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들의 구원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성령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복음을 가르치실 때에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 삭개오가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재미난 이야기는 주일학교에서 인기 있는 설교죠.
그래서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약간 우스꽝스럽게 인식된 면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의 기록을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번 보고 단숨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말씀에서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는지와 구원의 증거들은 무엇인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삭개오라는 세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1.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에 대해서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여리고로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많은 예배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가고 있을 때죠.
올 유월절 초관심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발견한 사람들은 에워싸 말씀을 들으며 걸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행들은 예루살렘에서 삼십 킬로 정도 떨어진 여리고에 도착합니다.
순례자들이 모든 도시를 다 들르지는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는 숙박과 식비가 더 비쌌겠죠.
여행자들은 도시 밖 작은 마을에서 값싸게 요기를 하고 노숙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볼일이라도 있으신 듯 성 안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이 여리고성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원문에는 이 구절 앞에 ‘그런데, 보라’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 해석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라’라는 것은 기대했던 일이 벌어졌을 때 누가가 종종 사용하던 습관적인 어투입니다.
예수님이 목적을 갖고 여리고 성에 들어가셨다는 것이죠.
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찾아가셨을까요?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직업은 세리장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사람은 여자는 창기이고, 남자는 세리입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극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로마제국의 세금이 악명 높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도시와 도로, 극장, 원형경기장 같은 웅장한 건물들을 건축하는데 엄청난 돈을 썼습니다.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죠.
그런데 자국민들에게 걷는 세금은 몇 가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로마인들의 복지를 위한 돈은 전부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입니다.
로마는 속주국마다 납부해야 할 거액의 세금을 할당했습니다.
그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에게 월급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세금을 얼마를 걷든지 세리의 재량에 맡겼습니다.
정해진 납입금만 보내면 남은 것이 세리의 급료였습니다.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상, 허가 된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어떤 세리는 마차의 네 바퀴에도 세금을 물렸다고 합니다.
로마의 살인적인 세금 착취에 대한 원망은 눈앞에서 세금을 걷는 세리들에게 향했던 것이죠.
세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등쳐 먹는 최악의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들을 관리하고 로마당국의 세금 업무를 총괄하는 세리장입니다.
삭개오가 부자가 된 걸 보면 꽤나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았을 것입니다.
젊을 때 세리로 시작해 나이가 들어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었겠죠.
예수님 당시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세관이 세 군데였는데, 여리고, 가버나움, 가이사랴 세관입니다.
세상적으로만 보면 삭개오는 어쨌든 성공한 사람인 것이죠.
이상이 삭개오의 이력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겉으로 드러난 이력이 전부는 아니죠.
우리 일생이 이력서로 다 기록될 수는 없잖아요?
인생의 이력서를 만들어 낸 것은 기록되지 않은 인생의 내력들입니다.
삭개오에겐 어떤 인생의 내력이 있을까요?
세리가 기피하는 직업이라지만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머리가 좋고 수완도 좋아야겠죠.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면 로마당국에서 인정받을 만큼 머리도 좋고, 민첩하고,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절대로 세리가 되지는 않았겠죠.
머리 좋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를 잘 만난 사람들보다 앞서기 힘들잖아요?
삭개오는 키도 유달리 작았습니다.
전승에는 거의 난장이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외모도 불리하게 태어난 것이죠.
경작할 땅도 없고, 집에 가축 한 마리 없고, 체격 조건도 나쁘다면 먹고 살 방법은 세리 직업밖에 더 있겠습니까?
키 작고 늙수그레한 삭개오에게서 왠지 애환이 가득 찬 인생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지금 이력서도 삭개오같이 만만찮은 인생 내력들 속에서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한 결과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력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력을 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감추고 싶었던 내력들, 좌절했던 인생의 아픔까지 주님께서 만지시고 함께 구원됩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혹독하고 아팠던 과거와도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삭개오는 이력도 내력도 해결되지 않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비난받는 부자 세리, 죄인, 매국노, 창기와 같은 자, 그런 꼬리표를 달고 우울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의 이력만 보지 않고 내력까지 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의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아프고 힘들었던 내력이 현재의 그 사람을 만든 것이잖아요?그렇게 가족과 이웃을 측은히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예수님께 대한 삭개오의 간절함에 대해서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문으로 듣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어 인파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 주변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 키작은 삭개오는 주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앞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삭개오가 얼마나 황급히 행동하고 있는지가 느껴지죠.
1)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입니다.
나이 든 삭개오가 그렇게 까지 한 것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일까요?
여리고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죄인 세리장이 메시야를 보기 위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다는 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제가 여리고를 방문했을 때 삭개오가 올라갔었다는 표지판이 붙은 나무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만만히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다랗게 자라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지만, 정말 그 나무가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인지는 누가 알겠습니까?
삭개오가 단지 호기심에 예수님을 구경하러 그 나무 위로 올라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결은 다르지만 나름 여리고의 유명인사입니다.
부자들을 만나면 그들만이 풍기는 아우라가 있죠.
전에 보니 유명 여배우들이 동네를 걷다가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신세계그룹 정용진씨를 보고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자기들도 연예인인데, 재벌 처음 본다고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부자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삭개오가 정말 부자였다는 것이죠.
남이 뭐라든 적어도 부자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웬만하면 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간절함입니다.
간절함 속에는 이미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와 예수님이 어떤 비밀스런 관계인지를 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이성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죠.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그 짧은 시간에 삭개오가 목숨처럼 모은 재산을 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합니까?
말이 안되죠.
바로 앞장에 그 유명한 부자청년이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며 주님을 떠난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돈을 포기한다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삭개오는 왜일까요?
2) 삭개오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삭개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세례요한이 곧 메시야가 오신다고 선언하며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경고했었죠.
악인들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세금제도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들의 혈세를 착복한 세리들을 다 잡아들일지도 모르잖아요?
더 괴로운 사실은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입니다.
세리들은 유대교 회당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자기가 메시야의 나라에서 구원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인 것이죠.
그렇다고 어떻게 심판을 가만히 받아들이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삭개오에게도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그런 마음이 있어서 교회로 나온 것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죽음 뒤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걸까.
이런 마음이 없다면 왜 교회에 나왔겠습니까?
단지 평안이나 얻으려면 집에서 마음수련을 하지, 믿느라고 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겠습니까?
3)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해 간절했던 것은 또 다른 소문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간절함 속에는 희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또 뭐가 있었습니까?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말이 따라 다녔잖아요?
주님의 제자 중엔 이미 세리였던 마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 같은 인생도 용납해 줄 수 있는 분일까?
내 아픈 인생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렇다면 내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서 그런 간절함이 느껴지잖아요?
하나님은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항상 와 계시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어떤 은혜의 경험을 했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가장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매달렸던 때일 것입니다.
예배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누구에게 임하셨습니까?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했던 백이십 명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에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열 여섯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오기 위해 일과 생활을 조정하고, 오랫동안 여비를 모아서 찾아왔던 교포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려면 주님과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매일 주님을 만나려는 간절함과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간절함이 없이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던 조던 피터슨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강연을 들어보면 삶에 대한 절실함과 진지함에 숙연해집니다.
내가 너무 나태하고 안일하게 살아간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분이 한 오,륙년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피터슨교수는 세상엔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하고, 존재하는 것 같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산다는 좀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암에 걸려 투병하는 큰 시련의 과정에서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바로 올린 영상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같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걸 보았습니다.
최근 영상을 보니 인생에 대한 그 진지함이 그대로 신앙으로 옮겨갔더군요.
이전엔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사람 같고 웃음이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얼굴엔 전에 없던 천진하고 환한 웃음이 가끔씩 보이는게 신기했습니다.
고뇌의 구도자가 되어 하나님을 찾던 피터슨 교수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고 꾸준히 찾는다면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영접과 변화에 대해서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5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고 계셨고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당연하죠.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당사자인 삭개오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저분이 벌써 내 소문을 듣고 내 이름을 아셨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야’, 라고 부르실 때 눈빛과 그 음성에서 이미 삭개오는 답을 얻은 것입니다.
‘이분이 메시야구나,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시는구나’
사실 예수님이 네 집에 유숙하겠다고 하시는 게 얼마나 황당 제안입니까?
일행을 열둘이나 거느리고 오늘밤 묵어가야겠다는 거잖아요?
싫다면 어떻게 하시게요?
그런데 삭개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과 삭개오만의 기쁨이 서로 오가는 게 저는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신다는 계시록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오늘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삭개오와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삭개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사람들이 이래서 은혜 안 받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켜 뭔가 내놓게 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삭개오가 이 마음을 오래 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여리고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베다니 건너편 요단강에서 가깝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앞에 보면 세리들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고 합니다.
3장12절,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적정한 세금만 징수하라는 것이죠.
그 지방의 정보통인 삭개오가 이렇게 세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갑자기 백팔십도 달라지는 일은 없죠.
얼마 전 트럼프 대선 후보가 유세 중에 총탄이 귀를 스친 사건이 있었잖아요?
다음날 트럼프가 너무 달라져서 뉴스에 나올 정도였습니다.
만면의 온화한 미소와 느리고 친절한 말투는 평소 트럼프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서보니 사람이 변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해리스부통령이 대선 주자로 나서자 다시 막말하고 호통치는 트럼프로 순식간에 돌아갔더군요.
사람이 언행이 잠시 달라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 재산을 한순간에 내놓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한 역할이 무엇입니까?
죄를 회개하고 메시야의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시키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세례요한의 회개 촉구에서 재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믿게 되기까지에는 삭개오와 같은 여러 과정들이 다 포함됩니다.
인생에 대한 불만족,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양심을 책망하는 말씀.
이런 것들을 통해 성령께서 계속 우리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는 것이죠.
구원에 순식간에 뒤바뀌는 마술 같은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삭개오를 보시고 이렇게 큰 칭찬과 위로를 해 주십니다.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늘 죄인이라고 불리우던 삭개오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요?
삭개오가 재산을 환원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게 아닙니다.
삭개오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그의 변화를 통해 증명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명확해질수록 함께 분명해지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지분이 내 인생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죠.
탤런트 신애0씨와 차인0씨가 참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부부입니다.
신애0씨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때 연예계에서 명성도 얻었고 좋은 남편 만나서 아들도 낳고 부족한 게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신앙생활도 정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뭔가 마음에 공허하다, 허전하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 위촉을 받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기아난민이나 최빈국 어린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홍보대사를 맡고 눈으로 그 비참한 아이들의 현실을 처음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로 두 딸도 입양하고 기부와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모든 게 채워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잘 섬겨도, 이웃을 섬겨야 할 부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채워지지 않는 공백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하나님을 잃었던 우리를 찾아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까?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잃은 자를 찾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데 간절하지 말고 예수님께 간절함을 갖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삭개오의 재산 환원은 평생 좇았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발견하고 천국을 발견한다면 똑같습니다.
이 땅에서 필요에 의해 여전히 돈을 중시하고 살아간다 해도, 그것이 천국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는 계산은 이미 끝났다고 믿습니다.
비록 삭개오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해도 삶의 방향성은 계속 천국의 가치관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죠.
천국의 가치관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축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노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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