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17장11절-19절 (아홉은 어디에)

남수연 2024. 8. 13. 16:18

https://youtu.be/qiGwI19WH2w

 

사람들은 인생을 바다에 빗대어 말합니다.

바다만큼 인생 파도가 많아서 그럴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서핑 경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선수들에게는 좋은 파도를 만나는 게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관건이라고 합니다.

파도를 못 만나면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죠.

이번에 결승 장면을 보니, 기다리던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자 선수가 순식간에 계란말이처럼 말려가는 파도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참 뒤에 말려가던 파도 터널 속에서 보드를 탄 선수가 물을 흩뿌리며 유유히 나타납니다.

파도 터널에서 오래 머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우승 선수는 터널이 긴 인생 최고의 파도를 만난 것이죠.

경기 해설자가 아직 바다에 떠서 파도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선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리면 좋은 파도가 올 것입니다.’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 해설을 듣는 순간, 우리가 아는 두려운 파도의 반전에 살짝 웃음이 났습니다.

최고의 파도라니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인생에서 가장 높은 파도를 만났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파도가 맞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인생 최악의 파도가 덮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던 환자들은 모두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파도를 최고의 기회로 만든 사람은 그 중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나게 된 배경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까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죠.

그 노정에서 예수님은 유대 땅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지난 주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 구원하셨죠.

오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시는 중입니다.

이곳에는 열 명의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소록도에 나환자들이 모여 살았듯이, 마을에서 떨어진 외곽에 병자 열 명이 모여 살았던 것이죠.

요즘은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구약성경에서부터 나오는 질병입니다.

피부가 변색되고, 신경이 손상되고, 안구가 튀어 나오고, 코가 무너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어느 질병보다 흉측한 모습 때문에 사회에서 차별을 심하게 받는 병이죠.

나병은 자연치유가 되지 않는 병입니다.

한센이라는 의사가 1874년이 돼서야 나병의 원인인 나균을 발견합니다.

이후 치료약이 만들어지기까지 한센병 환자들은 흉한 외모를 갖고 살다 죽어야 했습니다.

성경 속 나병환자들도 율법에 의해 마을에서 멀리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끔찍한 나병이 공동체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사람이 병이 나면 사랑하는 가족들의 위로와 돌봄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나병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죠.

나병은 자식과도 생이별해야 하는 애한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영혼의 상태를 나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나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여러번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환자들은 가족 중 누군가 전해 준 이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그렇지만 나병환자들은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죠.

그 몸으로 어디로 예수님을 찾아 다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간절한 바램을 아시는 둣 오늘 이 마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영혼의 나병에 걸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똑같은 것이죠.

 

2. 이 나병환자들의 믿음과 치유의 과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병자들의 믿음이 미스테리죠.

분명히 믿어서 병은 나았는데, 결국 구원은 받지 못하잖아요?

1) 이 병자들은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나아만장군의 나병을 고쳐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청년 때만 해도 병원 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보다 치료하지 못하는 병들도 훨씬 많았죠.

그래서 병을 치료한다는 기도원이나 집회에는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단지 병 고치는 은사자를 믿고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간혹 낫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나님의 치료 외에는 방법이 없던 사람들의 절박함과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던 시절입니다.

오늘 나병환자들의 완치도 그들의 절박함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와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료에 개입하십니다.

내 몸이 아픈 것만큼 서글프고 고통스러운게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은 의술이 더 좋아져서 치병은 보통 병원 치료를 통해 합니다.

지금이라면 예수님이 굳이 기적으로 나병을 치유해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 환자들도 병원을 먼저 찾지 하나님의 기적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약과 수술로 모든 질병이 다 치료되지는 않죠.

현대의 성도들은 의술과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동시에 하면서 질병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의술에만 의존하고 하나님이 해 주실 부분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손해입니다.

요즘은 무병장수가 아니라 유병장수의 시대라고 하죠.

병이 없는 게 아니라 병을 잘 다스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얻게 된 여러 질환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스스로도 건강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합니다.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왜 병을 고쳐 달라고 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을까요?

너무나 큰 자비를 구할 때 그걸 당당히 요구할 사람은 없습니다.

응답은 전적으로 자비를 베풀 사람의 뜻에 달린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주기만을 간청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거기에 비해 내 믿음이 너무 보잘 것 없고 한계가 드러날 때 우리의 기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감사하게도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러 나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신 일이 없으십니다.

나병환자들은 오늘 일생에 한번 긍휼을 얻을 기회를 잡고 간절히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병환자들과 달리 매일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매일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모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도 안 나올 때,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는 할 수 있잖아요?

주님은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 속에 담긴 모든 의미를 아십니다.

죄를 이기지 못할 때, 불안해질 때, 화가 날 때, 걱정이 몰려올 때,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기도할 수는 있잖아요?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병자들의 절박한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고 절박하다면 응답이 가까웠다고 저는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납득할만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죠.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이 말씀은 당연히 병을 치료해 주시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즉시 치료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믿고 가면 치유가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실 때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치료의 사례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치료만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받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병자들은 왜 즉시 고쳐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이 병자들에게도 믿음을 확증할 시험대를 한 계단 놓으신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완치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지금의 모습으로 마을 안에 들어가 제사장을 만난다는 건 큰일 날 일이죠.

그 몸 상태로 제사장에게 갔다는 말은 병자들이 한번 더 믿음의 용기를 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 주님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 결국 떠나갈 사람들이잖아요?

그 중 한 사람만 그 믿음의 계단을 밟으며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죠.

예수님은 당연히 우리 믿음이 한 계단씩 더 올라갈 수 있도록 삶에서 세심한 시험문제를 주십니다.

우리 앞에 장애가 있을 때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이 올라서도록 놓으신 계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백가지 문제가 있어도 공통적인 정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환경도, 사람도, 나 자신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신 문제의 답은 예수님만 갖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운 시험일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며 답을 구한다면 반드시 문제를 풀고 우리 믿음이 더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과연 이들이 몸을 돌이켜 제사장에게로 가던 중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나병환자들의 놀람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끝난 인생인 줄 알았는데, 이전처럼 돌아온 손과 얼굴을 만지며 꿈이 아니길 바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반드시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걸 아는 성도들은 반드시 이런 기쁨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열 명 중 한 사람이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 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늘 말씀은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 돌아옴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열 명 중에 속했다면 계속 가던 길을 가시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처럼 돌아오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으니 나는 계속 가겠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정답은 돌아왔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홉 명이 말씀대로 끝까지 순종하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갔다면 주님이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제사장의 확인을 받고 꿈꾸던 일상으로 복귀하라시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는 것이 주님이 내 주신 미션은 아닙니다.

만일 그런 큰 병에서 치유 받았다면 일상으로의 복귀보다 예수님께 먼저 감사하러 오는 게 맞는 것이죠.

1) 그런데 감격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가는 걸 보고도 나머지 아홉은 왜 움직이지 않은 것일까요?

사마리아인이 같이 가서 예수님께 감사하자는 말을 분명히 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다가 갑자기 혼자만 뒤돌아 주님께 왔을리는 없잖아요?

먼저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당시 논란이 있던 예수님보다 유대교 율법에 속한 유대인 사회를 선택한 것입니다.

병은 나았지만 예수님과는 더 깊이 엮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의 제자가 될지언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장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교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죠.

신자들 중에 갈등을 피하려고 가족들의 종교에 동조하는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요즘 무속인들이 방송에 너무 많이 나와서 보기에 불편하죠.

그런데 기독교신자인 연예인들이 그 방송에 묻어서 가는 게 더 불편합니다.

또 아홉 명이 주님께 오지 않은 데는 사람의 본성적인 면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큰 기도제목이 해결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죠.

그런데 묘하게도 이 일이 우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가 해결됐으니 달라진 상황에 더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사람은 형편이 조금만 안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먹고 살 만해진 오늘날엔 많은 성도들이 삶을 즐기느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잖아요?

아홉 명의 환자들도 처음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기적같이 닥친 엄청난 선물에 곧 가려졌던 것이죠.

얼마나 희망에 벅차올랐겠어요?

이제 가족을 만나야지, 묵혀 놓았던 땅을 갈고 밀을 심어서 가을에 수확해야지, 친척집에 맡겨 놓았던 양을 찾아오고 집도 고쳐야지.

얼른 제사장에게 성해진 몸을 보이고 그런 삶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골의사 있잖아요?

지난 주에 올라온 영상을 보니 덥고 짜증나는 날씨 속에서 이런 걸 해 봤다고 하며 영상을 찍어 올렸더군요.

시골의사에게는 아내와 초등학생 두 딸이 있습니다.

하루를 보내고 식탁에 모인 네 명의 가족이 각자 감사한 일을 열 개씩 써 보자고 합니다.

감사 열 가지를 다 쓴 뒤 옆으로 돌려가며 서로 읽어보는 것이죠.

딸들의 감사 제목을 읽는 시골의사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아내도 눈물을 흘립니다.

자식들의 마음이 손글씨로 전해질 때 마음이 찡해지지 않을 부모는 없죠.

아내의 감사제목을 읽는 남편 시골의사는 아내가 쓴 게 가식적이라고 놀리며 깔깔 웃어댑니다.

얼마나 재밌어하며 웃는지 그 얼굴을 보고 저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 감사할 때 그때가 제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감사할 것 많잖아요?

얼마나 많았던 그 눈물의 기도제목들이 응답되고 편안해졌습니까?

사실 더 감사해야 할 것은 기도해 본 적도 없지만 매일 누리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오늘도 편안히 숨쉬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지만 산소호흡기 없이 숨쉬고 있잖아요?

우리 몸에 병들고 나서야 너무 귀한 것을 당연히 누리며 살았다는 걸 알게 되죠.

불만스러운 환경 속에 있고, 혹시 많은 것을 잃었다 해도 아직도 우리에겐 남은 것이 더 많잖아요?

우리가 받은 구원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매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다는 뜻입니다.

마음만 갖고 있으면 감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의 감사가 예배로, 경건생활로, 봉사로, 예물로, 순종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될 수 있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사마리아인이 주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을 의미있게 보아야 합니다.

처음엔 이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죠.

소경 바디매오를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누가복음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 하거늘

선지자의 예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바로 예언되었던 메시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는 고백입니다.

불치병인 나병이 나은 순간 사마리아인은 비로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데는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죄인의 회심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하신 역할을 감추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면 되는 것이죠.

다른 아홉 명이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예수님이 꽤 실망하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이 감사하다는 치하를 못 받으신 게 섭섭해서 그러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병이 낫고 어려운 환경이 좋아지는 것이 최고가 아닙니다.

섬길 하나님을 만나는 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병이 나았어도 또 다른 병이 올 것이잖아요?

병이 재발하면 어쩌나 두려울 거잖아요?

한가지 기도를 응답받으면 또 다른 문제가 올 거잖아요?

그때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디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시는데요.

그들은 아마도 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께 나갈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로 택하신 우리에게 크고 작은 문제들을 허용하시는 최종 목적은 결국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주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 본문 앞에 있는 내용에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군가는 이 말씀에 토를 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는데 주인을 그렇게 사랑하며 완전히 복종하는 종이 복되다는 게 벅차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그런 종이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이야 우리가 얼마나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까?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실 만큼 섬기셨고 지금도 나를 위해 여전히 일하고 도와주시는 분은 예수님 아니십니까?

그런 주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종이라는 것만으로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도 내 행복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면 좌절하거나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루하루 그냥 기계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면 그게 힘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내 수종을 들어주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수종들고 기쁘게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돌아온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모두가 예수님께 나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만이 인생에서 섬겨야 할 분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필요를 채워주셔서가 아니라, 내가 영원히 섬길 하나님을 만난 것에 감사하며 항상 주님 앞에 엎드려 섬기는 게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매일 예수님을 만날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생의 파도가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꼭 붙든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파도이든 인생의 최고의 파도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