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eY-2uy239UA
지난 주 시청역 참사 소식에 다들 놀라셨을 것입니다.
좋은 날, 즐거웠던 순간, 갑작스런 사고로 생을 멈추게 된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죠.
우리가 늘 다니던 음식점 앞에서 이런 사고가 났기에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불안장애를 외상후증후군이라고 하죠.
그런데 동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불안장애를 갖는 것을 대리외상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인터넷에 떠도는 사고 영상을 본 사람들 중에 대리외상증후군 증상을 겪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사고와 죽음이 많다 보니 저도 길 건널 때 더 사방을 살피게 되더군요.
안전한 곳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사고들과 죽음 앞에서 오늘 말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만을 예고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각 사람 인생의 마지막은 도둑같이 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내 죽음이 곧 올 것을 절대 실감하지 못하죠.
시한부 환자도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지구역사의 마지막날은 징조를 보면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정작 도둑같이 닥치는 것은 개인의 종말인 것이죠.
우리는 당장 숨을 거두는 순간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것은 곧 마지막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도 주의 날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을 오늘 모두가 충만히 받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지막을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야 할지 몇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1. ‘이렇게 되라’고 하십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35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절, 너희는 마치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예수님 당시의 결혼식은 일주일 정도 길게 진행됐습니다.
친족이라면 그 날짜를 다 채우겠지만 아니면 중간에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죠.
비유 속의 주인은 먼 곳에 있는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집에 돌아올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주인을 맞기 위해서 계속 허리에 띠를 띠고 밤에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을 맞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정도까지 종에게 요구한다면 지나친 혹사가 아닙니까?
말씀을 듣던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당시 백성들은 로마의 권력자들, 부자들 밑에서 종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분도 역시 부자들 편이구나.
주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라’는 것 보다는 ‘되라’는 것입니다.
36절, 너희는 마치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비슷한 것 같지만 상당히 다릅니다.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자식들이 늦은 밤까지 안 들어오면 부모는 깨어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 아버지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면 어머니들은 깨어 계셨습니다.
오늘도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게 뻔한데도 먼저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동상이몽이라는 프로를 보았는데,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인 정지0선수와 아내가 나오더군요.
정선수가 도장을 운영하다 보니 항상 밤 늦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밤 11시인가 되었던데, 안 자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늦게 들어온 남편을 위해 낮에 수산시장에서 사온 비싼 킹크랩으로 짠하고 상을 차려내더군요.
귀찮아하는 기색은커녕 행복해 보였습니다.
밤 늦게 들어 올 누군가를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죠.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는 게 부담스럽고 부당하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깨어 기다린다는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가 먼저 되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저절로 주님을 만날 것에 대비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참 복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과연 사랑하는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는 항상 우리의 고민입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삶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연인 사이의 열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친구 간의 깊은 우정도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의지하는 것, 감사하는 것, 잘 섬기고 싶은 마음,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씀대로 지키는 것, 이런 마음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마음 놓고 주님을 사랑해도 좋다는 걸 이렇게 표현하시죠.
37절,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이렇게 하는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자지 않고 기다렸다면 고맙다는 칭찬 한마디면 족하겠죠.
그런데 주인의 식탁에 종들을 앉히고 주인이 손수 수종을 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 뿐이 아니심은 유월절 만찬 식탁에서 주님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잖아요?
충성을 다해야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미심쩍어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그 사랑을 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신할수록 우리의 사랑도 견고해 집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임을 매일 되새기시길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힘든 것을 주님은 이해하십니다.
주님의 이 땅의 일생이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사셨던 것이잖아요?
그러나 주님 앞에 설 날이 도둑같이 올 것이기에 오늘 우리를 권고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깨어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다음은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이유는 사랑하는 대상의 필요를 채우고 섬기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41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이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발로 밟힐 만큼 된 날이잖아요?
베드로가 듣기에 말씀만 듣고 돌아갈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이 먹힐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요즘 이런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부분이 나옵니다.
13장37절,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나 사역자들에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만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냐는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을 기다리되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처럼 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종들을 관리하는 종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성경은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중 하나가 주인과 종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 해도, 예수님 안에서 양자가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신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없고, 내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면야 당연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주심을 믿게 되면 당연히 주님은 주인님이시고 나는 종인 것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면, 세상에서 보던 대로 억압과 착취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고 하시는 것은 주인의 일을 맡겨서 경영하게 하신다는 뜻이 강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하는 데 주종관계라 부끄럽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2) 청지기는 주인의 일이 곧 자기 일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주인의 뜻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42절은 청지기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정확히 가르치십니다.
42절,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우리의 사명이 주님의 것을 맡아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양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입니다.
청지기가 된 성도들은 주님께 받은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 육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구제와 선행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네 재물로 구제해서 천국의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든 청지기로 맡은 것이고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시골의사의 영상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같습니다.
이 분의 동네에 문을 닫은 시골교회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고아원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프면 시골의사의 병원으로 와서 진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보육원 교사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열이 많은 게 예사 감기가 아니라 독감 같았습니다.
그래서 독감 검사를 해 보겠냐고 묻고, 보험 적용이 안되서 비용이 좀 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인솔한 선생님은 검사를 안 하겠다 하면서 약만 처방해 달라고 했습니다.
왜 검사를 안 하냐고 묻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왜 안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재정이 많이 어려운가 보다, 요즘 후원도 잘 안되나 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눈이 이런 아이들을 계속 보고 계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주님의 눈이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과부와 고아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들이 마지막 의지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서 주님의 시선을 거두면 누가 바라 봐 주겠습니까?
사람들이 한강 뷰 아파트를 달라, 대기업에 취업하게 해 달라, 내게도 복을 좀 달라, 그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까?
안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욕심을 채워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서 시골의사가 아주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을 받을 수 있으려면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 곁으로 가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작은 자에게 베풀었던 냉수 한 잔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성도들이 베풀 때 즉시 주님의 관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시골의사가 가끔 집에서 통닭을 시켜 먹다보면 그 보육원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나와 내 자식들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시골의사 구독자가 3만명이 넘어서 저절로 광고 수익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광고수익을 익명으로 보육원에 기부하겠다고 하더군요.
구독자들도 저절로 그 선행에 함께 하게 되는 것이죠.
시골의사는 자기에게 주신 청지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실행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청지기 성도들로 인해 복음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이 땅에 가득하게 전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내 삶도 받은 주님의 것을 나누어주는 청지기로 살아가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매맞은 종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주인이 맡겨 준 청지기의 일을 충실히 하기는커녕 자기 지위를 이용해 맡겨 주신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했습니다.
이 악한 종이 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했겠습니까?
1) 주인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에 남의 것을 오래 맡아 있으면 제 것인 듯 착각하는 게 있죠.
빚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돈이 다 자기 돈 같다고 하잖아요?
사람의 욕심은 남의 것조차도 돌려주려면 내 것처럼 아깝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번 돈을 다 매니저에게 맡겼더니 매니저가 결국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묘하게 변합니다.
오늘 악한 종이 때에 맞춰 하인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괴롭히고, 자기만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지냅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많이 보아오던 모습이죠.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뭐가 있습니까?
돈이 더 많다고, 더 지식이 많다고, 더 믿음이 좋다고 그것으로 남을 때리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또 이 악한 종이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오기 직전에 청지기 업무를 하면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죠.
이 종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서부터 경고했듯이 주인이 갑자기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사실을 종이 몰랐습니다.
사람 마음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돌이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쉬려고 교회를 떠났는데 영원히 못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하루 경건 생활을 미룬 것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1도 없는 세속적인 신자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영적 수면상태에 빠집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종의 죄를 신실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믿음에 성실하지 못한 것이 결국 악한 종의 죄라는 것이죠.
3) 이런 악한 종들은 주인이 왔을 때 엄히 맞고 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벌을 내리실 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고 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은 많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해 행하지 않은 사람은 적게 맞는다는 것입니다.
안 맞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일 많이 책망을 받을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알 만큼 알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많이 행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48절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는 성도들에게 맡기시는 분량이 다르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12장3절에서는 성도들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사람마다 타고난 배경과 지능, 건강, 재물, 같은 것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나눠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만큼인지 스스로 압니다.
받은 은혜가 많은데 주님 뜻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나를 위해 쓰고, 나만 편히 사는 삶은 점점 공허해 집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보면 바울사도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같은 그릇들이 많은 데,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는 것입니다.
쓰기는 다 쓰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알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는 잘 않더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보면 항상 자기만의 그만그만한 믿음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기도 십 분 하던 사람이 이십 분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성경 안 읽던 분이 매일 한 장 읽는 거 아주 어렵습니다.
그게 믿음의 그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가진 조건이나 습관, 그리고 살아온 백그라운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게 마음 한 번 먹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이상을 내 놓으라고 안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자녀들이나 가족들, 동료들 보면 왜 저 사람은 늘 저럴까, 왜 달라지지 않을까 답답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더 요구하지 않으시는 데 우리가 그럴 권리가 없는 것이죠.
정 못 쓰겠다 싶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죠.
다만 우리가 어떤 그릇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깨끗한 그릇이 되면 주인이 귀하게 쓰신다는 거예요.
내 그릇이 작을지라도 바른 양심을 지키고,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면 우리에게 주신 알맞은 청지기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작은 교회라 교회 안에서의 봉사나 교회 차원으로 하는 사역들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을 예배로 섬기고, 받은 은혜를 교회 밖 우리 삶의 터전에서 청지기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만 생각해도 그들에게 양식을 먹일 사람은 우리 뿐이잖아요?
기본적으로 가족들, 그리고 친구와 직장동료들, 직업의 세계를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불친절한 언행으로 그들을 때리지 말고, 주님께 받은 은혜를 그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주고,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나눠주는 게 청지기가 할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해야 우리가 복되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그렇게 살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내가 참 복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지 않으면 내가 복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되게 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많은 걸 가졌어도 내가 복되다는 생각이 안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 잠들지 않고 깨어서 기다릴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 것이죠.
주님을 알 수 있는 모든 방편들을 우리가 꾸준히 해나가면 성령께서 주님을 점점 사랑하고 소중히 섬기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궁극적으로 만나리라는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늘 주님께서 내게 오시길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필요한 부분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모두가 힘든 여건 속에서 살아 가지만 그것들도 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냥 억지로 살아내는 게 아니라 내 구역의 청지기로 살아가면 우리 삶도 더 활력 있고 보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고 청지기로 살아간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와서 섬긴다고 하셨죠?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고 깊이가 다릅니다.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내게 맡겨 주신 것들을 나눠주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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