사랑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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