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정부가 연금법 개정안을 발표한다고 합니다.
연금법, 너무나 골치가 아파서 폭탄돌리기가 되었죠.
누구든 자기가 낸 것보다 더 받고 싶겠지만, 연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돈나무도 아니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연금 수급이 임박한 세대에서 납부액을 대폭 늘리고, 젊은 세대에게는 적게 걷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습니다.
뾰족한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세금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돈을 내고 돌려받는 연금도 예민한데, 피 같은 돈을 바치기만 하는 세금문제는 더 예민하죠.
로마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로마에 바치는 세금을 굴욕으로 여겼습니다.
조폭들이 와서 자릿세 뜯어갈 때 느끼는 기분 비슷했겠죠.
한때 유대인들이 40%에 가까운 세금을 로마에 납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난 주 광복절이었습니다.
일본제국이 우리를 수탈했던 걸 생각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조세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 넣으려는 흉계로 시작된 세금 논쟁은 예수님의 기이한 답변으로 인해 질문한 자들의 침묵으로 종료됩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이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의 두 가지 결말을 엄정하게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볼 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앞에 있는 내용을 곁들여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십자가 대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주님의 여행은 드디어 종착지인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죠.
예수님과 유대종교 지도자들과의 대립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도 매일 성전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문제로 대제사장,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충돌이 또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본문 앞에서 포도원 비유를 통해 결국 이들이 받을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먼 나라에 가며 자기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빌려줍니다.
세월이 지나 주인은 소출의 일부를 가져오도록 여러 번 종을 보냅니다.
그러나 악한 농부들은 번번히 주인이 보낸 종을 때려서 돌려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공경하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서 죽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이 비유가 무엇을 말씀하는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알아 들었습니다.
19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그래서 이를 갈며 주님을 함정에 몰아넣을 묘수를 짜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세금 논쟁입니다.
20절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아예 로마총독에게 넘겨주는 계책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주님을 죽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들이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세력이고 헤롯당은 정치세력입니다.
이 둘을 보냈다는 것은 종교문제와 정치문제로 올가미를 씌우겠다는 것이죠.
이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위장하고 입을 엽니다.
21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그러니 정확히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22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이들은 이 질문을 던진 뒤 ‘이제는 됐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꼼짝없이 덫에 걸려들었다고 확신했습니다.
2.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시면 곧바로 총독에게 보고되고 십자가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로마제국의 세금 착취에 분노하고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항거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과거 갈릴리지방에서 유다라는 사람이 그렇게 반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로마군이 와서 진압하고 십자가 이천 개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가 연상되죠.
세금 납부를 긍정해도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가르치셨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라고 하는 건 모순이죠.
예수님이 가져다 줄 독립된 나라를 기대하던 사람들이 분노할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종교지도자들에겐 손해될 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는 간교한 질문인 것이죠.
2) 그들의 질문을 받은 주님은 당시 시중에서 사용되던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24절,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이사는 로마황제의 호칭입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 앞면에는 황제의 얼굴이 있었고 신의 아들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시자 그들이 그 대답을 놀랍게 여기고 침묵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기에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참 신비롭습니다.
굳이 꾸밀 필요가 없으시니 군더더기가 없이 명징하면서도, 본뜻을 헤아리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죠.
3. 그래도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기에 이해되는 만큼 예수님의 대답하신 뜻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언뜻 생각해도 이 말씀은 대적자들의 허를 찌르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명답이 분명합니다.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하셨으니 대적자들이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죠.
그런데, 만일 그것으로 끝났다면 유대인들의 비난을 피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덧붙이심으로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자존심을 세워주는 절묘한 효과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가진 뉘앙스를 말로 사실 설명하기는 너무 부족합니다.
이 말씀은 세속적인 것과 신앙을 분리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 때는 세상 사람처럼 살고 교회에서는 신앙인으로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통쾌하게 한 방 먹이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계속 살펴보는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서잖아요?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비적인 교제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묵상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잘 배우지 않으면 믿긴 해도, 늘 알 수 없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상대가 안되는 하수들을 멋지게 한방 먹이시고 함정을 빠져나가신 게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그랬겠죠.
‘너희들은 상대가 안돼’
예수님께는 그럴 의도도 없으시고, 주님의 성품에 우리 같은 그런 저속한 면은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엔 같은 기준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씀하시고, 겉으로 드러난 게 아니라 본질을 다루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답변이 그런 것입니다.
물론 함정을 벗어날 수 있는 대답이지만 단지 그걸 위한 묘수를 내신 것은 아닙니다.
2)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주님을 대적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유독 주님을 적대하는 자들은 지금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 불만이 없는 자들입니다.
헤롯당 같은 정치인들은 로마의 비호를 받으며 이권을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을사오적에 들어가는 이완용을 아실 것입니다.
이완용이 일제에 협조하고 받은 돈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많게는 오백억 원 정도에 해당 된다고 합니다.
이완용이 죽기 전 한국인 부자 2위였고 현금 보유액이 가장 많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헤롯당은 로마제국에 협력해서 정권을 잡고 그런 금전적인 이득을 얻고 있는 정치 세력들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시는 게 절대 달갑지 않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제국에 맞서 신앙을 보수한다는 이유로 민족의 존경과 종교 권력을 얻던 사람들입니다.
종교 권력이 정치 권력 못지 않습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적 가이사 밑에서 역시 얻는 게 있는 사람들인 것이죠.
예수님이 그게 틀렸다니까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괴로워합니까?
자기들이 득을 보는 가이사의 나라가 가고 메시야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공경할지 몰라도 가이사 밑에서 누리는 혜택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걸 뺏으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삼십만 명 구독자를 가진 유명 유튜버 황태0씨가 그런 간증을 하더군요.
이 분은 신학공부도 했고 여러 가지 사업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고, 아내와 아이들과의 신앙적인 일상을 영상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막내아들이 집에서 갑자기 심정지가 오고 병원에 데려갔지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자기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 이거라고 합니다.
하나님, 지금 나하고 장난하십니까?
그렇게 신실한 것 같은 성도들의 마음에도 그런 게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단지 자기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없어져야 할 방해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지만 이제 그들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실 때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지금 막다른 골목까지 예수님을 몰고 온 그들에게 내려진 주님의 선고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하나님을 섬기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은밀히 세상 임금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결국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하는 이 세상 임금 마귀와 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주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겠습니까?
내가 가이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인가?
주님의 말씀이 예리한 칼날처럼 서늘하게 그들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을 책잡지 못하고 침묵했던 것이죠.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4.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먼저 내가 세상에 속했는지 하나님께 속했는지 서 있는 곳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7장에서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16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주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계속,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면 어떻게 우리를 주님께 바치라는 것일까요?
가이사의 돈은 가이사에게 분명히 세금으로 갖다 바쳤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냐는 것이죠.
우리가 항상 뇌에 새기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독립적으로 살아도 안 되고, 나만을 위해 살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정교한 명품 시계가 오랫동안 정확하게 움직인다 해도 사람이 없이는 언젠가 멈춥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들이라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를 위해 살지만 하나님이 정해주신 호흡이 멈추는 순간 창조주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것을 미리 아는 우리는 나의 시간을 하나님께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피조물은 제일 행복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후회 없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죠.
용산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 유연0원장이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이분이 젊을 때 무병을 치료받는 큰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기도 중에 가장 힘들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감동을 받습니다.
누구보다 제일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노숙자임을 깨달은 날, 수중에 있는 단돈 만 원을 들고 무작정 용산역을 찾아갑니다.
영하 16도 날씨에 동상으로 발이 썩어가는 한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부축해서 지하도로 모시고 그 만 원으로 밥을 사드립니다.
이렇게 시작한 노숙자 무료급식 사역이 현재 28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매일 850명에게 무료 급식을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유원장의 것으로, 유원장 혼자의 힘으로 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필요한 것들을 붙여 주십니다.
한번은 유원장이 노숙인들 삼천명을 초대해 복음을 전하는 큰 행사를 기획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독교 방송국에서 전화가 옵니다.
전도용 라디오 삼천 대를 제작했는데 혹시 쓸 데가 있냐는 전화였습니다.
그 라디오 삼천 대를 그날 삼천 명의 노숙자들에게 나눠 주게 된 것이죠.
그렇게 용산역 지하도에 찬양이 울리고 설교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방송을 듣다 하나님을 믿고 노숙을 청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한번은 한 중소기업 사장과 직원 열 명이 급식소를 찾아 와 봉사를 하고 오백만 원을 기부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가 IMF때 여기서 6개월 밥을 얻어 먹었다는 거예요.
죽고 싶었는데 급식소에서 드린 예배에서 하나님을 믿고 지금은 재기해서 메모리폼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원장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단 돈 만원으로 한 사람을 섬겼더니, 지금은 850명에게 매일 급식하며 복음을 전하는 큰 사역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일을 우리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못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가장 바닥에 있을 때,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때, 방과 후에 시청각실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도 제일 많이 했습니다.
내 문제만 기도한 게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교회 가족들을 위해서, 전도대상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 바치는 삶은 지금 내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그걸 조금씩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어떤 처지에서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황태0씨를 세바시에서 강사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아이를 떠나 보낸지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어떻게 거기 나가서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자기의 강연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같아서 승낙을 합니다.
울음을 삼켜가며 아이의 죽음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들은 병원에 데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나, 주사 한 번이면 살아날 수 있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살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아들이 세상에 왔다 일찍 떠난 이유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인 내가 반드시 우리 아들의 사명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날 강연에 많은 사람이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강연을 듣고 컴패션 후원자들이 천 명이 나왔습니다.
황태환씨가 후원하던 백여 명의 아이들과 합치면 천백 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이죠.
자식을 떠나보낸 그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에 눈물이 있지만 잘 이겨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를 잃고 너무 힘든 시간들을 지냈기에 얼마 전 정신과 상담을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단 결과 놀랍게도 너무나 정상이라는 거예요.
아픈 상처만큼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신 것이죠.
하늘로 떠난 둘째 대신에 하나님은 곧 셋째 아들을 주셨고, 이번에 넷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알리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은 조세 논쟁이 아니라 구원 논쟁입니다.
우리는 세상 임금인 마귀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뒤돌아 보지 말고 백프로 내게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힘든 데 미안해서 어쩌니’, 그러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이 때로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잠시 시름을 잊게도 하지만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인생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마약중독자들처럼 파리하고 나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쾌락도, 자랑도 다 내게서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살았던 날들을 결산하는 일만 남을 것입니다.
가수 김수0씨가 40살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술 마시며 음악을 하는 것은 조금 가짜라는 말도 했습니다.
술을 먹으면 손에 힘이 없어서 기타 연주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게 다르다는 거예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이만큼 최선을 다하는 걸 보며 또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점점 더 하나님께 진심과 최선을 다하길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씩 더 이렇게 예배와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가까워지시길 권합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세상 임금의 나라에 속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잘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의 발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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