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DhYxRz2GZSQ&t=1495s
오늘도 예수님은 멋있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인기 있는 강연자들처럼 감동을 주고 감탄하게 하는 멋진 말씀을 하지는 않으십니다.
항상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셔서 바로잡아 주셨죠.
예수님은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별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삶의 문제는 믿음 안에서 풀어가야 할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죠.
주님은 어쩌면 우리가 큰 관심이 없을 것들인, 인생의 의미와 죽음과 내세 같은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귀에 음악소리 같지는 않지만, 영혼을 복되게 하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우리는 왜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중에 바리새인들과 예리한 날을 세우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국교로 믿는 종교국가였습니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교을 국교로 믿는 종교국가인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나라에서 다른 종교는 발 붙일 수가 없죠.
이슬람이 믿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걸 주장했다간 사형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런 종교국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신성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유대교 전통은 남아 있지만 종교국가가 아니고 우리나라처럼 세속국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믿던 유대교를 발전시키고 전통을 만들어 온 대표적인 분파가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성경의 하나님 신앙에서 탈선해 세상종교화 되어버린 상태였어요.
세상종교의 공통점은 신을 섬기지만, 신이 최고의 자리에 있지 않죠.
사람이 신보다 위에서 신을 섬기는 방식을 정하는 게 종교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많은 율법들을 만들고 신봉했던 게 그 실례입니다.
카톨릭의 경우도 바티칸의 결정이 성경보다 위에 있죠.
교황 비오 9세가 1830년에 마리아가 원죄가 없이 무오하다는 무염시태 교리를 선언했습니다.
이후로 카톨릭교회는 마리아가 원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교황비오12세는 1950년에 성모승천 교리를 선언합니다.
이후 마리아가 예수님처럼 승천했다고 가르치게 된 것이죠.
교황과 카톨릭지도부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가 그런 형국이었다는 것이죠.
2)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맹비난하셨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의 비리는 현대의 부정부패한 공직자들 이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지 그런 죄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심판하셨겠습니까?
부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속과 겉이 다른 것을 주님은 외식한다고 저격하셨습니다.
우리도 속과 겉이 다르잖아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엄중하게 정죄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또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항상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을 입에 올리며 살았잖아요?
그런데 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신앙의 기초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구약성도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속죄의 제사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장차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들이는 첫 단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에게 유리한 눈높이로 끌어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을 지킬수록 죄를 깨닫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만 적립하게 되는 것이죠.
신앙의 기초부터 잘못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모르니 예수님의 대속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이런 탈선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나라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유대민족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체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주후 70년에 나라가 멸망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
그렇게 나라가 공중분해 된 유대인들이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이천년 뒤 지금의 현대 이스라엘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조상들에게 물려 받은 그대로,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된 것입니다.
3) 우리 신앙에도 올바른 기초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지만 그 길은 구원을 벗어난 길이었잖아요?
성경은 늘 같은 걸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걸 모르면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살면서도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시골의사라는 유튜브 영상을 가끔 봅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젊은 의사가 시골에 가서 개원을 하고 신앙과 일상을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시골의사의 가식 없는 소탈함이 좋더군요.
오일장에 가서 선지국밥 먹는 영상, 문 닫은 시골교회 앞에서 삼각김밥하고 바나나 우유로 점심 먹는 영상, 그런 소박한 내용들을 올립니다.
이 의사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때는 재미로 잘 다녔죠.
그런데 성인이 되니 신앙의 의미를 못 찾고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인턴 시절, 학교 선배가 동네 작은 교회에서 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갑니다.
싫지만 선배 말이라 억지로 따라 간 것이죠.
그날 유명한 강사도 아닌 목사가 나와 평범한 설교를 했습니다.
시큰둥하게 앉아 있다가 ‘우리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날아와 마음 어딘가에 꽂혔습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전엔 성경이 죄인이라는 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교회도 다녔고, 남들보다 나쁘게 산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자기 키가 180이니 작은 키가 아닌데, 만일 서장훈씨가 옆에 와 서 있다면 평소 크다고 느꼈던 자기 키가 저절로 작게 보인다는 것이죠.
그날 어떤 거룩한 존재가 자기 곁에 오신 것 같았는데, 그냥 자기 죄를 자각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지었다는 그런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 순간 그냥 자기 존재 자체가 죄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죄를 깨닫는 극적인 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죄를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죄가 끊임없이 나를 포장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며 남의 인정을 받고 나를 성취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결국 파멸을 선언했던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단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도 다 겉과 속이 다르게 살지 누가 똑같이 살겠습니까?
우리는 내 속의 죄악을 알기에 겉으로 행하는 위선도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속의 죄를 모르면 자기 삶이 위선인지, 기만인지, 연극인지, 그게 죄인지도 신경 쓰지 않고 삽니다.
바리새인들의 처지가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정도로 죄를 폭로해도 미동도 안 했던 것입니다.
2.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몇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1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자들은 철저히 본성적인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입니다.
1)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외식은 회개치 않은 바리새인들에게서 겉으로 드러나게 된 이중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해도 바리새인처럼 어떤 목적으로 위선 되게 행동하잖아요?
1절을 보면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만 명이 모여서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하죠.
지금도 수만 명 집회는 흔치 않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죠.
제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람이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일이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본성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죠.
권력욕, 명예욕, 물욕, 오만, 우월감, 등등.
지난 주 교회에 오다가 도로에서 신호대기에 잠깐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차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팔을 툭 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차는 고급 외제차였고, 잘은 모르겠지만 팔목에 찬 번쩍이는 시계도 롤렉스일 것 같았습니다.
팔 한쪽만 보았는데도 거만함이 철철 넘치는 걸 느꼈습니다.
사업이 막 잘 되고 있나 보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걸 바라보는 제자들 얼굴에 번지는 자만심과 권력욕을 보셨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자리를 꿰차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길로 빠졌다면 누구든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그것을 점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이 성공적일 때 제자들을 항상 경계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죄성에서 위선이 나오는 걸 안다 해도 태도가 금방 바뀌지는 않습니다.
외식하지 않으려고 속마음 그대로 남을 대할 수는 없잖아요?
그랬다가는 사회생활 어렵게 되겠죠.
물론 남에게 좋은 평을 듣기 위한 과도한 위선을 줄여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맞춰 마음을 고쳐 먹는 것도 필요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겉으로 사랑할수록 위선이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 내면의 갈등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시골의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구원받을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계속 순종하며 따르는 것은 이 믿음이라기 보다는 의지입니다.
믿음은 늘 있는 것이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것은 매순간 의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책망하기보다 의지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외식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심판’과 ‘아래’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외식은 심판 아래에 있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나의 진실보다 더 나를 포장하는 것, 허세, 위선, 거짓, 그런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괴로운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과 언행이 예수님의 교훈에 맞추도록 노력하며 변화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리고 우리가 조작했던 모든 외식은 그 진실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2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사람이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합니다.
지난 주 교총회장에 당선 된 사람이 일주일만에 사퇴했습니다.
여고교사 시절 제자에게 보냈던 부적절한 메시지가 들통난 것입니다.
허점이 있으면 나오지나 말면 좋았을 것을 요즘 비밀이 어디 있다고 높은 자리를 탐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진실은 없습니다.
삶의 모든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발설한다는 것이죠.
설사 무덤까지 가져갔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큰 악의 없이 했던 뒷담화라 해도 상대에게 밝혀지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자꾸 남의 말을 하다 보면 나만 모르지 사람들 사이에는 소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사람이 늘 외식하고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걸 이해는 해야 합니다.
거짓말도 하고, 뒤에서 나를 안 좋게 말한다는 걸 알게 된다 해도 너무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나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외식하는 자들의 위선만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덮고 싶어 했던 주님의 복음도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실함도 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파해서 드러나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는 것도 사실 겉과 속이 다른 일종의 외식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복음 전파를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 외식의 문제를 두려움으로 이어가십니다.
사람들이 왜 속 다르고 겉 다르게 살아갑니까?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1) 바리새인들이 점점 외식에 빠진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 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종교 권력자들이 사실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비난이 두려워 정정당당히 체포하지 못한 것이죠.
가룟유다와의 은밀한 거래로 야밤에 겟세마네로 체포조를 보내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권력을 준 국민들의 신뢰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게 무언가 즐거움과 혜택을 주는 것은 거의 두려움의 대상도 됩니다.
그게 떠나면 내가 누리던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겁이 나는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막연히 스치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결국 그것이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은 유대교 사회에서 받을 박해가 두려울 것입니다.
두려움은 안전에 대한 본능에서도 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근본적인 처방을 주십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두려움은 육신의 고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죽는 것은 육체의 생명 뿐이라는 것이죠.
세상에선 때로 우리가 돈의 권세, 사람의 권세 아래 굴복하며 살지만 그 권세는 살아있는 동안일 뿐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권세가 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으시죠?
그런데 5절을 잘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놓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두려운 것은 죽음 뒤에 영원한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겁박하는 모든 종류의 환난을 놀랍게 이겨내게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여 지옥에 던져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럴만한 권세도 없는 분이라면 우리가 뭘 믿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경외하는 만큼 우리가 더 안전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무너진 공권력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나 미래나 그 어떤 문제도 최악의 경우 죽음 이후까지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런 인식들이 분명치 않으면 살면서 점점 더 두려운 것들이 많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조금만 내 안전에 불안을 느끼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경쇠약에 걸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어떻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경외할수록 삶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친밀하고 자상한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6절,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신이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죠.
우리 어릴 때 포장마차에 참새구이라고 써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에게도 참새는 흔한 요리 재료였습니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반찬거리로 사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저렴했습니다.
배고프던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참새를 많이 잡으러 다녔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다 잡히지 않도록 개체를 보호하셨기에 멸종되지 않고 계속 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그렇게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참새의 개체수도 계산하시는 데 하물며 성도의 고난이나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이 모르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보시는 세상의 모든 참새들을 다 모아 놓아도 우리가 더 귀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은 우리 신상에 대해 모르시는 게 없으십니다.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시다는 것은 어머어마한 관심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두려움은 내가 나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이잖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신변을 책임지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대우하십니다.
저도 지나온 날을 생각해 보면 가난하게 살던 어린 시절도 있었고, 청년시절 큰 어려움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엔 하나님이 정말 나를 귀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그런 생각이 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편하게 잘 살게 해 주셔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궁핍하고 때로 괴롭고 앞날이 막막할 때도 있었지만 사랑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것 같다면 여기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변치 않을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말씀 그대로 믿으면 하나님이 곁에 계심을 점점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신앙의 삶은 매일 ‘나는 죄인입니다’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선적이고 가식적으로 행동한다고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죄이기에 그 결과가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전에 악기의 현을 정확한 음정으로 매번 조율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주님 말씀에 조율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남에게 더 잘 보여지고, 그 결과 내가 얻을 이익 때문입니다.
대신 두려움의 대상은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크게 경외하고, 내 영혼과 신상을 항상 살피시는 사랑을 믿고, 담대히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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